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삭한 어린 시절의 추억 담은 '박주가리'

내게로 다가온 꽃들(21)

등록 2004.02.08 14:51수정 2004.02.08 17:26
2
원고료로 응원
이선희
어릴적 박주가리는 들판의 풀밭이나 담을 휘감고 자라던 흔한 덩굴식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하나 둘 시야에서 멀어졌습니다. 남들이 그런 것처럼 어른이 되면서 그런 자잘한 것들에 대한 관심보다는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면서 보이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다시금 그 어린 시절에 흔하게 보던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조금씩 알아갈 무렵에는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참을 찾아야만 보이는 식물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고, 도시 개발과 화학비료의 남용 등으로 점점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한 곳, 먼 곳에서만 그들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생활은 편리해졌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는 어떤 잘못을 하고 있는 것인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민수

'이름 없는 꽃은 하나도 없다. 단지 그 이름을 모르는 꽃이 있을 뿐이다.'

한 동안 꽃들의 이름을 몰라 속을 태울 때 뇌리를 맴돌던 말입니다. '그냥 꽃이라고만 불러도 되겠지' 하다가도 '아니, 그들의 이름이 있는데 불러줘야지' 합니다. 그러면 또 왜 그리 비슷한 꽃들에 종류가 많은지 꽃 이름을 알아 가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꽃과 조우를 했을 때 '누구야'하고 불러주면 저도 기분이 좋고, 꽃도 좋아합니다.

박주가리는 꼭 만나고 싶었던 꽃 중 하나입니다.

박주가리의 덩굴을 자르면 하얀 젖 같은 유액(乳液)이 나옵니다. 이렇게 줄기나 덩굴을 자르면 하얀 유액이 나오는 것들을 볼 때마다 어머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애야, 하얀 액이 나오는 것은 몸에 엄청 좋은 것이다. 씀바귀도 그렇고, 멱쇠채도 그렇고, 박주가리, 민들레, 상추도 그렇지."


저는 쓴 것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쓴 맛 뒤에 오는 단맛을 참 좋아하거든요.

김민수

그러면 박주가리도 먹었냐구요? 물론입니다.

식물에서 나오는 하얀 유액의 맛은 씁쓰름합니다. 그러나 박주가리의 유액에는 독성분이 있다니 너무 많이 맛보면 안되겠죠? 그러면 뭘 먹었냐구요? 박주가리의 열매입니다.


열매가 푸르스름할 때 박주가리 열매의 껍질을 까면 하얀 속살이 나옵니다. 그것을 먹는 것이죠. 무미건조한 맛이라고나 할까요? 아니면 참으로 아삭한 맛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침이슬을 머금고 있을 때면 더 물기가 많으니 아삭한 맛이 좋았고 조금이라도 익으면 텁텁하고 맛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잠시 기다리죠. 완전히 익어 열매가 벌어지면 살며시 땁니다. 민들레 씨앗을 닮은 박주가리의 씨앗을 입으로 불어 하늘로 날리면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던 박주가리 씨앗의 비행은 어린 시절의 꿈이었습니다.

김민수

박주가리의 열매는 달걀을 거꾸로 세운 듯한 모양입니다. 위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줄기의 하얀 유액에는 독성분이 들어 있고, 연한 순을 나물로도 먹습니다. 열매는 강장·강정·해독에 약용한다고 하고, 열매의 털은 솜 대신 도장밥과 바늘쌈지를 만들 때 사용되었다네요.

또 재미있었던 일은 덜 익은 열매의 속을 먹다보면 껍질부분에서도 하얀 유액이 나오는데 그 게 손에 난 사마귀에 바르면 좋다고 하여 종종 따서 손에 난 사마귀에 대고 문질렀던 기억도 납니다. 그리고 조금 위험한(?) 방법도 있었는데 곤충 사마귀가 손에 난 사마귀를 잘라준다고 해서 사마귀를 잡아 손위에 올려놓고 '물어라, 물어라!' 암만해도 말을 듣지 않던 재미난 기억도 납니다. 그런데 박주가리 열매가 효험이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제 손에는 사마귀가 하나도 없답니다.

김민수

또 재미있는 사실을 알았는데 덩굴식물은 저마다 감는 방향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인동초, 부채마, 박주가리는 위에서 보았을 때 시계방향으로 감으며 올라갑니다. 이에 반해 나팔꽃, 메꽃, 칡덩굴은 시계 도는 방향과 반대로 감으며 올라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계 도는 방향으로 도는 것은 '오른쪽감기'라고 하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감는 것은 '왼쪽감기'라고 한답니다. 오른쪽 왼쪽 다 능수 능란한 것도 있냐고요? 더덕이나 환삼덩굴처럼 정해진 방향이 없이 양쪽으로 다 도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식물의 세계, 가만히 들여다보면 신기한 것 투성이요, 그것을 통해서 들려주는 말도 무척이나 다양합니다.

김민수

박주가리의 꽃에는 잔털이 많습니다. 그래서 마치 두꺼운 솜옷을 입은 듯한 형상이거나 목도리를 한 형상입니다. 두꺼운 솜옷을 입는 다는 것은 뭔가 떠날 준비를 하는 것만 같습니다. 긴 여행을 떠날 때 너무 많은 짐을 가지고 가면 힘이 들지만 몸에 거치고 가는 옷만큼은 따스하게 준비하고 떠나야 할 것입니다.

이선희 선생님이 그린 박주가리의 그림에 써있는 구절 '그대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어간 이가 그토록 살고 싶어하던 내일…'이라는 말과 박주가리꽃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한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온 곳으로 돌아가는 어떤 장엄한 기운이 듭니다. 이 세상으로 올 때에는 알몸으로 왔지만 온 곳으로 갈 때에는 옷을 입고 갑니다. 그 옷의 느낌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박주가리를 지난 가을에 만났으니 최소한 20년만의 조우이니, 저의 삶에서도 꽤나 오랜만에 만난 꽃입니다. 그동안 눈길 한번도 주지 않다가 이제야 보고 싶다고 나타났는데도 타박을 하지 않고 반겨주는 것, 그것이 꽃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선희 선생은 초등학교 교사로 주중엔 꽃보다 아름다운 아이들과 생활하다가 주말은 돋보기 들고 들에 나아가 꽃 관찰하며 이야기 나누고 그러다 화폭에 담아 응접실에 걸어놓고 행복해 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색연필로 들꽃을 그린 지 4년째입니다. 예쁜 카드(현재 3집까지 나왔음)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들꽃을 소개할 뿐만 아니라 카드를 팔아 불우한 어린이를 돕고 있습니다.

<내게로 다가온 꽃들>은 총 100회를 목표로 시작했으며, 이 기사를 통해 나오는 원고료와 관련 수익금은 전액 불우어린이들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기사까지의 기금] 400,000원

덧붙이는 글 이선희 선생은 초등학교 교사로 주중엔 꽃보다 아름다운 아이들과 생활하다가 주말은 돋보기 들고 들에 나아가 꽃 관찰하며 이야기 나누고 그러다 화폭에 담아 응접실에 걸어놓고 행복해 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색연필로 들꽃을 그린 지 4년째입니다. 예쁜 카드(현재 3집까지 나왔음)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들꽃을 소개할 뿐만 아니라 카드를 팔아 불우한 어린이를 돕고 있습니다.

<내게로 다가온 꽃들>은 총 100회를 목표로 시작했으며, 이 기사를 통해 나오는 원고료와 관련 수익금은 전액 불우어린이들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기사까지의 기금] 400,000원
댓글2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2. 2 수능 도시락으로 미역국 싸 준 엄마입니다 수능 도시락으로 미역국 싸 준 엄마입니다
  3. 3 의사 아빠가 죽은 딸의 심장에 집착하는 진짜 이유 의사 아빠가 죽은 딸의 심장에 집착하는 진짜 이유
  4. 4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 경희대 시국선언문 화제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 경희대 시국선언문 화제
  5. 5 미국에 투자한 한국기업들 큰일 났다... 윤 정부, 또 망칠 건가 미국에 투자한 한국기업들 큰일 났다... 윤 정부, 또 망칠 건가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