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판은 삶의 축소판과 같지요”

[인터뷰]송암 어린이 바둑 교실 이래일 원장

등록 2004.02.09 10:21수정 2004.02.09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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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일 원장은 혼자 바둑을 두면서 끊임없이 연구한다.
이래일 원장은 혼자 바둑을 두면서 끊임없이 연구한다.이수정
“바둑판은 우리 삶의 축소판과 같지요. 상대를 이기려고 욕심을 부리면 수를 잘못 읽게 되고, 또 한번에 이기려고 하면 상대 안에 깊숙이 들어가 제압을 당하게 됩니다. 바둑을 하면서 삶의 여유와 이치를 터득했지요.”


바둑판을 사이에 둔 바둑 선수들의 고뇌에 찬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보는 이의 손에는 땀이 배인다. 고도의 두뇌 싸움에서 한 수를 어떻게 두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라지기 때문이다. 이런 바둑의 매력에 푹 빠져있는 이래일(45)씨는 평소 취미로 즐겼던 일이 생업이 된 사람이다.

백 돌과 흑 돌을 한 수씩 옮기며 살아가는 이치를 떠올리는 이씨가 바둑을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다. 우연히 동네 노인들이 동구나무 그늘 아래서 바둑 두는 모습을 어깨 너머로 본 것이 그를 바둑 인생으로 이끈 동기가 됐다. 조그만 물자 하나도 부족했던 60년대, 그는 생선을 담아 파는 나무상자와 깨진 사기그릇, 장독대로 바둑판과 백 돌, 흑 돌을 만들었다.

바둑으로 아이들의 집중력을 키울 수 있다는 이 원장
바둑으로 아이들의 집중력을 키울 수 있다는 이 원장이수정
“나무 상자의 나무를 촘촘히 맞대고 먹지로 선을 그어 판을 만들었지요. 깨진 그릇은 숫돌에 매끈하게 갈아 바둑알을 만들어 바둑을 두었습니다. 동네 노인들이 하는 모습을 어깨 너머로 보고 배웠는데, 친구들 사이에선 제가 바둑 왕이었지요.”

직접 바둑판을 만들 정도로 바둑에 열정을 보였지만, 성장과 함께 가족의 생계를 일정부분 책임져야 했다. 일제시대 때 항일운동으로 몸이 약해진 부친은 생계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취업 전선에 뛰어든 그는 6개월 여 간의 사회생활로 돈을 모아 이듬해에 대학에 진학했고, 바둑을 두는 것으로 생활의 고단함도 잊었다. 졸업 후에는 치료제 전문 제약회사에 들어가 10여 년 만에 지점장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다.


삶의 기반도 잡히고 생활은 안정적이었지만 ‘40세가 되기 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걸어야 할 길’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으로 회사에는 사표를 냈다. 바둑인의 길을 걷기 위해서였다. 주변에서는 좋은 직장을 그만두려 한다고 야단이었지만 그의 눈에 좋은 근무여건과 높은 연봉은 더이상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교재 연구도 그의 주업무.
교재 연구도 그의 주업무.이수정
“생계 유지를 위해 걸었던 길이었기에 미래의 삶은 제가 진정하고 싶은 일을 하고자 마음 먹었습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바둑 전문가에게 1년을 배웠지요. 그리고 대전의 한 초등학교 특별활동 바둑 수업에서 강사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둑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는 강사 활동을 하면서 5단을 땄다. 그리고 지난 2002년에는 전국 바둑교실 협회에서 인정하는 6단에 올랐다. 프로 선수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였다. 바둑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열정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그의 모습을 있게 했다.

현재 운영하고 있는 대전 중촌동 송암 어린이 바둑 교실을 연 것은 지난 97년이다. 바둑인의 삶에 다른 한 가지 목표를 더하기 위해서였다. 유년시절, 넉넉지 못한 살림에 배우고 싶어도 마음 편히 공부를 할 수 없었던 그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삶을 살고 싶었다.

“예전에 제가 가졌던 생각이 지금은 많이 퇴색됐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서 삶의 보람을 찾고 있지요.”

바둑에 대한 열정으로 공로패를 받기도 여러번이다.
바둑에 대한 열정으로 공로패를 받기도 여러번이다.이수정
이수정
아이들과 바둑의 수를 교환하는 중에 그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예절과 바른 자세다. 10∼20분 집중하기도 어려워하는 아이들이 바른 자세로 바둑판 앞에 앉으면 자연히 2∼3시간까지 온 신경을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구리’, ‘호랑이 선생님’은 아이들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이다. 재미있고 온화하다가도 교육 중엔 엄한 모습으로 변하는 두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게 아이들의 설명이다.

어린이들에게 바둑을 가르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는 전국 바둑교실 협회의 상벌위원, 대전대의원 등의 직책도 맡고 있다.

“바둑은 평등합니다. 내가 한 수를 두면 상대가 한 수를 둬야 한다는 규칙이 있기에 일방적이지 않지요. 힘이 세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다는 것이 매력이지요.”

그의 바둑 예찬론은 끊임이 없다.

이창호 9단과 함께.
이창호 9단과 함께.이수정
최근 그는 영어공부에 푹 빠져 지낸다. 2008년 북경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면 유럽과 남미 지역에서 바둑 붐이 일 것이기 때문이다. 바둑이라면 세계 최강을 자부하는 우리나라를 세계가 집중하는 그날, 세계 곳곳에 바둑의 매력과 좋은 점을 널리 알리고 싶은 것이 그의 소망이다.

덧붙이는 글 | 행복한 소식만 전하는 인터넷 신문, 해피인(www.happyin.com)에도 실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행복한 소식만 전하는 인터넷 신문, 해피인(www.happyin.com)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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