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요리 반세기' 화교 장씨 가족 이야기

50돌 맞은 중국집 ‘영발원(永發園)’

등록 2004.03.01 18:20수정 2004.03.02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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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월 24일 음식점 영업이 끝나고 한가한 저녁 무렵 장씨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영발원의 주인 장경발씨(가운데), 부인 유용숙씨(왼쪽) 그리고 장씨의 어머니 황오녀씨.

2월 24일 음식점 영업이 끝나고 한가한 저녁 무렵 장씨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영발원의 주인 장경발씨(가운데), 부인 유용숙씨(왼쪽) 그리고 장씨의 어머니 황오녀씨. ⓒ 정상필


지난해 12월 중순 광주시 북구 임동에 새로운 인테리어로 재개장을 한 중국집이 있다. 재개장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50년 전부터 이 동네를 지키고 있는 이 곳은 ‘영발원’이라는 중국 음식점.


해방 전 인천항을 통해 한국에 왔다 여행을 하거나 친구들을 찾아 지내는 사이 전쟁이 나는 바람에 뱃길이 끊겨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고 장덕충(2001년 작고)씨가 광주에 터를 잡은 건 1953년경이다.

광주에서 한국인 아내 황오녀(71세)씨를 만나 결혼을 하고 돈벌이를 위해 시작한 것이 ‘영발원’이고 이듬해 첫 자식을 낳은 게 1956년, 올해로써 50년째를 맞는 영발원의 태동이다. 지금의 주인인 장씨의 큰아들 경발(49)씨는 아버지를 이렇게 회고했다.

“큰아들인 저에게 이 가게를 맡아야 한다는 말씀을 한 적은 없어요.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도록 하신 게 아닌가 생각돼요. 저 또한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하나의 업으로 생각했으니까요”

경발씨는 고등학교를 마친 후 영발원에서 본격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학교를 다니면서 일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배달에서부터 어깨너머로 배우는 요리까지. 그가 왠지 모르게 끌렸던 그 업을 착실히 준비했던 것이다.

중국인의 피를 받아서인지 업에 대한 받아들임도 수월했고, 어린 동생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의무도 내칠 수 없는 하나의 이유였다. 경발씨 밑으로 3명의 여동생과 한 명의 남동생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고등교육을 받고 현재 전문직에서 일하고 있다.


경발씨가 동생들에게 또 하나의 부모 노릇을 하는데 있어 부인 유용숙(35)씨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간호사이던 유씨가 경발씨를 만난 건 광주YMCA 봉사활동에서였다. 유씨는 남편의 성실함과 건전한 사고방식에 매료됐다고 말했다.

당시 화교와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고, 경발씨에게도 한국인과 결혼하는 것은 넓지 않은 화교 사회에서 ‘뉴스’로 인식되던 시절이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돌이켜보면 훌륭한 선택이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았다.


“화교들 사이에도 빈익빈 부익부 비슷한 현상이 있었어요. 넉넉지 못했던 저에게 중매가 들어오는 화교 처녀들은 하나같이 제 맘에 들지 않았고, 차라리 한국인과 결혼해서 남들에게 보란 듯이 잘 살아보리라 맘을 먹었죠.”

아버지 장씨의 뜻을 이어 영발원을 50년이나 지속할 수 있었던 건 뭐니뭐니해도 경발씨의 성실함이었다. 또 외유를 즐기던 장씨와는 달리 내성적인 경발씨의 성격도 한몫했다. 좁은 주방에서 30년을 일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피를 속일 수는 없는걸까. 그렇게 조금은 아버지와 다른 성격을 가진 경발씨지만 영발원의 ‘영원한 발전’에 대한 그의 바람은 은연중에 진행되고 있었다. 경발씨의 두 아들 중 첫째 아들인 보원(21)씨가 한국조리과학고를 졸업하고 서울 역삼동의 중국 음식점 주방에서 일하고 있는 것.

영발원은 이미 ‘롱런’을 위한 준비를 하는 듯이 보인다. 일요일은 누가 뭐래도 쉬는 날이고, 평일도 영업시간을 정해놓고 그 외의 시간은 손님을 받지 않는다. 운동경기에서 체력안배를 위해 선수들이 호흡조절을 하듯 경발씨도 나름의 호흡법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화교로 한국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흔히들 중국사람들 중 부자가 많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죠. 외국에 사는 한국인들이 악착같이 돈을 버는 것하고 다를 게 뭐가 있겠습니까.”

‘장기화된 경기침체’, ‘청년실업’ 등이 관용어구처럼 신문지상을 장식하는 요즘 장씨 가족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너무나 간단명료하다. 경발씨가 ‘98년 IMF’를 화교라는 이유로 수월하게 보냈을리 없고, 제2의 경제대란으로 불리는 지금 영발원만 손님이 많을리 없다.

한국인 특유의 ‘빨리빨리’ 근성이 세계에서 유래없는 최단기간 경제대국으로 가는데 지팡이 역할을 해냈을지 모르나 우리는 지금 그 근성을 재고해야하는 시점에 와 있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인한 폐해를 -정치에서, 교육에서, 경제에서 그리고 사회 전반에 걸쳐- 몸소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쉬어가자는 얘기는 더더욱 아니다. 민주화도 경제대국도 아직 가야할 길이 멀기에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빨리빨리’ 근성이 아니라 장씨 가족에서 보여지는 ‘무던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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