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끄러 나오싯쇼" 밤 9시 마을방송

건조한 봄날이면 불 끄러 가는 게 일이었다

등록 2004.02.26 11:40수정 2004.02.26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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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두렁 태우다 산으로 옮겨 붙어 죽을 뻔한 아저씨


"거시기 아부지, 선들양반이 혼쭐이 났다 그럽디다."
"뭔 일 있었댜? 아직 벌 나올라면 한참 멀었을 것인디…."
"그게 아니고라, 웃골 밭 가상 태우다 불냈다요. 갹꼬(그래가지고) 죽을 뻔했다 급디다."
"아따, 그 양반도 이렇게 마른 날씨에 허지 말라고 그렇게 이장이 아침 저녁으로 방송을 해대싸도 기운도 없으면서 왜 그런당가? 그건 그렇고, 살았당게 다행이구먼."
"산 몰랭이로 타들어가는 바람에 혼자 끄다가 산으로 옮겨 붙었다요. 마침 동네 청년들이 고기 잡아 방촌에서 내려오다 간신히 불길이 잡힌 모양이요."
"애들도 각별히 신경을 쓰라고. 성냥 잘 보관허고. 큰 탈 난 당게."
"알았어라우."


설이 지나고 비 한번 오지 않던 건조한 날씨가 두달째 이어졌다. 농사라는 게 한가할 때 퇴비를 밭에 내다 부리고 밭 언덕까지 말끔히 정리해야 다음 일이 수월해지니 정월대보름이 지나면 나무하러 산으로 가던 발길은 차마 멀리 떠나질 못하는 시기다.

다수확 품종으로 쓰러지지 않을 씨나락(볍씨)도 준비해야 하고 호박에 오이, 율무, 수수, 옥수수, 고구마, 감자, 토란, 목화, 콩, 팥에 봄보리 심을 씨앗을 점검하여 성에 차지 않으면 이웃 동네나 멀리 장에 가서 팔아와야(농촌에서는 사는 걸 판다고 하고 파는 걸 산다고 했다) 한다.

오이, 호박, 팥 같은 넝쿨진 작물은 밭 가운데다 심기는 아까운 것이라 이때 해충도 없애고 땅도 넓히는 효과를 기대하며 밭둑을 태우는 건 위장 전술에 불과했다. 농지가 부족한 산간 지역인 백아산 근처에서는 화전을 일구기 위한 방편이었던 속내가 숨겨져 있었다.

특히 음력 2월이 되면 본격 영농철이 시작되는데 그래도 기운이 빠지지 않는 오전은 구루마(달구지)나 지게로 퇴비를 나르거나 논밭을 애벌 갈아엎어 풀을 먼저 잡는 게 순서다 보니 해질녘 건조해져야 밭가에 불을 붙인다. 여기에 오전엔 늦서리가 깨지 않아 위에만 부르르 타고 말기 때문에 손대 없는 농민 처지에서는 하루 중 불 놓기 좋은 때는 여러모로 오후 다섯 시가 넘어서다.


하지만 어디 그게 사람 맘 같던가. 자연의 거대한 힘에 짓눌리고 마는 게 인간사거늘 쉬운 길 찾고 욕심부리다 보면 화가 되어 돌아온다는 걸 망각하기 일쑤다. 기침이나 해소도 잠잠하다가 해질 무렵이 되면 되살아나듯 바람도 거세져서 삼킬 듯 통제불능 상태가 되고 만다.

기운도 떨어질 대로 떨어져 몇 걸음 옮길 힘마저 소진된 상태에서 솔가지 하나 꺾어 들고 불을 지르면 삽시간에 주위를 태우고 노인들을 휘감아 넘어뜨려 죽음에 이르게도 하고 급기야 산으로 옮겨 붙어 겉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려 살면 그만이고 살아도 된통 당하는 게 봄 날 오후의 불이다.


다음날 지서(현재의 파출소)에 불려가 갖은 수모를 겪으며 각서 쓰고 벌금까지 물고 나오면 그만이지만 혹자는 팔자에 없는 징역살이를 면키 어렵다. 그런 일은 사흘이 멀다하고 일어났던지라 누구누구 집에 국한되지 않았다.

야밤 마을 방송에서 울려나오는 말, "불났어요."

논두렁 화재 사건 당일의 밤이었다. 서울에서 전화왔다는 소리 빼곤 웬만해선 마을 방송을 하지 않던 산골짜기 마을에 마이크 소리가 "지지직" "찌지직" 온 동네를 흔들어 깨운 시각은 밤 9시가 넘어선 시각이었다.

"아아, 이장입니다. 쩌기 방촌 뒷산에 불났응께 한집마다 한명씩 불끄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오늘 안 나오면 울력할 때 두 분이 나와야 합니다."
"애애앵~"
"다시 한번 말씀 드릴랍니다. 방촌 꼴짜기 뒷산에 큰불이 났다요. 낫과 삽, 괭이, 톱을 지참허시고 얼른 회관 앞으로 나와 주싰쇼."


방송은 세번이나 반복되었다. 엄포를 놓지 않으면 이 시각에 몇 사람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아는 터라 동네가 떠나갈 듯 몇번이고 방송을 해대는 것이다.

중학생 이상만 나갈 수 있었지만 나는 부모님 몰래 중학생인 형을 따라 나서기로 했다. 밤 기운이 싸늘했다. "통! 통! 통!" "타다다닥" 경운기 소리가 적막한 동네를 깨웠다. 회관 앞엔 눈을 비비며 벌써 열댓명이 나와 다들 한마디씩 한다.

"성님, 나오셨소?"
"응, 자네도 나왔는가."
"별수 있겄소. 딸년들밖에 없응께 나와 봐야제."
"지미…. 이 야심한 시간에 뭔 불이여!"
"누가 아니랩니까. 개새끼들이 잠 안 자고 뭔 짓거리여."
"여기서 본께 곡성 쪽이구만…. 왜 우리 화순이 난리여 시방. 째까만 따라갔다가 돌아와 버리자고. 얼굴만 찍었으면 됐제.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여. 낼 헐 일도 태산 같은디…."
"고로코롬 허잔께요."


선발대로 출발할 사람들이 모이자 청년회장이 일일이 점검을 하고 인솔하여 마을을 떠난다.

"자, 어서 타자고!"
"느그들은 뛰어와라."


화순과 곡성 경계 지역이라 불은 걷잡을 수 없어

왜 그 시각에 인적이 없는 그 곳에 불이 났는지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경계 지역일수록 불은 더 크게 번져 나중엔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그건 최초 발화 지점이 어디인지를 놓고 남의 불 보듯 쳐다보며 서로 미루다가 더 키워서는 늑장 대처하는 게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불은 이미 커질 대로 커졌다. 바람이 화순 북면 쪽으로 불어오는지 결국은 화순군 관할 구역에서 불이 난 걸로 판명이 나자 부리나케 서둘렀지만 벌써 사람들이 도착했을 무렵에는 3ha(약 9천평) 이상을 태워 세를 확산해 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방촌마을 골짜기까지 가는 밤길은 신작로로 2km나 되었으니 족히 30분 거리였고 길도 없는 산길을 플래시도 없이 불빛만 보고 오르기가 또 1시간여 소요됐다. 불을 끄기도 전에 다들 지칠 대로 지쳐 버렸다.

울창하게 꽉 찬 소나무 밭 '약대굴' 근처까지 가기는 대낮에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가까이 가보니 송진 냄새가 확 풍겨왔다. 산꼭대기라 바람도 거셌다.

""다 왔는갑네."
"자…다들 모여 봐."
"이렇게 큰불은 웬만해선 안 잡힌께 면적을 넓게 잡고 꺼야혀. 오늘은 솔가지로는 끌 수 없을 것이여. 일단 낫과 톱으로 멀리 주변을 울타리 치듯 베고 삽과 꽹이로 흙을 파서 골을 만들라고. 호 파는 것이나 마찬가지여. 글고 바람 부는 방향을 피해 멀리 돌아서 접근하더라고. 알겄는가?"
"알겠어라우."
"혼자서 다니지 말고 두셋이서 같이 움직이도록…."
"예."


낫, 톱, 갈퀴, 괭이, 삽을 총동원하여 길을 만들고

낫으로 소나무 잎이 많이 붙은 솔가지를 툭 잘라 베어 꿰차고 흩어져서 작업에 들어갔다. 열기가 몰려오고 불꽃이 곳곳으로 튀었다. 폭이 1m쯤 되게 낫과 톱으로 나무를 자르고 갈퀴로 검불을 걷고 괭이 삽으로 헉헉거리며 속살이 드러나도록 길게 판다.

잠이나 잘 일이지 괜히 왔나 싶었다. 주변에서 물을 찾아도 없다. 누가 그 급한 상황에서 물이나 챙길 것인가. 밥 먹은 지 한참이나 지난 시각이라 허기마저 몰려왔다. 주변에 아직 녹지 않은 푸석푸석 까만 먼지가 가득한 눈을 물 삼아 씹어 간신히 목이 타는 건 막았다.

"성, 나 힘들어서 못하겠어."
"긍께 누가 따라 오라디. 한 삐작(쪽)에 가서 쉬었다가 해라."


1시간 넘게 사람들은 불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고 주변을 정리하는 일에 몰두했다. 바람을 타고 거세게 퍼지던 불길도 서서히 잡혀가고 독 안에 든 쥐처럼 차차 좁혀져 갔다.

"이쪽으로 모두 모잇쇼."

마지막 남은 불길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포위해야 한다. 5ha(약 1만5천평) 이상을 태우고 200여평에 갇힌 불길은 바람이 잦아들자 힘을 잃고 바닥을 기어 재기를 노리고 있는 듯했다.

"야, 솔가지 한나씩 들어라."

연신 앞뒤 가리지 않고 불 위에 대고 마구 치고, 때리고, 덮는 격전이 벌어졌다. 무겁던 솔잎 가지도 가볍게 느껴지던 그 때였다. 바람이 휘익 한번 불더니 와락 불길이 치솟아 내 눈썹과 머리털을 태우는 게 아닌가. 마지막 발악을 치곤 심술이 보통이 아니다.

"헉헉."

목이 타는 듯한 절박한 상황이었다.

"야, 얼렁 빠져나와."

옆에 있던 아저씨 한분의 소리가 들려오고 후다닥 내 주변을 두들겨 끄자 소강 상태로 접어 들었다.

눈썹과 머리도 태우고 얼굴과 목덜미 화끈거렸지만

"너무 뽀짝 들어간께 이런 거 아니냐. 조심해야제."

화끈거리는 얼굴과 목덜미 타는 목구멍. 그렇게 불이 무서운 줄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느껴보았다. 한참을 넋을 놓고 주저앉아 있었다.

거의 불을 잡아나가는 시점에 군청에서 지원 세력이 빵과 음료수를 들고 몰려왔다. 속으로 '씨벌놈들 뭐할라고 이제사 나타나는 것이여'라는 소리가 맴돌았다.

20여분 재발화를 지켜보다가 아래로 내려와 보니 군수님도 화순읍에서 가장 먼 50여km 비포장 도로를 2시간 가까이 달려 도착해 있었다. 유달리 산불이 많이 났던 그 시절 임명직 군수는 산불 하나로 모가지가 달아나는 판국이었으니 그도 그럴 법하다.

난 그날 죽을 뻔했다는 소리를 입밖에 내지 못했다. 냇가에 세수를 열댓번 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정신을 찾았지만 화끈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집에 돌아와 벽시계를 쳐다보니 새벽 2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효과를 떠나서 나이 젊고 늙음을 떠나 논두렁 밭둑에 불 대는 일을 삼갑시다. 특히 어르신들은 조심하셔야 합니다. 고향에 전화 한통이라도 합시다. 또한 요즘은 휴대 전화가 있으니 여행 중 화재가 발생하면 바로 신고하여 우리의 소중한 재산 피해를 최소화합시다.

덧붙이는 글 효과를 떠나서 나이 젊고 늙음을 떠나 논두렁 밭둑에 불 대는 일을 삼갑시다. 특히 어르신들은 조심하셔야 합니다. 고향에 전화 한통이라도 합시다. 또한 요즘은 휴대 전화가 있으니 여행 중 화재가 발생하면 바로 신고하여 우리의 소중한 재산 피해를 최소화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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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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