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사
"너무나 많은 한국 사람들이 영어를 잘하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제 영어는 한국 사회에서 거대한 권력이 되어 있다. 영어를 쉽게 배울 수 있다면 더 이상 영어가 권력이 되지 않을 것이다. 영어의 권력화에 반대하면서, 독자들이 영어를 재미있고 쉽게 갖고 놀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 책을 썼다."(11쪽, ‘들어가는 말’에서)
내가 이 책을 집어들고 읽기 시작한 것은 사실, 영어 때문이 아니었다. 뉴질랜드에 살고 있는 같은 교민이지만 내게는 낯선 이름인 '이승욱'이라는 남자가 <오마이뉴스>에 올리는 나의 서평 연재물을 보고 책을 보내왔던 것이다. 그러나 <영어 죽이기>라는 그 책의 제목은 내 구미에 전혀 당기지 않았다.
그래도 책을 잘 받았다는 인사는 해야 도리일 것 같아 전자우편으로 감사의 편지를 보냈더니, 한번 놀러오라고 우리 가족을 초대하였다. 그러니 보내준 책을 안 읽고 갈 수가 없어서 책을 펼쳐 들었다.
그런데 '베끼기' 냄새가 풀풀 날리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책의 내용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어린 시절에 자주 들었던 약장수의 허풍처럼, 단숨에 영어를 정복할 수 있는 비법이라고 과대포장된 그럴듯한 요령들이 나열되어 있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들어가는 말에서 밝힌 ‘영어의 권력화에 반대한다’는 입장도 그랬지만, 저자의 이력과 험난했던 영어 학습의 과정을 소개하고 있는 첫째 마당의 글들은 너무나 인상적이고 재미있었다.
'Sunday'부터 'Saturday'까지의 순서도, 'January'부터 'December'까지의 단어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자칭 ‘대한민국 대표 꼴통’에서 네이티브 스피커를 능가하는 영어구사력과 이해력과 분석력을 요하는 뉴질랜드의 심리치료사가 되기까지의 눈물겨운 영어정복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그의 고등학교 성적표는 피아노의 흰 건반과 검은 건반처럼 오직 ‘가’와 ‘양’ 두 글자로만 조합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그는 어떻게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이들조차도 되기가 힘든 뉴질랜드의 심리치료사가 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가 뉴질랜드로 이민 온 첫날밤, 모텔 방에서 자신과 약속했던 다짐을 최선을 다해 지켜내고 실천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국을 떠나 잘살아보겠다고 큰소릴 빵빵 치고 떠나왔으니 이제부터 부끄럽지 않은 생을 살아야겠다’고 그는 아내와 딸아이 몰래 울면서 속으로 다짐했던 것이다. 그 다짐을 이루기 위해서는 영어정복이 필수였다.
그래서 그는 영어교실의 기초반에 다니면서도 매일 복덕방에 찾아다니며 부동산 중개인과 대화나누기, 오픈 홈 찾아다니면서 괜히 말 걸기, 수신자 부담전화에 전화 걸어 공짜로 듣기와 말하기 연습하기, 양로원에서 자원봉사하며 생활영어 익히기, 매일 신문사설이나 기획기사 한 꼭지씩 외우기 등 돈 안 들고도 효과적인 기발한 방식으로 영어를 길들였다. 그러한 노력에 힘입어 그는 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었고, 거기에서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마침내 영어를 정복하기에 이른다.
예상할 수 있듯이 그 과정은 쉽지만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숱한 시행착오와 좌절에도 굴복하지 않고 맨땅에 박치기하는 무식함과 뚝심으로 밀고 나갔으며, 드디어 아시아인으로서는 최초로 뉴질랜드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정신병 전문 재활 치료병원의 심리치료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 간 그의 글에는 억지 과장이나 자화자찬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너무나 솔직하고도 재미있고 코믹한 문체로 그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고 있어서, 내 눈에 고인 눈물은 감동 때문이 아니라 하도 웃느라고 나온 눈물이었다.
이 책의 둘째 마당부터 넷째 마당까지의 내용은 이 책을 펼쳐드는 이들의 실제 관심사인 ‘어떻게 하면 영어를 죽여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이다. 학문에는 왕도가 없고 따라서 영어 배우기도 왕도가 없겠지만, 그는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영어를 더 쉽고 빨리 잘하는 방법이 있음을 발견했고, 그 방법의 정수를 뽑아서 이 책에 소개해 놓았다.
그것은 한국식인 자음 중심의 발음이 아니라 영어식인 모음 중심의 발음으로 말하는 연습을 해야된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영어 동화책을 통째로 외우라는 주문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의 체험에서 우러난 것이기에 결코 과장되거나 허황돼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의 언어 습득은 6세 이전에 모두 끝난다”는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의 이론을 영어 조기교육 열풍을 합리화하는 이론적 근거로 내세우는 한국의 현실에 대해서도 그는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촘스키 이론에서 말하고 있는 언어란 모국어이며,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4~6세 무렵에 모국어를 제대로 습득하지 못하면 제2언어를 배우는 데 지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그는 지적한다.
또한 그의 전공 분야 중 하나인 발달 심리학에 따르면, 대여섯 살 무렵의 아이들은 동일시와 모방을 통하여 배우게 된다. 따라서 이 시기에 모국어가 아니라 영어를 배우는데 더 집중하다 보면 그들의 무의식 속에 우리나라 말보다 영어를 더 숭상하는 태도가 자리 잡게 되어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우리의 문화 자체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는 점을 그는 지적한다.
그래서 그는 “한국에서 조기 영어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입에다 조기를 한 마리씩 쑤셔 넣어줘야 한다”고까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영어가 권력이 된 이 시대의 한국 사회에 또 하나의 권력자로 군림할 영어 엘리트들을 더하기 위해 쓴 책이 결코 아니다. 그래서 그는 학교 다닐 때 영어 점수 70점 이상 받아본 사람은 이 책을 절대 보지 마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반대로 생각한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이 책을 봐야 된다고, 그래서 영어가 권력이 된 잘못된 이 사회 풍토를 그들이 앞서서 고쳐나가야 한다고.
또한 그는 말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영어는 내 수행의 도구였다고. 영어 실력을 갈고 닦는 과정이 내 인격을 갈고 닦는 과정 그 자체였다고. 과연 실제로 그를 만나보니 그는 참으로 맑은 사람이었다.
눈치 빠른 사람은 이 서평이 그의 부탁에 의해서 씌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의 서평을 쓰는 것은 그의 부탁 때문이 아니라 책을 읽고 난 후 실제로 만난 인간 이승욱에 반했기 때문이다.
한 수 가르쳐준다는 오만함이 아니라 함께 나눈다는 마음으로 쓴 이 책 <영어 죽이기>의 마지막 글에는 바로 그러한 인간 이승욱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가 말하고자 한 <영어 죽이기>의 비법도 바로 거기에 숨어 있다.
"나처럼 학교에서 성적 때문에 각광받지 못했던 동지들, 여기까지 잘 오셨습니다. 자신을 바꾸는 힘은 오직 자신과 진실한 약속을 할 때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진정 영어를 잘하고 싶다면 자신과 더불어 진실한 약속을 하십시오. 동지들, 고맙습니다."(263쪽, ‘넷째 마당 : 영어, 한 방에 조지기’)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터넷 서점 YES24의 독자리뷰에도 기고했습니다.
대한민국 대표 꼴통의 영어 죽이기
이승욱 지음,
동아일보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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