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제 폐지 지지' 교수, 사이버 테러 시달려

[인터뷰] 부계혈통주의에 대한 과학적 의견서 낸 서울대 최재천 교수

등록 2004.02.12 10:34수정 2004.02.12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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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최재천 교수

최재천 교수 ⓒ 우먼타임스

여성, 환경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글쓰기와 강연으로 잘 알려진 최재천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가 잇따른 협박 편지와 공격성 이메일, 전화에 시달리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최 교수가 지난해 12월, 헌법재판소의 요청에 의해 제출한 ‘호주제의 근간이 되는 부계 혈통주의에 대한 과학자의 의견’이 언론에 일제히 보도되면서 시작됐다.

최 교수는 A4용지 7장 분량으로 제출한 의견서에서 “인류진화에 여성이 남성보다 기여하는 바가 크다”며 “전통적으로 남자만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우리 족보와는 달리 생물학적인 족보는 암컷 즉 여성의 혈통만을 기록한다”고 사회생물학자로서의 입장을 밝혔다.

이와 관련한 보도가 나간 뒤 “정부에서 뭐 좀 얻어먹었냐?” 혹은 “가뜩이나 ‘똥값’인 우리나라 사내들은 점점 천대를 받게 되었네”라며 최 교수에게 항의하는 전화와 이메일이 하루에도 수십 건씩 쇄도하고 있다.

최 교수는 ‘병신 **야’, ‘여성호르몬이 많은 것 같다’, ‘동성애자인 모양이다’ 등을 비롯해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과 악의로 가득한 내용의 글이 편지와 이메일에 적혀 있다고 밝혔다. 심지어 과학을 전공한 교수들조차 '여성표 얻어서 국회의원 되려고 하나’, ‘생물학자가 이런 얘기를 굳이 해야 하나’라며 못마땅한 시선으로 본다는 것.

이런 행위의 근본 이유에 대해 최 교수는 “호주제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이라면서 “호주제를 없애고 가부장 문화를 털어버리면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한국 남성의 40~50대 사망률이 크게 떨어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최 교수를 만나 최근 심경과 호주제에 대한 과학적 평가를 들어보았다.

“과학의 본질은 가치중립적, 객관적인 견해제공”


-헌법재판소에 의견서를 제출하게 된 계기는?
“호주제의 근간이 되는 부계혈통주의의 정당성과 그에 따른 호주제도의 존폐에 관하여 과학자의 의견을 묻는 일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과학은 본질적으로 가치중립적이어서 호주제도와 같이 각종 이해관계로 인해 감정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은 사회적 문제에 대해 보다 객관적인 견해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흔쾌히 응했다. 역사적, 사회적, 법률적 분석은 다른 참고인들이 충분히 제공할 것이라 생각돼 과학적인 분석만을 제공했다.”

-의견서에는 어떤 내용이 실렸나?
“인간처럼 유성생식을 하는 생물들은 모두 난자와 정자가 결합하는 수정이라는 과정을 거쳐 태어난다. 암컷과 수컷이 각각 자기 유전자의 절반을 넣어 만든 난자와 정자가 만나 하나의 수정란이 되어야 새로운 생명체가 탄생하는 것이다.


흔히 유전자라고 부르는 것들은 대개 세포의 핵 속에 들어 있는 DNA를 의미한다. 그 중 세포가 사용하는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미토콘드리아라는 소기관에는 핵의 DNA와 다른 그들만의 고유한 DNA가 들어 있다.

핵이 융합하는 과정에서는 당연히 암수의 유전자가 공평하게 절반씩 결합하지만 핵을 제외한 세포질은 암컷이 홀로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토콘드리아의 DNA는 온전히 암컷으로부터 나온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생물의 계통을 밝히는 연구에서는 미토콘드리아의 DNA를 비교 분석한다. 철저하게 암컷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남자만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우리 족보와는 달리 생물학적인 족보는 암컷 즉 여성의 혈통만을 기록한다. 부계 혈통주의는 생물계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도 않을 뿐더러 존재할 수도 없다.”

-최 교수에게 편지와 메일을 보내오는 사람들의 비난과 항의는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호주제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를 남성중심사회라고 하지만 오늘날 진정으로 부계 혈통주의의 혜택을 보고 있는 남자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분석할 필요가 있다. 말로만 허울좋은 가장이지 실제로 막강한 가부장적인 권한을 휘두르며 거들먹거리는 남자들은 이제 우리 사회에 그리 많지 않다. 그러면서도 별로 이득이 되지 않는 제도가 여성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몇 년 전 우리 사회는 국제통화기금 사태를 겪으며 엄청나게 많은 노숙자들을 만들어 냈다. ‘가정이란 부부가 함께 꾸려나가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다면, 그런 어려움을 당했을 때 '면목없다'며 혼자 가출을 하거나 자살하는 남자는 적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남자들은 가부장의 멍에를 어쩌지 못해 그 무거운 짐을 혼자 짊어지려 한다. ‘가부장 계급장’을 떼어내면 정말 편해지는 건 남자들이다.”

“호주제 잘못된 인식탓 비난·항의 쇄도”

-편지를 뜯어보거나 이메일을 열어볼 엄두가 나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떤 기분인가?
“악의성 발언으로 가득 찬 글을 읽거나 욕설이 대부분인 전화 녹음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매우 씁쓸하다. 뭐 하러 이런 짓 해서 욕을 먹나 싶기도 하고…(최 교수는 잠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최 교수는 욕을 많이 얻어먹어서 오래 살 거야’란 말을 하면서 용기를 주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과학을 전공한 교수들조차 ‘여성표 얻어서 국회의원 되려고 하나’, ‘과부촌에서 출마하면 표를 쓸어 모으겠다’, ‘생물학자가 이런 얘기를 굳이 해야 하나’라며 못마땅한 시선으로 볼 때는 괴롭다. 환경과 여성 문제만큼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나?
“안사람(최 교수의 부인은 울산대 음대학장인 채현경 교수다)은 집에서는 잘 못하면서 밖에서 떠들고 다닌다며 핀잔을 주기도 했는데, 이 말 듣고 정말 억울했다. 우리는 주말부부라서 서울에 있는 내가 전적으로 아들의 육아를 책임지고 있다. 아무튼 내가 만난 최초의 여성학 지도교수(?)이기도 한 안사람은 ‘자신의 수제자로 성장한’ 나의 장족의 발전에 흐뭇해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지난해 발간한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에서 자손의 번식이란 측면에서 생물학적 권력이 암컷에게 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이 논리가 인간에게도 적용되는 것인가?
“인간도 포유류에 속하므로 이 논리는 당연히 적용된다. 생물의 세계에서 보면 이 세상은 암컷으로 시작했다가 필요로 인해 수컷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컷은 유전자를 보다 광범위하게 퍼뜨리기 위해 만들어진 진화의 산물인 셈이다.

새끼를 낳기 위해서 암컷과 수컷은 궁극적으로 협력해야 하지만 누가 더 투자를 많이 할 것인가를 놓고 저울질한다. 그 결과 암컷들은 질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진화한 반면, 수컷들은 질보다는 우선 양으로 승부를 보려고 한다.

기네스북에는 평생 69명의 자식을 낳은 어느 러시아 여인이 세상에서 가장 아이를 많이 낳은 여자로 기록돼 있다. 전부 13번의 임신에 두 쌍둥이, 세 쌍둥이, 네 쌍둥이를 섞어 낳았다. 그러나 이 기록도 남자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기네스북이 선정한 역대 최고로 가장 많은 자식을 낳은 남자는 1700년대 사람인 모로코의 이스마일 황제이다. 그는 아들 525명과 딸 342명을 합쳐 무려 867명의 자식을 낳았다.”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우리나라의 40대 남자 사망률은 세계 최고다. 가부장의 위압감 때문이다. 40대 남자 가장들은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새끼들을 내가 부양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직장에서 온갖 수모를 참아가며 버틴다. 그러다 병이 생겨서 자기 명대로 살지 못한다. 개인을 뛰어넘어 가정, 사회, 국가적으로도 비극이다. 호주제 없애고 가부장 문화를 털어버리면 남자 사망률은 크게 떨어질 것이다.”
최 교수에 보내온 항의편지 발췌 공개

지난 6일 최재천 교수는 자신에게 보내온 항의 편지의 일부를 공개했다. 최 교수의 양해를 얻어 편지글을 발췌해 소개한다. 호주제 폐지 반대 입장에 있는 한국사회의 보수적인 사회의식이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은 물론 양성평등 확산에 큰 저해 요인임을 확인시켜주는 글이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의 이름은 밝히지 않기로 했다. <편집자주>

나도 재천 교수보다 12년도 더 많은 사람이오.(중략)

오늘날 남자가 오래 못사는 이유는 내 생각으로는 기가 죽어서 그런 것이 가장 큰 원인인 듯해요. 요즘은 ‘계집(순수한 우리말 : 토박이말) 세상’이라 그것들의 기세가 등등한데, 정치꾼들이 선거 때 표를 의식해서 알랑거리며 계집들을 치켜세우고 있잖아요.

호주제 없애자는 것도 그 중의 한 가지. 가정의 상징적인 기준이 호주인데 기준을 안 세우고 ‘앞으로 나란히’를 할 수 있겠는가요? 그렇다면 나라에도 대통령 등 대표가 필요 없지요. 무정부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현재 우리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꼬라지’가 그 판이라고 봐요. 내가 보기에는 민주주의 할 자격이 없는 국민인 듯해서 이른바 ‘개발 독재’를 한번 더 했으면 싶어요. 또 어느 별 두 개짜리쯤 되는 장군이 나와서 ‘에라 시끄럽다’하며 확 걷어치우고 기강을 바로잡아야 정신을 차릴는지요. 나 역시 소위 ‘서민’이지만은 이렇게 여겨요. 날만 새면 집단 시위를 하니 누가 회사나 공장을 세우겠는가요. (중략)

나라꼴도 이 모양이고 집안에도 ‘남편’이란 존재가 희미하니 남자들이 살맛 나겠어요? 살아있어도 죽은 것보다 못하다고 해야지요. 최 교수. 생명과학이 어떤 건지 모르겠으나 그런 글을 신문에 발표하여 또 한번 여자들을 설치게 하지 말아줬으면 싶네요.

요새 우리나라 30, 40대 이혼율이 거의 절반이라는 말을 들었는지요? 이른바 고개 숙인 남자가 대부분이라 남자 맛을 본 계집들이 힘 좋은 남의 ‘고기’를 먹으려고 떠나는 거요.

주로 여자 쪽에서 핑계를 대어(성격이 안 맞느니 운운하며) 딸린 아이가 있어도 내버리고 가거나 아니면 전부(전 남편)의 자녀를 데리고 재가해도, 심지어 총각 녀석들 중에서도 ‘헤헤’하며 붙어살고 있는 세태가 아닌가요. 요즘 홈드라마 따위 TV 연속극 중에 반드시 그런 꼴을 모범인 듯이 방영하고 있지 않은가요?

근세의 우리나라 꼴과 같은 것-‘일본놈들이 길(도로)을 내놓으니 광복 후에 미국인들이 잘 다니고 있다’고 했듯이 남이 길을 내놓으니 (처녀를) 헌 각시를 맡은(?) 총각 놈은 힘이 안 들고 잘 노는 것이라고 해야지요.(중략)

호주제가 없어지면 더욱 개판이 되고 ‘문닫는 집안’이 많아진다는 걸 생각해봤는가요? 예를 들면 아들이 하나인데 장가가서 아들을 하나 낳았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외동아들이 뜻밖에 실사하면 젊은 며느리가 그 아이를 데리고 개가하여 여자의 성을 따르면 첫 번째 남편의 가문은 저절로 없어지는 것이지요. 그런 걸 생각해 보고 이번 글을 쓴 것인지요? 어찌 사람 관계를 짐승처럼 암수의 우열만 따지겠어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여성종합신문 <우먼타임스>에서 제공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여성종합신문 <우먼타임스>에서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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