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9월에 출산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등록 2004.02.16 07:31수정 2004.02.16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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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폭발'이라는 용어까지 동원하며 인구 증가를 걱정하던 시절이 있었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표어가 어느 사이 '둘도 많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표어로 바뀌는 것도 경험했다. '산아제한', '가족계획'이라는 용어는 거의 일상적인 생활 용어나 다름없었다.


이런저런 공공장소에서 수시로 피임법 강좌가 열리고, 텔레비전에서도 피임법에 관한 프로를 쉽게 볼 수 있었다. 예비군 훈련장에서 무료로 정관수술을 해주고 훈련 면제까지 해주던 것도 기억에 생생한 일이다.

5·16 직후부터 경제개발 정책과 맞물려 본격적으로 실시된 산아제한 정책은 큰 실효를 거두었다. 국민들은 어느새 아이를 둘 이상 갖는 것을 비정상적인 일로 여기게끔 되었고, 우리나라는 산아제한 운동에서 세계의 모범국가로 자리잡게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천주교 성당에서도 주기법이니, 빌링스법이니 하는 피임법 강좌가 열리곤 한 일이었다. 천주교는 처음부터 가족계획을 반대했다. 그것은 세계교회가 마찬가지였다. 조물주의 창조질서를 거스르고 자연법에 위배된다는 견지에서였다. 그런 가톨릭조차 일부 성당들에서 피임법 강좌를 열곤 했으니, 일종의 아이러니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것은 물론 가족계획에 동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가족계획이 이미 대세를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분별없는 행동들을 제어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가족계획 시류에 휩쓸려서 신자들이 낙태까지 자행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 큰 죄를 짓는 일이고, 인간의 숭고한 모성마저 저버리는 짓이었다.

신자들로 하여금 낙태라는 살인에 해당하는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수술이나 약물 등 인위적인 피임법에 과도하게 의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 바로 주기법과 빌링스법 강좌였다. 성당에서 이런 피임법 강좌를 열도록 교회가 허용한 것은 일종의 고육지책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던 시절이 그다지 멀지 않은데, 이제는 오히려 인구가 너무 줄어들어 걱정이라고 한다. 출산율이 낮아질 대로 낮아져서 이렇게 가다가는 100년쯤 후에는 인구가 현재의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어 구한말과 비슷한 1600만명 정도로 감소할 것이라는 통계까지 나오고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것을 오히려 좋게 보고 쾌적한 환경을 만들 수 있는 조건으로 여기기도 하겠지만, 이런 감소 추세는 머지않아 노동력 감소와 경제성장 둔화, 사회 활력 저하 등 심각한 부작용을 낳을 것으로 우려된다.


마침내 지난달 정부에서는 방향을 되돌려 출산장려 정책을 펴기로 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우선 출산 가정에 20만원의 출산 수당을 주겠다는 방침도 내놓았다.

이 보도를 접하는 순간 가족계획 관련 기억들을 지니고 있는 세대들은 아연함과 함께 격세지감 같은 것을 느꼈을 법하다. 산아제한이니, 가족계획이니 하는 말이 나돌던 때가 어제인데…, 라는 느낌도 컸을 것이다.

출산장려라는 말은 이미 이태 전쯤부터 우리 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전남 지방 어느 고장의 민간단체에서 출산 가정에 20만원씩을 주기로 했다는 소식은 신선한 충격 같은 느낌을 안겨 주었다. 그 후 여러 광역·기초지방자치단체들에서 출산장려금을 지급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속속 들려왔다.

지방자치단체들의 그런 조치는 당연히 농촌인구 감소에 따른 시책일 터였다. 그리고 지방자치단체의 재정 문제와 관련하는 인구 유입책의 하나일 터였다. 처음엔 그런 시각과 함께 농촌 지역의 인구 감소 요인이 계속적인 이농현상에 있는 것으로만 생각했다. 그것이 실은 전국적인 출산율 저하에 기인하는 것임을, 그리고 출산율 저하가 그토록 극심할 줄은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다.

방향을 돌려 출산장려 정책을 펴겠다는 정부 발표를 가장 반기는 쪽은 아무래도 천주교일 것 같다. 이미 오래 전부터 출산을 장려하는 태도를 분명히 해온 한국교회는 지난해 2월 7일 '주교회의' 안에 '생명31운동본부(책임 이기헌 주교)'를 설립하고 출산 장려 운동에 적극 나섰다. 주교회의 생명31운동본부는 올해 '생명 하나 더'를 주제로 보건복지부·문화관광부와 함께 공익 캠페인을 벌인다고 한다.

생명31운동본부는 최근 정부 당국자들을 잇따라 만나 출산장려와 생명문화 정착을 위한 공익 운동을 함께 전개해 나가기로 하고, 그 첫 사업으로 '생명 하나 더' 공익 캠페인을 벌여 나가기로 합의했다는 것이다.

한국천주교가 지난해 주교회의 안에 생명운동을 관장하는 기구를 설치하면서 명칭을 '생명31운동본부'라고 한 것은 특별한 까닭이 있다. 지난해 2003년은 '모자보건법'이 제정된 지 30년이 되는 해였다.

모자보건법은 말 그대로 모자의 보건을 위해서 만들어진 좋은 법이지만, 이 중 14조항은 낙태를 허용하는 법안이다. 경제성장만이 최고 가치였던 시절, 인구 증가를 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법으로 인해 우리나라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낙태를 많이 하는 나라가 되어 있다.

이것이 상징하는 바는 매우 크다. 사회의 규범적 가치관과 도덕을 담고 생명 경시를 막아야 할 법이 오히려 생명 경시를 부추겼다는 점, 또한 법이 저버린 생명을 지켜내야 할 의료인들도 의료보험 수가 때문에 낙태 시술을 멈추지 않은 것은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사회 양심과 우리의 미래를 스스로 포기하는 무책임한 행동 모습이 거기에서 투영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는 우리 사회의 '죽음의 문화'를 대표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모자보건법 14조항의 문제점을 알리는 세미나를 개최하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생명 문화'를 보급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교의 풍부한 전통 안에 담긴 '생명'을 지키려는 아름다운 의지를 다지고, 가장 보잘것없고 약한 자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를 따라야 하는 교회 공동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사회를 위해서 무엇을 희생해야 하는지를 더욱 깊이 고민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난 30년 동안 우리의 생명을 지켜내지 못한 것을 반성하면서, 이제 그 죽음의 문화에 종지부를 찍고 2003년부터 생명 살리기 운동 원년을 시작한다는 의미로 생명31운동본부라는 명칭의 기구를 탄생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좀 곁길로 나가는 얘기지만, 출산율 저하는 가톨릭교회의 존립 자체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출산율 저하는 그대로 성직자 수도자 성소(聖召) 감소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천주교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는 '독신 정결'이 기본적인 조건이다. 성직자들이 입는 수단과 수도자들의 수도복은 '육신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성직자들이 목에 두르는 하얀 로만 칼라는 '독신의 정결'을 상징한다. 성직자 수도자들에게는 정결과 청빈과 순명이 삼위일체와도 같은 것인데, 청빈과 순명은 독신 정결로부터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천주교의 성직자 수도자들이 평생 동안 독신으로 살며 정결을 유지하는 것은 거룩하고도 신성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극기의 길이기도 하다. 그것은 본인뿐만 아니라 부모에게도 힘든 일이다. 성직자 수도자들이 처음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할 때는 본인의 결심 못지않게, 어느 면으로는 부모의 결단이 더 크게 작용할 수도 있다.

그것을 놓고 보면 자녀를 단 하나만 낳게 될 경우, 또 둘을 낳더라도 남매를 낳을 경우 성소에 대한 응답을 부모부터 반대하거나 큰 고민에 빠질 수가 있는 것이다. (독자 처지에서 사제가 된 이들도 많지만….)

아직 한국교회는 성소 감소 현상을 심각하게 겪고 있지 않지만, 출산율 저하가 장기적으로 이어진다면 필연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미 서구에서는 심각한 성소 감소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과거에 입었던 외국 선교사들의 은덕에 대한 보답 차원으로 더욱 적극적인 선교사 해외 파견 의지를 키우고 있는 한국교회로서는 더욱 출산율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만큼 정부의 출산장려 정책이 반갑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필자가 적을 두고 있는 대전교구 태안교회에서는 지난 1월 13일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구본국(베난시오) 신부님이 초등학생 자녀를 둔 젊은 엄마들의 모임인 <천사회> 회원들과 점심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올 9월에 출산을 하는 사람에게는 100만원의 육아 지원금을 주겠다"는 공시를 한 것이다.

"작년 가을쯤에 그런 말씀을 하셔야 하지 않느냐", "지금 그런 말씀을 하면 팔삭동이를 낳으라는 얘기냐"는 등의 우스개 항의들이 쏟아졌지만 신부님은 자신의 개인 돈으로 9월에 출산하는 엄마에게 꼭 100만원을 주겠다는 약속을 거듭 확실하게 했다고 한다.

신부님의 의중에는, 신부님의 그런 선언에 따라 의도적으로 아기를 갖기보다는 정상적이고 순리적인 부부생활에 의해 아기를 갖는 것이 더 바람직하고, 그런 부부생활에 의해 아기를 가졌다면 태중의 그 아기를 잘 기르고 낳아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태안천주교회는 올해 '본당 설립 40주년'을 맞았다. 그리스도교는 전통적으로 '40'이란 숫자를 뜻깊게 기념한다. 성서 상에 40이라는 숫자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들이 많기 때문이다. 태안천주교회는 4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들을 많이 기획하고 있는데, 절정 행사는 9월로 잡아놓고 있다. 태안교회의 기념 축일인 '성모탄신' 축일이 9월에 있기 때문이다.

만일 올해 9월에 출산하는 엄마가 있게 된다면, 신부님의 육아 지원금 지급은 9월의 절정 행사를 더욱 빛낼 수 있는, 매우 의미 있는 행사 목록이 될 것이다.

과연 9월에 출산을 하는 엄마가 있을 것인지, 있다면 그는 과연 누구일지 절로 큰 궁금증과 기대를 갖게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충남 태안군 태안천주교회 <40년사>에 수록될 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충남 태안군 태안천주교회 <40년사>에 수록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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