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282

남파 간세 사건 (10)

등록 2004.02.04 14:35수정 2004.02.04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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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심쩍은 것이 있으면 쉽게 죽이지 않는 곳이 무림천자성이다. 죽여 버리면 영영 진실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형당과 비문당, 그리고 철마당의 당주들이 연명으로 지옥갱에 보낼 것을 요청하였으므로 이제 금대준과 백지녕이 지옥갱으로 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들을 그곳에서 있지도 않은 일을 있는 것처럼 꾸며대야 하는데 둘의 말이 완벽하게 일치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런데 둘은 철저하게 격리될 것이므로 둘의 말이 일치할 확률은 거의 없다 하여도 무방하다.

매일 매일 작업이 끝난 후 고문이 가해질 것이고, 견디다 못한 둘은 자살을 기도할 것이나 여의치 않을 것이다.

마음대로 죽도록 내버려 둘 지옥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는 와중 금대준은 예전에 이회옥과 냉혈살마 안선중, 그리고 비접나한 손해구가 탈출하였던 탈출로를 찾게 될 것이다.


그들이 그곳을 통하여 탈옥하면 즉각 생포될 것이고, 곧바로 피거형에 처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스스로 배설한 오물 속에서 죽고, 그 속에서 썩어 시신마저 오염될 것이다.

이는 대역죄를 지은 죄인에게 행하는 부관참시보다 더한 형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금대준에게 그 동혈의 존재를 알려준 사람은 다름 아닌 이회옥 본인이었다. 그는 금대준이 스스로 간세임을 자백하도록 어둠 속에서 전음을 보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후후후! 이제 악의 원흉인 삼의와 그 밑에서 온갖 헛소리를 주절대던 놈들도 쓸어주지. 최견구? 네놈과 그 일당들은 물론 지금껏 권력에 빌붙어 온갖 악행을 자행하던 모든 놈들에게 지옥이 어떤 곳인지를 철저히 맛보게 해주마. 특히 왜문에 빌붙어 권세를 누리던 놈들은 부관참시를 각오해야 할 것이야.’

규환동 입구를 벗어나는 이회옥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그 동안 망설이면서 마음 속으로만 준비했던 일들을 이제부터 실천에 옮기려니 새삼 감개가 무량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선무곡은 다시 태어날 것이야. 지금껏 나쁜 놈들이 윗 자리에 앉아 온갖 나쁜 짓을 해먹을 수 있었지만 이젠 아니야. 곡도들이 무엇이 진실인지를 깨닫는 순간 놈들이 이루어 놓은 모든 것들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릴 것이야. 아암!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 말고.’

이회옥은 그동안 뽑을까 말까를 수없이 고민하던 마음의 칼을 뽑기로 마음먹었다. 그 칼은 먼저 선무곡의 썩은 부위를 빠르게 베어버릴 것이다. 그리는 한편 무림의 해악을 베게 될 것이다.

배루난과 전임 철검당주 방옥두, 그리고 전임 철마당주 뇌흔이 시초였고, 이제 금대준과 백지녕이 무림지옥갱으로 보내지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살풍(殺風)이 강호에 몰아치려는 것이다.

‘내 선조가 일으켜 세우려던 민족을 시궁창에 빠트려놓고 부귀영화를 누린 놈들은 한 놈도 남겨두지 않고 쓸어버릴 것이야.’

시간이 날 때마다 무천서원에 들러 이 책, 저 책을 들쳐보던 이회옥은 며칠 전 한 권의 얄팍한 서책을 집어 들게 되었다.

표지에 쓰인 심흔(心痕)이라는 글씨가 워낙 달필(達筆)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저술한 사람이 이미 작고한 무궁공자 이위소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대 석학인 그는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가 궁금했던 이회옥은 지체 없이 그것을 펼쳐들었다. 안에는 문득 문득 떠오르는 상념을 기록한 듯한 것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 중에는 국광상광개토호태왕과 이정기, 그리고 고선지와 장보고의 드높은 기상과 웅대한 의지를 흠모한다는 내용의 글도 있었다. 그 글의 후미(後尾)에는 그들의 피를 이어받은 선무곡이 낙후된 것이 안타깝다는 글이 쓰여 있었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선무곡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윗자리에 앉아 있는 썩은 것들을 단호하게 쓸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첩경(捷徑 :지름길) 중의 첩경이라고 진단해 놓았다.

책의 말미에는 냉혈철심의 초청을 받아들여야 할지 어떨지를 고심한 내용의 글이 쓰여 있었다. 그 글 아래에는 붉은 주사로 쓴 극비(極秘)라는 글자와 해제(解除)라는 글이 있었다.

아마도 이위소가 선무곡으로 간 직후 이것을 발견한 무림천자성에서 극비로 분류해 놓았다가 세월이 흘러 그에 대한 이야기가 시들해지자 해제하였기에 서가에 꽂혀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회옥은 다물연공관에 있을 때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광개토대제와 조우한 적이 있었다.

그때 대제는 선무곡이 무림제일문이 되지 못하고 늘 왜문과 같은 문파에 의하여 침탈을 당하는 이유가 있다 하였다.

본시 짐승을 만들기 위해 빚어졌던 진흙으로 빚어 만든 자들의 후손들이 윗자리를 모두 차지하고 앉아 있으면서 사리사욕을 채우느라 진심으로 곡을 돌보지 않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러면서 말하길 모조리 도태시켜야 한다는 요지의 말을 했었다.

도태라 함은 제거를 의미하는 것이고, 이는 물리적인 생명을 끊는 것이다. 따라서 이위소의 생각이 대제의 생각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에 이회옥은 크게 고무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확고한 결심을 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책을 모두 읽은 이회옥은 서가를 뒤져 이정기에 관한 것이 있는가를 찾아보았다. 무천서원의 서가는 천하에서 가장 많은 서책들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다. 그렇기에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서책이 하나쯤은 있으리라 판단하였던 것이다.

과연 수고를 아끼지 않은 보람은 있었다.

필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정기가 어떻게 세력을 일으켰으며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가 담담한 필체로 쓰여 있는 서책이 있었던 것이다.

이정기는 수하들을 다룸에 있어 상을 내릴 때에는 기대치보다 더 큰상을 내렸다고 한다. 이는 당시 다른 지역을 다스리던 번주들의 태도와는 사뭇 다른 태도라 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여기저기에서 전쟁이 벌어졌으므로 전리품이 풍부한 때였다. 다른 번의 번주들은 그것들을 모조리 거둬들여 보물 창고에 쌓아만 둘뿐 배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정기는 달랐다!

세운 공(功)의 정도에 따라 전리품 거의 전부를 나눠줬던 것이다. 대신 과(過)가 있다면 단호하게 벌을 내렸다.

그렇기에 이정기 휘하에 있던 평로치청군의 군사들 가운데에는 도주하는 자가 없었고, 오히려 스스로 군사가 되겠다고 찾아오는 자들이 늘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이정기는 수하들 간의 파벌이 생기면 둘 가운데 하나를 반드시 쳤다. 그 기준으로 누가 더 백성의 평안과 안녕을 위해 힘을 쓸 것인가였다. 그리고 누가 덜 부패했는가였다.

이정기는 관료를 뽑아 쓰되 아무리 뛰어난 학문을 지녔다 하더라도 공신의 일가친척도 배제하였다. 그것이 파벌의 시작이며, 부패의 시작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관료를 뽑아 쓰되 한 곳에 오래 두는 법도 없었다. 고인 물은 썩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치세(治世)에 응용한 것이다.

이회옥은 자신의 조상이지만 이런 대목을 읽으면서 과연 영웅이라 불릴만하였고, 후인(後人)들의 추앙을 받을만한 거목이었다는 생각에 가슴 벅찬 희열을 맛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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