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나진-선봉지역에서 ' 장로님' 으로 통하는 신종현(사진 오른쪽에서 네번째)씨가 1999년 6월 빵공장을 설립하고 가진 시식회에서 '만나빵'을 앞에 놓고 기념촬영을 하고있다.
신씨는 1997년 9월 선교 목적으로 4명의 동료들과 밀가루 80톤을 싣고 북한 나진에 들어갔다가 북한의 비참한 현실을 보고 빵공장을 설립할 결심을 하게 됐다.
처음 신씨는 알음알음으로 휴스턴 지역의 미국 기독교 연합회에 도움을 구했는데, 뜻밖에도 쉽게 좋은 답변을 얻어냈다. 미국 기독교 연합회에서 빵 기계 등 재료 일속을 도와 주겠다고 약속한 것. 이에 신씨는 즉시 북한에 들어가 나진시 당국과 계약을 체결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북에서 돌아온 지 사흘만에 기독교 연합회 측은 당초 약속을 전면 취소하고 말았다. 북한으로 선적하기 불과 열흘전이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계약을 하고 기뻐하던 나진시 당국자들의 얼굴과 북한의 어린이들이 떠올랐다. 특히 나진시 당국자들은 처음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신씨의 '불순한' 의도를 알고 빵공장 계획을 거부했으나, 신씨가 '순수하게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빵공장을 설립하겠다'고 설득해 겨우 마음을 돌려 논 터였다.
이때 신씨는 새로운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네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음성을 듣게 된 그는 다른 친구 한 명과 은행 융자를 얻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인 교회들을 돌며 모금, 3만2000불에 해당하는 빵기계를 구입해 1999년 초 나진항을 향해 선적시켰다.
곧이어 신씨는 주변의 동료 6명과 함께 만나선교회를 조직했고, 그 해 6월 13일 빵공장을 설립해 하루 3000개씩 빵을 생산, 나진시 유치원 어린이들에게 공급했다.
빵공장을 설립했다고 해서 매일 빵을 공급하는 일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빵 제조 기술자가 필요했다. 수소문 끝에 어렵사리 3명의 빵 제조 기술자를 구했는데, 신씨는 여기서 감동스런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유명한 '왕여사 이야기'다.
3명의 빵 제조 기술자 중 남편이 중국 공산당원인 중국인 왕 여사는 나진 빵공장에 들어가 1년만 일하기로 계약했다. 그러나 그녀는 놀랍게도 계속 남아서 무보수로 일하겠다고 선언했다. 북쪽의 비참한 현실을 본 그녀는 중국 본토에 있는 남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아서 봉사하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이다.
그녀의 남편은 빵공장에 빼앗긴 부인과 부인을 끌어들인 신씨를 원망하며 술로 날을 지새웠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를 깊게 사랑했던 남편은 차츰 신씨와 그녀의 고결한 뜻을 이해하게 됐고, 결국 "신씨가 믿는 하나님이라면 나도 믿겠다"라며 부인과 함께 세례까지 받았다고 한다.
신씨의 가족들은 처음, "그만큼 고생했으면 은퇴 생활을 즐겨야지 웬 생뚱맞은 짓이냐"고 핀잔을 주며 반대했다고 한다. 한때 휴스턴 지역에 미용 재료상을 5개나 갖고 있으면서 '돈을 갈퀴로 긁어 담아도 될 만큼' 수입이 좋았지만, 그마저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신씨는 현재 집 한 채가 달랑 남아 있는데, 이마저도 지난해 15만불에 저당잡혀 나진에 진료소를 건설하는데 투입했다.
지난해 <코리아 위클리> 주최 우리민족서로돕기 모금 골프대회 참관차 플로리다에 온 신씨는 "옛날 엄청난 돈이 벌릴 때는 큰 호수에 물이 거의 차서 넘실대고 있는 느낌으로 살았는데, 지금은 (집 한채 밖에 없지만) 물이 넘쳐나서 콸콸 흘러 내리는 느낌으로 살고 있다"고 기쁨에 찬 고백했다. 그는 또 "이 일을 시작한 이후로 가슴이 항상 뜨겁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신씨가 초기에 6명의 동료들과 함께 시작한 빵공장은 규모가 커져 2001년 2월부터는 하루 1만2000개의 빵을 생산해 나진-선봉 지역 유치원과 고아원에 무료로 공급하고 있다. 이를 돕는 단체들도 현재 60여개 교회 단체로 늘어났다. 신씨는 나진-선봉지역에서 북한 사람들에게 '장로님'으로 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