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섬이 되고 찻길은 뱃길 되어

뱃길로 찾아간 청평사

등록 2004.02.24 01:29수정 2004.02.25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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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호수를 넘지 못해 섬이 되고 찻길은 호수 밑에 잠겨 뱃길로 변해 버린 춘천(春川). 이제 춘호(春湖)라는 이름이 어울릴 법도 한데, 애써 애환은 호수 속에 감추고 구석구석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 그 중 제일은 호수와 산으로 둘러 쌓여 포근하게 자리잡은 청평사가 아닌가 싶다.

찻길은 뱃길 되어
찻길은 뱃길 되어김정봉

청평사는 언제나 청춘남녀가 북적여 생기가 넘친다. 우리 나라에서 방문객의 평균 연령이 제일 낮은 절이 아마 이 절이 아닐까 생각된다. 귀 따가운 고성능 스피커의 진동 대신 청춘남녀의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이 있고, 찢어질 듯한 마이크 소리 대신 젊은 남녀의 웃음소리가 있다.


청평사 전경. 두 그루의 소나무가 일주문을 대신하고 있다
청평사 전경. 두 그루의 소나무가 일주문을 대신하고 있다김정봉

청평사를 찾아가는 여정은 쏠쏠한 재미가 있다. 우선 소양강댐 밑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댐 위로 올라가는 것부터 시작된다. 버스에 무리 지어 탄 젊은이들은 연방 웃음을 터트리기도 하고 아득히 내려다보이는 광경을 보고 탄성을 지른다. 우리 나라에도 이런 곳이 있었나 감탄하며 그랜드캐니언에 견주어 이야기하기도 한다.

버스에서 내려 소양호 쪽을 보면 장마 때 TV에 자주 등장하는 '한국수자원공사 소양강다목적댐' 글귀가 반갑게 맞아 준다. 멀리 선착장엔 배들이 어깨를 모으며 대기하고 있다.

청평사는 배를 타고 1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갑판 옆에는 젊은이들이 카메라폰으로 호수와 산의 풍경을 담고 있다. 난 건너편 갑판 옆에서 그들을 담고 있고 내 옆에 초로의 아주머니는 그런 나를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다.

새로운 풍속도다
새로운 풍속도다김정봉

배 뒤편 호수와 산은 멀어질수록 잔잔해지고 배 꽁무니에서 이는 물살은 더욱 세진다. 호수에 허리를 잘려 나간 산이 뿌리를 드러낼 즈음 배는 청평사 선착장에 다다르게 된다.

산은 섬이 되고
산은 섬이 되고김정봉

배에서 내려 20여분 걸어야 청평사에 닿을 수 있는데 그 길이 전혀 지겹지 않다. 멀리 잔설로 희끗희끗한 오봉산을 보기도 하고 가까이 바위 틈에 박혀 있는 벌통, 누군가 정성 들여 쌓아 놓은 돌탑과 뽀송뽀송 솜털이 돋아난 버들 강아지를 보다 보면 어느새 오봉산 계곡에 닿게 된다.


오봉산 계곡을 거슬러 올라 거북 형상을 한 거북바위와 아홉 가지 소리가 난다는 구성폭포를 만나고 계곡 언덕 위의 공주탑과 고려 정원의 흔적인 영지를 보면 쉴 틈도 없이 청평사 입구에 이른다.

볼 것이 많고 할 얘기가 많은 청평사, 무슨 얘기부터 꺼낼까?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눈 여겨 볼 만한 게 석축이다. 절 입구의 선동교를 건너자마자 막돌로 쌓은 석축을 보게 되는데 불국사의 정교한 석단이나 부석사의 장엄한 석단 같이 눈에 쉽게 들어오지 않지만 다듬지도 않은 크고 작은 돌을 길 높이를 타고 쌓아 올린 모양이 제법 예쁘게 보인다.


청평사 초입의 석축
청평사 초입의 석축김정봉

선동교 앞에 있는 석축과는 달리 회전문과 대웅전 석단은 잘 다듬어진 장대석을 쌓아 올렸는데 예전 청평사의 모습이나 규모를 짐작케 한다. 청평사의 건물은 회전문을 제외하면 한국전쟁 때 모두 소실되고 석단만 예전 것 그대로여서 더욱 애착이 간다.

석단과 함께 갈 때마다 보고 또 보는 것이 대웅전 계단의 소맷돌이다. 불국사 대웅전의 소맷돌이 정갈한 여인의 버선코를 연상시키고 상쾌한 맛이 있다면 이 소맷돌은 일에 쫓겨 반쯤 접어 올린 아낙의 소매를 보는 것 같고 질박한 멋이 있다.

대웅전 석단과 소맷돌
대웅전 석단과 소맷돌김정봉

이 소맷돌이 더욱 정겹게 다가오는 것은 그 옆에 새로 올린 전각의 계단도 이 소맷돌을 그대로 흉내내어 재현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새로 만든 것은 손끝 시린 정성이 담긴 옛 것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보다 세련되고 정교한 다른 소맷돌을 버리고 바로 옆에 있는 소맷돌을 재현했으니 애정이 여기에 미칠 수밖에 없다.

'아는 만큼 보인다.' 이제 이 말은 너무나 유명한 말이 되어버렸는데, 그래도 이 말이 제일 실감나는 곳은 청평사 영지(影池)가 아닌가 싶다. 계곡을 따라 걷다보면 대수롭지 않은 연못으로 여기고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인데 밝혀진 것 중에 가장 오래된 고려 정원의 한 흔적이란 사실을 알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고려정원의 흔적인 영지
고려정원의 흔적인 영지김정봉

주위의 석축도 눈에 들어오고 그 모양이 사다리꼴이어서 카메라로 한번에 담기 어렵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옆의 계곡 물을 끌어들여 오봉산을 비치게 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멀리 오봉산을 쳐다보게 된다. 연못 안의 커다란 돌 세 개가 삼산의 봉우리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알면 연못 안의 돌도 달리 보인다.

그럴 듯한 폭포가 있고 천년 역사의 절에 전설이 깃든 탑이 없을 리 없다. 오봉산 계곡을 따라 10여분 오르면 거북바위가 있고 조금 더 오르면 7m 높이에서 떨어지는 아홉 가지 소리를 낸다는 구성폭포가 있다. 이 구성폭포 오른 쪽 언덕을 보면 삼층석탑이 있는데 전망이 빼어나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삼층석탑(공주탑)
삼층석탑(공주탑)김정봉

이 탑은 일명 공주탑이라 하는데 탑에 얽힌 전설이 있다. 당나라 평양공주에게 사랑하는 청년이 있었는데 당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죽고 만다. 청년은 상사뱀이 되어 평양공주의 몸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뱀을 떼 내기 위해 공주는 여러 절을 찾아다닌 끝에 이 청평사에까지 오게 되었다. 공주가 가사불사(袈裟佛事) 법회에 참석하는 동안 잠시 공주의 몸에서 떨어져 있던 상사뱀은 기다리다 못해 공주를 찾아 나섰다가 갑작스런 폭우에 죽고 만다. 공주는 뱀의 시신을 거두어 정성껏 묻어 주고 구성폭포 위에 삼층석탑을 세웠다고 한다.

청평사의 하이라이트는 소나무 두 그루 밑에서 오봉산을 훑어내려 청평사를 보는 것이다. 계단 밑에서는 늘씬하게 뻗은 소나무 두 그루와 그 나무사이로 보이는 오봉산이 멋지게 들어온다. 한 계단 오르면 회전문, 대웅전 지붕이 오봉산에 맞닿아 보이고 조금 더 오르면 회전문과 그 옆의 회랑, 그리고 멀리 문틈 사이로 대웅전까지 청평사 전경이 들어온다.

청평사의 하이라이트
청평사의 하이라이트김정봉

청평사 건물은 한국전쟁 때 회전문을 제외하고는 모두 소실되어 근래에 새로 지은 것이다. 재작년에 왔을 때에는 회전문 옆 회랑과 대웅전 주위에 전각이 없었으나 이제 전각들이 꽉 들어차 한편으로는 답답한 느낌마저 든다.

회전문은 빙글빙글 도는 문일 줄 알고 모두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궁금해 한다. 회전문은 말과 달리 빙글빙글 도는 문은 아니고 윤회사상이 담겨 있는 문으로 의미로만 회전문이다. 앞서 말한 상사뱀이 공주를 찾아 나섰다가 쏟아지는 소나기에 밀려 이 문을 통해 돌아 나갔다 하여 회전문으로 불린다고도 전해진다.

집에 돌아갈 시간은 다가오고
집에 돌아갈 시간은 다가오고김정봉

극락보전 위에서 청평사를 내려보자니 벌써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다. 이제 마지막 배를 타러 가야할 시간이다. 저 멀리 소양호 선착장에선 뱃고동을 울리며 마지막 배임을 알리고 있다.

청춘남녀로 가득한 배에는 뱃고동은 그치고 청춘의 심장 고동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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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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