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딘,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다

위스콘신주 민주당 예비선거 유세 현장

등록 2004.02.17 18:28수정 2004.02.18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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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리, 위스콘신 예비선거도 압승전망
여론조사 결과 47%... 딘 23% 그쳐

(밀워키<위스콘신주>=연합뉴스)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존 케리(매사추세츠) 상원의원이 17일 밤(한국시간 18일 오전11시) 종료되는 위스콘신주 예비선거에서도 승리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각종 외신들이 보도했다.

존 케리 의원은 16일 밤 로이터와 MSNBC 및 조그비가 공동으로 위스콘신주에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47%의 지지를 얻어 2위 하워드 딘 전 버몬트 주지사(23%)와 3위 존 에드워즈(노스 캐롤라이나) 상원의원(20%)을 압도적 표차로 앞서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까지 실시된 16개주 예비선거.코커스(후보지명 당원대회)중 14개주를 석권한 케리 의원은 특히 500만명의 회원을 가진 19개 노동조합 조직인 `경제정의를 위한 동맹'과 `국제트럭기사 조합' 등의 지지를 얻어냈다.

15일 밤 11시. 혹독하게 추운 날씨로 유명한 위스콘신의 주도(州都) 매디슨. 이 늦은 밤 위스콘신대학교의 중앙도서관 앞 광장에서 서너 명의 학생들이 바닥에 분필로 글씨를 쓰고 있었다. 모자와 목도리로 무장한 금발 여학생의 퍼렇게 언 입가에서 김이 피어오른다.

도서관 정문을 나서던 한 남학생이 그 여학생을 바라보며 외친다. "딘, 화이팅(Go, Dean!)!" 여학생은 고개를 돌려 환하게 웃어 보이며 큰 소리로 화답한다. "좋아요. 딘 화이팅(All right. Go, Dean)!" 그 남학생이 추운 발걸음을 재촉하자, 잠시 웃어 보였던 붉은 낯들은 다시 바닥으로 향한다. 딘을 지지하는 학생들의 열정은 이 추위 속에서도 얼어붙지 않는 듯했다.

게시판을 메운 딘의 선거홍보물
게시판을 메운 딘의 선거홍보물강인규
다음 날 아침, 길가와 게시판에는 온통 하워드 딘을 지지하는 글귀와 스티커, 그리고 포스터로 덮여있었다. 도서관 앞에서 학생들이 피켓을 든 채 홍보물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오늘 오후 5시 반, 오르페움 극장입니다." 딘은 위스콘신주 예비선거를 하루 앞두고 마지막 지지를 호소하기 위해 매디슨에 와 있었다.

예비선거 전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던 딘이 정작 예비선거에서는 단 한 번도 승리를 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은 지지자들보다는 후보 자신이 더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케리가 절대적인 선두를 지켜가고 있는 상황에서 딘은 사퇴 압력에 시달리고 있고, 위스콘신 예비선거를 하루 앞 둔 상황에서 선거대책위원장인 스티븐 그로스먼마저 지지를 철회함으로써 그의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게다가 후보에서 사퇴한 웨슬리 클라크마저 케리를 지지하고 나선 상황이다.

위스콘신의 주도 매디슨
위스콘신의 주도 매디슨강인규
딘은 "위스콘신에서 지면 경선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했다가 최근 다시 입장을 바꾸어 결과에 상관없이 예비선거를 계속해 나가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현 상황에서 위스콘신의 패배는 딘 후보에게 치명타를 안길 것이 분명하다. 비록 딘은 최근에도 여러 차례 후보사퇴를 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지만, 위스콘신의 패배는 그의 사퇴를 불가피하게 만들 것이라는 것이 대다수 정치평론가들의 견해다.

위스콘신주는 딘이 가장 공들여 유세를 해 온 곳으로, 딘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이 모여있는 주 가운데 하나다. 위스콘신주는 "위스콘신 아이디어(Wisconsin Idea)," 즉 '주의 경계가 곧 학교의 경계'라는 모토로 대학의 진보적인 사상과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주 전체에 이식시켜 온 곳으로 유명하다.

딘의 지지자들이 <오마이뉴스>를 위해서 포즈를 취해 주었다.
딘의 지지자들이 <오마이뉴스>를 위해서 포즈를 취해 주었다.강인규
주도인 매디슨(Madison)은 베트남전 당시 미국에서 가장 격렬한 반전운동이 있었던 곳이며, 주의 경제중심지인 밀워키(Milwaukee)는 미국 사상 처음으로 사회당 소속 국회의원 및 시장을 배출한 곳이다. 위스콘신주는 그밖에도 미국 최초로 성차별 금지 및 동성애자 권리를 입법화한 곳이기도 하다.

하워드 딘이 전통적으로 진보적이었던 위스콘신주에 큰 기대를 걸어오고, 또 그가 그곳에서 큰 환영을 받았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가 이라크 전쟁에 보여 온 분명한 반전주의적 태도와 공교육 확대, 동성애자에 대한 동일한 권리 부여, 과세의 분명한 차별화를 통한 빈곤층 보호 등의 정책은 위스콘신주가 지속적으로 추구해 온 가치와도 상통하기 때문이다.


오후 5시 30분. 딘이 마지막 유세를 하기로 되어있는 시내의 극장은 1200명의 지지자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대부분 젊은 사람들로 구성된 지지자들은 구호를 외치면 딘 후보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우리는 딘을 원한다, 우리는 딘을 원한다(We want Dean, We want Dean)!"


연단에 나와 지지자들과 악수하는 하워드 딘
연단에 나와 지지자들과 악수하는 하워드 딘강인규
딘이 오른쪽 입구로부터 걸어나오자, 전국에서 모여든 기자들의 카메라가 터지기 시작했고, 관중들은 한 목소리로 환호했다. 딘은 "우리는 내일 잃어버린 미국을 되찾을 것입니다"라는 말로 연설을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장기간의 유세로 약간 쉰 듯했지만 여전히 활기를 잃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그동안 빼앗겼던 나라를 되찾을 것입니다. 그동안 잃어버렸던 희망과 신뢰의 나라를 말입니다."

"민주당의 어느 후보도 부시보다는 잘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변화를 원한다면, 저를 선택해 주십시오."

강인규
지지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딘은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할 일은 이제까지 부시가 해 놓은 일을 거꾸로 해 놓는 것입니다. 미국은 경제공황 이래로 가난한 사람과 중간계층의 생활수준을 지속적으로 높여가는데 애써왔습니다. 그러나 부시는 세금감면 등을 통해 가진 자들의 이익만을 대변해 왔을 뿐입니다."

"부시가 집권한 후 현재까지 삼백만개 이상의 일자리가 사라졌고, 인종차별 문제가 심화되었으며, 이민자들의 권리가 묵살되었습니다. 내일은 부시에게 우리의 메시지를 전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지지자들은 다시 "우리는 딘을 원한다"라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고, 이 열광은 몇 분간이나 계속되었다. 딘은 이후 국민의료보험과 공교육 확대, 그리고 이민자들과 동성애자들의 권리 보호에 대해서 역설했다.

"선거 때가 되면, 모든 후보들이 말합니다. '당신들이 원하는 것을 내가 해결해 주겠노라'고. 그들은 자신들이 그럴 힘이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그 힘은 그들 손이 아니라 바로 여기 계신 분들 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내일 우리가 할 일은 부시에게 텍사스 고향으로 돌아가는 편도차표를 끊어주는 것입니다."

연설중인 하워드 딘. 위스콘신 예비선거가 고비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연설중인 하워드 딘. 위스콘신 예비선거가 고비가 될 것으로 보인다.강인규
하워드 딘은 지지자들의 열광에 고무된 듯했고, 지지자들의 목소리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지만, 사실 딘의 전망은 그리 밝지 못하다. 지난 11일 발표된 현지여론조사를 보면 케리가 딘을 큰 표 차로 앞서가고 있기 때문이다.

웨슬리 클라크가 사퇴하기에 앞서 발표된 이 조사에 따르면 케리는 45%의 지지를 받는 것으로 밝혀진 데 반해 딘의 지지율은 12%에 머물러 있다.

"어떻게든 부시를 이겨야 한다(Anybody but Bush)"는 유권자들의 강박이 안전 위주의 투표행위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위스콘신대학교의 진보성향 학생신문인 <데일리 카디널>마저 케리의 지지를 공표하고 나선 상태다.

그러나 13%의 지지를 받던 클라크가 사퇴하고 17%가 아직 지지후보를 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딘의 기적적인 회생이 아예 불가능한 상태는 아니다. 만일 그가 위스콘신 예비선거에서 이기는 이변이 일어난다면, 딘은 이후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다.

그 '이변'을 믿는 젊은 지지자들은 이 밤에도 여전히 길가에 서서 분필로 글을 쓰고 컴퓨터 앞에 앉아 이메일 전송키를 누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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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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