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봄날 농사일 준비를 한다. 리어카를 고친다.전희식
그에게서 편지가 또 왔다. 두 번째 편지다.
그제 마당에서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글씨를 곱게 만년필로 쓴 그의 편지가 왔는데 나는 겉봉투에 쓰인 이름을 보지 않고도 그 사람인 것을 알았다. 집배원에게서 편지봉투를 받아 들면서 직감적으로 그 사람이 떠올랐다. 봉투를 받아 든 감촉만으로 그를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가 보냈던 첫 번째 편지의 특별한 감촉이 여태 내 손끝에 살아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편지를 들고 일하던 자리로 가 곁에 놔둔 채 하던 일을 계속하였다. 여러 해 동안 사용하면서 이제는 낡고 부스러진 리어카 깔판을 바꾸는 일이었다. 톱으로 베니어판을 자르면서도 그가 생각났다. 곁에 있으면 나무판을 맞잡아 주면서 얘기를 나눌 텐데 싶었다. 밑판을 바꾸다보니 곁 판도 부실하여 갈아 끼기로 했다. 리어카를 엎어놓고 철사로 동여매기도 하고 홈통을 대고 뒷막이 판을 새로 만들어 댔다.
그의 억센 남도 사투리가 들리는 듯했다. 짧은 머리 짧은 말투 굵은 얼굴 선. 그와의 만남이 짧았기에 모든 인상이 다 살아났다.
나는 편지를 뜯었다.
역시 이번 편지도 주유권이 들어 있었다. 빳빳한 주유권의 감촉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14장의 주유권을 돌돌 말아 싼 편지지에는 꼭 세 줄의 글이 있었다. ‘농주님이 여기저기 많은 곳 쫓아다니는 데에 필요할 것 같아’ 보낸다는 글이었다.
FTA 시위다, 부안 주민투표 참관인이다 쫒아다니면서 기름값으로 보태라는 것이었다. 새 지폐처럼 깔깔한 14장의 주유권을 한 장 한 장 세어 보면서 너무도 짧게, 단 한 번 보았던 그 사람이 수수께끼처럼 떠올랐다.
버스도 안 타고 걸어 다녔던 사람.
<오마이뉴스>에서 내 귀농일기를 발견하고 며칠에 걸쳐 처음부터 끝까지 죄다 읽고는 나를 만나러 열흘인가 보름인가를 걸어서 우리 집까지 온 사람. 전남 여수에서 우리 집까지 그 먼 길을 배낭하나 달랑 메고 걸어서 왔던 사람이 이렇게 또 주유권을 보내 온 것이다.
두어 달 전 편지에서도 주유권을 14장인지 9장인지를 넣어 보냈다. 그분의 첫 인상처럼 보내오는 주유권의 매수도 꽉 차지 않고 살짝 모자라는 숫자다. 그를 닮았다. 채워지지 않은 주유권의 매수는 어떤 의미일까?
잘못 세었을까 싶어 두 번 세 번 세어보는 ‘반듯한’ 내 습관을 나무라듯 주유권은 14장이었다. 주유권 매수에 담고자 했던 메시지가 뭘까 하다가 나는 픽 웃었다. 그 사람 성격상 기념으로 한 장을 자기가 빼 썼을지도 모르겠다 싶어서였다. 내 기억 속 그는 그런 사람이다. 사연을 묻어 둔 채 빈 웃음으로 떠나 간 사람이었다.
나는 이번에도 주유권 14장 중 10장을 벌써 다른 사람과 나눠 쓰고 있다. 내 주변에 서울과 대구와 안산과 남원으로 종횡무진 공무에 분주한 사람에게 열 장을 주었다. 지난번 주유권도 다섯 장은 아는 후배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렇게 하는 데는 내가 그분의 남다른 생각과 행동을 은연중에 널리 퍼뜨리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