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은 고려 말기 지방호족들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40미터가 넘는 절벽에 새겨져 있어 자못 위압적인 느낌을 준다.오창석
대웅전의 부처님은 졸고 있었다. 멀리 인도에서 오신 통통한 그 분은, 보리수나무 아래서 잎새 사이로 잘게 부서져 내리는 햇빛 가루를 맞고 있었다. 거기에 얇은 옷깃을 스치는 산들바람의 속삭임까지 더해지니 밀려오는 졸음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게다. 그 졸음을 거부하려는 듯 관음전과 도솔암의 지장보살님은 머리에 두건을 질끈 동여매고 있었다.
발칙한 연상(聯想)은 도솔산 중턱, 수직의 절벽 위에 새겨진 마애불(磨崖佛)까지 이어졌다. 이 돌부처님 또한 대자대비한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어쩌다 누군가에게 한 대 얻어맞고 분을 삭이지 못한 표정이다. 눈썹은 치켜 올라가고 입은 골이 나서 삐죽 나왔다.
불완전한 인간을 닮고 싶어한 것은 아니었을 텐데도 항상 신은 인간을 닮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다른 경배의 대상들 역시 어떤 절절한 염원을 담아 그렸고 조각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자신들의 모습을 닮고 있었다. 왕조의 명운이 다해가던 고려말, 이곳을 지배하던 호족의 한 무리는 도솔산에 올랐다. 그들은 세상의 힘이 이동하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를 열어 줄 수호신이자 자신들의 얼굴을 바위에 새겼다.
고려가 망하고 수백 년이 더 흐르자 이 곳에는 기이한 전설이 생겨났다. 마애불의 배꼽에 있는 감실(龕室)을 열어 비결(秘訣)을 꺼내면 한양이 망한다는 것이었다. 1820년 이 곳에 부임해 온 전라감사 이서구(李書九)가 석불의 배꼽을 열었다. 비결을 꺼내 한 줄을 읽자 뇌성벽력이 일어 두려움에 도로 넣어 두고 봉했다. 그가 읽은 비결의 첫 줄에는 ‘전라감사 이서구가 열어 본다’고 씌어 있었다.
동학 접주 손화중은 1892년 수하들과 함께 선운사의 스님들을 모조리 꽁꽁 묶어 놓은 다음, 석불의 배꼽을 도끼로 부수고 비결을 꺼내가 버렸다. 그 후 다시 비결은 찾을 수 없었고 대신 백성들의 가슴마다에는 조용히 들불이 번져 갔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동학농민전쟁이 시작되었고 이후 예언대로 한양은 망했다.
세상이 세월을 따라 속절없이 흘러가고 선운사의 뒷산에서는 하염없이 동백이 피고 졌다. 600여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어간 이들을 지켜보며 그들도 같이 목을 떨구었다. 꽃잎도 시들지 않은 채 참수 당하듯 처절하게 송이째 뚝뚝 떨어지는 이 꽃은 4월 말이면 선운사에서 주관하는 ‘동백연(冬柏燕)’과 함께 절정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