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문화재에서 오줌 눈 거네"

작지만 아담한 절집 보덕사를 찾아서(2)

등록 2004.02.02 14:06수정 2004.02.02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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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 있는 화장실을 '해우소'라고 한다. 근심과 번민을 벗어버릴 수 있는 곳이라 하니 절을 찾을 때면 한번쯤은 들러 세속에 찌든 번뇌를 훌훌 떨쳐 버려야지 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정작 절에서 해우소에 들어간 기억은 별로 없다.

이기원

보덕사에서 해우소를 찾은 건 아들 녀석이었다. 급하다며 스님께 화장실을 물어 뛰어갔다. 하지만 일을 끝내고 나오는 녀석은 근심과 번뇌를 벗어낸 표정이 아니라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화장실이 너무 지저분해서 속이 울렁거려."
"저런, 해우소에서 스트레스 왕창 받았구나."
"다시는 안갈 거야."

녀석은 해우소 아래로 오물과 휴지가 뒤섞인 모습이 훤하게 보여서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다. 수세식 화장실에 길들여진 아이의 반응으로는 당연하지 싶다. 돌 두 개 괴어 놓고 볼일 보던 재래식 변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어른들조차 수세식 화장실에 익숙해지면 이따금 시골집에서 경험하는 재래식 변소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터에 아이들이야 오죽하겠는가?

투덜대는 녀석을 달래며 해우소 옆을 지나치다 문득 안내판을 발견했다. 해우소에 안내판까지 설치했다는 게 신기해서 잠시 서서 읽어보았다.

이기원

"광수야, 이 해우소가 얼마나 오래된 건지 알아?"
"몰라"
"120년 전에 만든 거야."
"아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
"봐라, 저기 안내판에 1882년에 건립되었고 120년 되었다고 씌어 있잖아."
"어, 정말이네. 그럼 아빠보다 나이가 많네."
"할아버지보다도 나이가 많은 걸."
"우와, 대단하다."

관심이 생기면 반응이 빠른 것이 아이들의 특징이다. 녀석은 해우소에서 얻은 짜증을 까맣게 잊고 해우소 안내판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한마디했다.


"아빠, 화장실도 문화재가 될 수 있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저기 봐. '강원도 문화재 자료 123호'라고 써 있잖아."
"정말이구나. 광수가 대단한 걸 발견했네."
"우와, 그럼 난 문화재에서 오줌 눈 거네."

녀석은 마냥 좋아했다. 국보도 보물도 아닌 지방 문화재 자료에 불과하지만 아이에겐 대단한 의미로 여겨지는 모양이다. 해우소에 들어가서 받은 스트레스를 안내판을 읽으면서 간단하게 풀어버렸다.

정말 뜻밖의 수확이었다. 수많은 이들의 근심과 번뇌를 풀어주면서 긴 세월을 우직스럽게 버티고 서 있는 보덕사 해우소의 모습이 어느 순간 정겨운 느낌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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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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