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나 금방 방귀 뀌었다!"

부부의 사랑학과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 대하여

등록 2004.02.05 14:51수정 2004.02.06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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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자주 걷습니다. 시내에 볼일이 생기면 걸어서 다녀오곤 합니다. 왕복 두 시간이 족히 걸리는 꽤 먼 거리도 버스를 이용하지 않고 그냥 걸어서 다녀옵니다. 처음에는 집을 나서면서 큰일을 저지르는 사람처럼 마음이 들뜨기도 했지만 몇 번 하다보니 본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아무런 생각이나 느낌도 없이 집을 나서곤 합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저녁을 먹고 나면 산책을 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토요일 오후에는 좀 더 먼 곳을 정하여 걸어갔다가 돌아오곤 했습니다. 가을이 오거나 하면 한참 생각에 젖어 걷다가 가던 길을 되돌아와야 하는 아쉬움도 적지 않았지요. 때로는 그런 아쉬움이 너무 커서 제가 마음으로 정한 반환점이 자꾸만 더 멀어지기도 했습니다. 돌아와서는 책상에 앉아 이런 어줍잖은 시를 쓰기도 했지요.

이 가을에
어딘가를 떠나고 싶다

하지만 어디쯤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 편이 더 사무칠 지는…


사람이란 참 우습습니다. 그렇게 걷기를 좋아하면서도 시내에 볼일을 보러 갈 때는 꼭 차를 타고 가야한다고 생각했으니 말입니다. 그런 일종의 고정관념이 깨진 것은 순전히 아내 덕분이었습니다. 아내는 저와는 달리 낭만적인 동기에서라기보다는 버스 값도 아끼고 부실한 몸을 튼튼히 하려는 현실적인 동기에서 저와 시내까지 함께 걸어갈 것을 제안했던 것입니다.

어제도 저는 아내와 걸어서 시내를 다녀왔습니다. 아내는 계절을 지나 옷을 사는 버릇이 있는데 50% 세일을 한다는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학교 도서관에서 책 정리를 하다가 돌아온 저를 자꾸만 부추기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마침 사고 싶은 책이 있었던 터라 가벼운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고 함께 집을 나섰습니다.


동천에서
동천에서안준철
요즘 며칠째 영하의 날씨라 제법 날씨가 쌀쌀했지만 한참을 걷다보니 추위가 느껴지지도 않고 영하의 찬 공기가 오히려 정신을 맑게 해주었습니다. 더욱이 일급수의 맑은 내(川)가 흐르는 동천을 끼고 걷고 있었으니 그 상쾌함이 오죽했겠습니까? 집과 가까운 곳에 그런 맑은 하천이 흐르는 도시에 사는 것도 큰 행복이지요. 자주 함께 걷다보니 부부 사이에 이런 시시껄렁한 대화가 오고가기도 합니다.

"여보, 나 금방 방귀 뀌었다!"
"그래, 잘 했네."
"사람은 하루에 열 다섯 번 정도 방귀를 뀐대."
"난 더 뀌는 것 같은데."
"그래? 난 몇 번이나 뀔까?"


"이렇게 걸으니까 참 좋다. 차비도 아끼고."
"공해도 유발하지 않고 말이야.
"맑은 공기를 마시니 건강에도 좋고."
"그럼 일석삼조네."
"아니야, 일석사조야. 당신하고 이렇게 얘기도 하고."

동천에서
동천에서안준철
아내와 저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욕실에 물을 받았습니다. 아들도 대학생이 된 뒤로는 방학이 되어도 집에 오는 날이 드물어 늘 둘이서만 지내는 집에서 따로 물을 받아 목욕을 할 필요도 없을 것 같고 해서 함께 욕조 들어가 건강에 좋다는 반신욕을 했습니다.

저는 평소의 습관대로 탕 속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고, 아내는 제게 등을 대고 앉아 있다가 피곤했는지 그만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몸이 차츰 제 쪽으로 기울어지더니 저를 베고 비스듬히 누운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는 오른 손에 책을 든 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가 깰까봐 조바심하느라 왼손조차 쓸 수 없게 되어 흐르는 땀도 내버려두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정지된 자세로 10분 가량 흘렀나 봅니다. 아내는 가볍게 코를 골기 시작했고, 저는 한 손으로 책장을 넘기며 책을 읽다가 그마저 여의치 못하여 포기한 채 숨을 죽이고 앉아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정말 고요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 장면을 누군가 비디오를 찍었다면 에로 영화의 한 장면쯤 되었겠지만, 제 머리 속에는 난데없는 알퐁스 도데의 '별'의 한 장면이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설을 불과 이틀 앞두고, 아내의 갑상선에서 혹이 발견되어 조직검사를 하고 돌아온 그 날 밤도 마치 우주가 운행을 멈춘 듯 고요하기만 했습니다. 그날 아내는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로 "암이면 어떻게 해? 나 당신하고 오래 살고 싶었는데" 하고 마음 약한 소리를 해대다가 잠이 들었고, 저는 밤 두 시가 넘도록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베란다에 나와 별이 몇 개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는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문득 기도를 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다보면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마치 부모에게 한번도 안부 인사를 드리지 않다가 돈이 필요해서 전화를 한 자식이 반갑게 전화를 받은 부모 목소리에 그만 입을 열지 못하는 그런 식입니다. 그래도 다급한 마음에 염치 불구하고 저는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저도 아내와 오래 살고 싶습니다. 도와주세요. 하나님!"

그렇게 짧은 기도를 마치고 다시 밤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저는 제 마음에 먹구름처럼 자리한 불안한 마음이 싹 가신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 자신 무언가 인격의 변화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이 자기 중심적일 수밖에 인간의 한계 같은 것이 한 꺼풀 벗겨져 나간 그런 기분이라고나 할까요?

그 후 아내는 조직검사 결과 양성판정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기도의 응답인지 아닌지 솔직히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결과와는 상관없이 전 그날 이후 많이 달라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내에게 기꺼운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말로 자세히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만, 아무튼 그로 인해 가장 큰 유익을 본 것은 바로 제 자신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 동안 아내의 잦은 병치레가 짜증이 나기도 했습니다. 큰 병이 있다거나 무한정 돈이 소모되는 그런 병이 아닌데도 그랬습니다. 부부가 일심동체라는 말은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 아니더라도, 둘 중 하나가 아프면 다른 한 사람도 덩달아 불편을 겪는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상통합니다. 말하자면 그런 식이었습니다. 아픈 아내보다는 아픈 아내로 인해 깨어질 지도 모르는 제 자신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는 어쩔 수 없는 이기심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기심으로 인해 정작 불편을 느끼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만약 그런 이기심을 떼어버릴 수만 있다면, 그래서 순전한 사랑으로 상대방을 대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상대에 대한 배려이기 전에 자신의 축복인 셈이지요. 말하자면 바로 그런 변화가 저에게 생긴 것입니다. 아내의 아픔이 제 아픔으로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그 동안 아내로 인해 겪었던 불편한 마음들이 씻은 듯이 사라진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기도의 응답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요즘 아내의 건강이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고 있습니다. 모르면 몰라도 제가 아내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면서 아내의 병세도 차츰 호전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병은 십중팔구 마음으로부터 오는 것이니까요. 제 자신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아내 자체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누구보다도 제 자신을 위해서 말입니다.

동천에서
동천에서안준철
저는 앞으로도 다리에 힘이 남아 있는 한 웬만한 거리는 공해를 유발하지 않고 걸어서 다닐 작정입니다. 부부사이도 그렇지만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자신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나 조건으로만 여기는 것은 결국 서로를 불행하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자연도 부부 사이만큼이나 서로 살을 맞대고 사는 각별한 관계이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드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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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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