돼지 저금통을 어디에 쓸고?

10년동안 모은 정성을 민주노동당에 내려 했는데...

등록 2004.01.30 04:23수정 2004.01.30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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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는 1996년부터 빨간색 돼지 저금통을 키워 왔다. 왜 과거형일까? 지금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다. 빨간색 돼지 저금통은 어디로 갔을까?


올 설날은 유난히 눈도 많이 내리고 추웠다. 방송에서는 70년만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내가 자랄 때 겪은, 손에 문고리가 짝짝 달라붙던 그런 추위는 아니었고 무릎까지 빠지게 내리던 그런 눈은 아니었다. 그러나 근래 보기 드문 눈과 추위였던 것은 확실하다.

지난 1년 노동자와 농민들의 삶이 더 고달퍼졌으니, 없이 사는 사람들의 설은 더 추웠으리라. 노무현 정부가 들어섰을 때, 환호하던 사람들은 아마도 밥술 깨나 먹는 사람보다도 배고픈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설을 보냈을까.

설을 쇠고 며칠 후 우리 부부는 집 근처 공원을 산책했다. 모처럼 분위기 좋게 부부가 산책을 한 것이다. 나는 이 좋은 분위기를 이용하여 아내에게 고백을 할 참이었다. 아니, 고백이 아니라 사정을 하려고 했다. 그래서 분위기 봐가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는데, 어랍쇼. 아내가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이 아닌가.

내가 조심스럽게 아내에게 사정하고자 했던 것은 10년 가까이 키워온 돼지(저금통)를 민주노동당에 기부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그 돼지를 이미 자기가 잡아 먹었다고 했다. 그 놈의 배를 가르고 속에 든 것을 꺼내 써버렸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잘 키워서 13만8000원이나 들어서 옹글게 썼다나? 이유는 생활비가 궁해서란다. 아, 가난한 아내여, 빈궁한 나의 살림이여.

나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우선 그 돼지는 진보정당의 뿌리를 굳건히 하기 위해 내 조그만 정성을 민주노동당에 바치고자 한 것이었다. 둘째는 그 돼지 저금통을 깰 정도로 내 삶과 우리 가족의 생활이 궁핍하다는 것이다. 나는 울고 싶어졌다. 흐르는 눈물과 분노를 참을 길 없어 아내를 뒤에 남기고 달려나와 버렸다.


23년을 함께 한 아내와 나의 정치적 입장은 같으면서도 또 다르다. 1997년 대선에서 아내는 김대중을 찍었고, 나는 권영길을 찍었다. 당시 나는 전남 완도군의 한 섬에서 근무 중이었다. 때가 때이니만큼 직원들과 저녁 회식을 하면서 대선에서 누구를 찍을 것인지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 지역 사회 분위기는 당연히(?), 그리고 누구나 할 것 없이 김대중이었다. 그러나 나는 권영길을 지지한다고 다소(!) 용감하게 말했다.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약간 썰렁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험악해졌다. 당연히 좋았던 회식 분위기는 확 바뀌고 말았다.


당시 나에 대한 비난과 비판의 이야기는 대충 이렇다.

"너는 어디 놈이냐?"
"김대중 선생의 민주화를 위한 고난을 생각해 봤느냐?"
"김대중 선생의 박학다식함과 경륜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권영길이 당선 가능성이 없지 않느냐? 당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찍어야지."
"권영길을 찍으면 000당이 어부지리를 얻을 텐데, 그래도 좋냐?"
"결과적으로 000이 당선되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이냐?" 등등.

그러나 이렇게 쏟아지는 이야기들에 맞서는 내 주장은 이랬다.

"당신들의 이야기는 충분히 이해한다. 또 공감하는 부분도 많다. 그러나 나는 좀 더 멀리 보고자 한다. 지금 우리 나라는 외환 위기에 직면해 있다. 결국 IMF의 지원을 받아 이 위기를 극복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IMF는 주 출자국이 미국으로 이는 GATT와 함께 2차대전 후 미국이 경제적인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조직이다.

우리 나라는 신자유주의로 가게 될 것이다. 그러면 노동자와 농민의 삶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장담 못한다. 외환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김대중이 되든, 이회창이 되든 미국 주도의 IMF 지시를 받지 않을 수 없다.

비록 민주노동당이 소수에 머물지라도 노동자의 표가 노동자당에 몰림으로써 대선 후보들의 당락을 결정하는 결정적 요소가 된다면, 차기 대선이나 앞으로 있을 각종 선거에서 노동자들의 주장이나 삶을 위한 배려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민주노동당을 지지한다. 일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의 처지가 근본적으로 나아지기 위해서는 유럽처럼 진보정당이 커야한다."

험악하게 회식을 마치고 집에 와 아내에게 같은 말을 했다. 내 나름대로는 지원군을 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니 이런, 아내가 나를 참 한심한 사람이라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결국 우리 부부는 의견 합의를 보지 못하고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결국 아내는 김대중을 찍고, 나는 권영길을 찍었다. 만약 권영길이 100만 표를 얻었으면, 김대중은 낙선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우려했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시 회식에서 언쟁했던 동료들과 아내가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수긍을 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의 경제 정책은 내가 우려했던 바대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 5년 동안 노동자는 거리로 내몰렸고, 농민들의 이농 현상은 가속화되었으며 빈부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구속된 노동자는 김영삼 정권 때보다 많았다.

그러던 내가 2002년 대선에서는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다. 기본적인 입장은 1997년과 달라지지 않았는데, 1997년 당시 나를 몰아세우던 동료들과 같은 생각을 나도 하게 된 것이다. '절대' 000당과 000이 승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당시 생각으로 노무현은 대단한 양심과 소신을 가진, 서민의 벗이었다. 나는 그를 적극 지지했다. 그때 나는 키우던 돼지 저금통을 노무현을 위해 쓰려고 했다. 하지만 노무현을 적극 지지하던 아내가 웬일인지 돼지 잡는 일만은 좀 신중하자며 말리는 게 아닌가.

그렇게 해서 다행히 돼지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그 놈을 해치우지 않은 것이, 아내가 나를 저지한 일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노무현 정부의 임기가 채 1년도 안 된 지금, 나는 내 손가락을 잘라버리고 싶을 정도로 자신을 책망하고 있다. 나이 50이 넘고 학생운동이며 노동운동을 해 온 내가 그 때 왜 그렇게 판단력이 부족했을까 하는 생각뿐이다. 거리로 내몰리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죽어가는 노동자와 농민을 볼 때마다 죄를 지은 심정이 들어 나는 움츠러 든다.

그래서 내 손가락을 잘라버리는 대신 속죄의 의미로 고이 간직해 온 돼지 저금통을 민주노동당에 내려고 했다. 적은 돈이지만 진보정당에는 달디 단 영양 공급을 할 수 있으리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물론 지금이라도 내 돼지 저금통에 모은 돈 13만8000원을 마련해 민주노동당에 낼 수 있다. 하지만 10년 정성으로 모아온, 온갖 동전과 코 묻은 지폐로 모은 13만8000원만 할까. 그 돈에는 단순히 정액적인 금액이 아니라 쉰이 넘도록 지켜온 나의 정치적인 신념과 의지가 담겨 있다. 김대중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맞서고 한 때는 노무현을 지지하는 우(?)를 범하는 우여곡절 끝에 지켜온 나의 신념이란 말이다.

어쨌든 나의 그 신념은 가난한 살림으로 인해 내 뱃속을 채우는 데 쓰이고 말았다. 내 사랑하는 빨간색 돼지 저금통아! 미안하구나. 다음에는 좀 더 너를 튼실하게 키워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하마. 너를 정말 알찬 곳에 쓰도록 하마.

덧붙이는 글 | 나는 국가는 부자이나 국민은 살기가 힘든 나라보다는 북서부 유럽처럼 국민이 고루 잘 사는 그런 나라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것은 노동자들이 정치적으로 실세가 되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 우리 정치사에서 충분히 증명되었다고 봅니다.

덧붙이는 글 나는 국가는 부자이나 국민은 살기가 힘든 나라보다는 북서부 유럽처럼 국민이 고루 잘 사는 그런 나라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것은 노동자들이 정치적으로 실세가 되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 우리 정치사에서 충분히 증명되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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