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의 화신 덕숭낭자 버선꽃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41)-덕숭산 수덕사

등록 2004.03.02 08:19수정 2004.03.02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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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성법칙'이란 게 있다. 중학교 물상 시간에 배운 것으로 뉴튼의 제1법칙이다. 선생님은 달리던 차가 갑자기 멈추거나 정지하면 앞뒤로 쏠림이 생겨 서있던 사람들이 넘어지려 하는 현상을 가지고 관성법칙을 설명했다.

a 일주문 좌측으로 고암 이응노 화백이 살았던 초가의 <수덕여관>이 있다. 여관 앞에 있는 커다란 너럭바위에서 화백은 구상을 잡고 캔버스를 펼쳐 그림을 그렸을 듯하다.

일주문 좌측으로 고암 이응노 화백이 살았던 초가의 <수덕여관>이 있다. 여관 앞에 있는 커다란 너럭바위에서 화백은 구상을 잡고 캔버스를 펼쳐 그림을 그렸을 듯하다. ⓒ 임윤수

중학교 때 관성법칙은 단지 문제를 풀기 위해 외워야 하는 많은 공식 중 하나며 기껏해야 물리 현상에나 적용되는 자연 법칙 중 하나인 줄 알았다. 그러나 살다 보니 관성법칙은 단순한 공식도, 자연계에만 작용되는 그런 법칙이 아니다.


살다보면 가끔 '머리 따로, 가슴 따로'를 경험하게 된다. 사랑하던 연인과의 헤어짐에서 그 현상은 뚜렷하다. 이성적 지배를 받는 머리로는 분명 정리되어 더 이상 만나서도 안 되고 생각해서는 안 될 사람이다. 그러나 감성의 바다인 가슴에선 연인에 대한 연민과 그리움이 점점 더 큰 풍랑을 만들어 낸다. 이게 바로 감성의 관성 탓이다.

어디 그 뿐이야. 권력의 속성을 맛 본 사람은 권력의 관성에 지배받고 돈의 달콤함을 맛본 사람은 돈의 관성을 극복하지 못해 파경의 길을 가게 된다. 이런 저런 관성의 풍랑이 결국 번민과 갈등이 되고 삶을 살아가는 데 장애물도 되고 고통이 되기도 한다.

'불혹'이라 일컫는 40의 나이는 '모든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음에 이르렀다'는 뜻이 아니고 유혹되지 않을 게 없음을 나타낸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굴렁쇠처럼 서서히 구르던 오욕칠정이 관성의 탄력을 받아 멈추기 힘든 고비의 절정기가 아닌가 모르겠다.

a 수덕사는 비구니절이 아니며 2천 수백여 조계종 사찰 중 다섯 총림 중 하나인 덕숭총림이 있다.

수덕사는 비구니절이 아니며 2천 수백여 조계종 사찰 중 다섯 총림 중 하나인 덕숭총림이 있다. ⓒ 임윤수

유아기 때는 엄마의 젖무덤과 달콤한 사탕만이 유혹이었다. 사춘기 땐 이성의 도톰한 입술과 감미로운 목소리가 유혹으로 다가오더니 청장년이 되니 진로와 이성을 소유하고 싶은 뜨거움이 유혹으로 밀려왔다. 사회로 진출하며 출세욕과 명예욕이 본성을 드러낸다.

40대의 나이가 되니 이런저런 유혹들이 얼키설키 흔들림으로 다가온다. 불혹의 나이라는 40대는 미혹을 떨굴 만큼 성숙한 나이가 아니라 흔들림과 갈등의 나이다. 잠자는 아가의 작은 숨결에도 흔들릴 만큼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사춘기 때라면 무시해도 좋을 만큼 하찮은 설렘에도 열병을 앓는 그런 나이가 40대 아닌가 모르겠다. 그런 흔들림과 갈등을 잠재우고 달래기 위해 오늘도 관성적으로 산사를 찾는다.


오래 전 송춘희라는 가수가 불렀던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 때문인지 수덕사를 비구니(여승) 절로 생각하는 사람이 꽤나 많은 듯하다. 그러나 수덕사에는 국내 최초의 비구니 선방인 견성암과 환희대가 산내 암자로 있을 뿐 비구니(여승) 절은 아니다. 현재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계시는 법장 스님이 총무원장으로 피선되기 전까지는 바로 수덕사의 주지 스님이셨다.

수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로 5대 총림(叢林) 중 한 곳이다. 총림이란 범어 'vindhyavana(빈타파나)'의 번역으로 승속(僧俗)이 화합하여 한 곳에 머무름이 마치 수목이 우거진 숲과 같다 하여 이렇게 부른다고 한다.


a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에 이은 3번째 고건축물인 대웅전은 건물 자체가 국보다. 오래 담아온 세월만큼이나 대웅전은 묵직해 보인다.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에 이은 3번째 고건축물인 대웅전은 건물 자체가 국보다. 오래 담아온 세월만큼이나 대웅전은 묵직해 보인다. ⓒ 임윤수

현재 우리 나라 2천 수백여 조계종 사찰 중 총림으로 지정된 곳은 수덕사의 덕숭총림, 해인사 가야총림, 통도사 영축총림, 송광사 조계총림, 백양사 고불총림 5곳뿐이다.

총림이 되기 위해서는 승려들의 참선 수행 전문 도량인 선원과 경전 교육 기관인 강원, 그리고 계율 전문 교육기관인 율원 및 염불 교육 기관인 염불원을 갖추어야 하며 총림의 어른이신 방장 스님이 계셔야 한다.

수덕사를 찾아가는 길은 그렇게 험한 산을 넘지도 않고 커다란 강을 건너지도 않는다. 온천으로 유명한 온양과 덕산을 지나 야트막한 고개를 가로지르는 지방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그 곳에 덕숭산이 있고 덕숭산 품안에 수덕사가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여행지 기분을 물씬 나게 하는 상가 골목을 지나 15분쯤 들어가면 일주문에 도달하게 된다. 일주문 옆에는 초가로 된 수덕여관이 있다. 수덕여관은 고암 이응노(1904∼1989) 화백이 살았던 곳이다. 여관 앞에는 커다란 너럭바위가 있다. 화백은 이 바위에서 구상을 잡고 캔버스를 펼쳐 그림을 그렸을 듯 하다.

a 대웅전을 이루고 있는 기둥에선 세월이 깊이가 느껴진다. 국보라는 감투의 무게를 빼더라도 기둥의 터진 자국에 저절로 손을 모으게 하는 그런 묵직함이 담겨져 있다.

대웅전을 이루고 있는 기둥에선 세월이 깊이가 느껴진다. 국보라는 감투의 무게를 빼더라도 기둥의 터진 자국에 저절로 손을 모으게 하는 그런 묵직함이 담겨져 있다. ⓒ 임윤수

일주문을 들어서 이런 저런 문들과 전각을 지나게 되면 대웅전 마당에 서게 된다. 수덕사 대웅전은 봉정사의 극락전, 부석사의 무량수전에 이은 세번째 최고령 고건축물로 건물 자체가 국보 49호다.

오래 담아온 세월만큼이나 대웅전은 묵직해 보인다. 국보라는 감투의 무게를 빼더라도 세월이 느껴지는 기둥의 터진 자국에 저절로 손을 모으게 하는 그런 묵직함이 묻어나는 맞배지붕 주심포계 고건축물이다.

교구 본사의 커다란 사찰들 대부분이 그렇듯 수덕사도 몇몇의 산내 암자가 있다. 일주문을 들어서 바로 왼쪽으로 비구니승 도량인 환희대가 있고 원통보전이 있다. 경내를 지나 팻말을 따르면 견성암을 비롯한 암자들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덕숭산 정상 쪽으로 산길을 오르면 정혜사가 있다. 정혜사는 평소 일반인의 출입이 허락되지 않는 국내 몇몇 선원 중의 한 곳이다.

대개의 고찰들이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전설이나 설화 하나쯤 가지고 있듯 수덕사에도 가슴을 여리게 만드는 설화가 있다. 절뿐만 아니라 절이 들어선 덕숭산이 연인으로 등장하는 애틋한 설화다. 설화의 귀착점이 되는 곳은 대웅전 서측 백련당 뒤쪽에 있는 관음바위다.

옛날 이곳엔 수덕이라는 도령이 살고 있었으며 사냥을 즐겨했다고 한다. 비록 늙었지만 몰이를 잘하는 할아범과 몇몇 머슴들을 데리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날도 도령은 사냥을 나가게 되었다.

시중 들던 할아범이 노루를 발견하곤 도령에게 활시위를 당기라고 채근하니 귀를 쫑긋 세운 노루 한마리가 숲 저쪽에서 다가왔다. 도령은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고 화살을 막 쏘려다 엷은 눈웃음을 흘리더니 말없이 활을 거두었다.

몰이를 하느라 진땀을 뺀 하인들은 활을 당기기만 하면 노루를 잡을 판이기에 못내 섭섭해 하기도 했지만 도련님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이 이해되지 않아 어찌된 일인지를 물었다.

a 대웅전 앞에는 마당이 계단 형태로 되어 있다. 위쪽 마당 가운데는 3층석탑이 있고 아래 마당 가운데는 코끼리 석등 있다. 코끼리 석등 동쪽에는 법고각, 서쪽에는 범종각이 있으며 마당 어디서고 탁 트인 전망이 마음을 후련하게 해준다.

대웅전 앞에는 마당이 계단 형태로 되어 있다. 위쪽 마당 가운데는 3층석탑이 있고 아래 마당 가운데는 코끼리 석등 있다. 코끼리 석등 동쪽에는 법고각, 서쪽에는 범종각이 있으며 마당 어디서고 탁 트인 전망이 마음을 후련하게 해준다. ⓒ 임윤수

그러자 도령이 노루가 있는 곳을 가리키며 '너희들 눈에는 노루만 보이느냐? 그 옆에 사람은 보이지 않느냐?'고 반문을 했다. 그때서야 노루 옆에 서있는 처녀를 보게 된 하인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노루 옆에는 정말 아름다운 처자가 서있었다.

하인들 중 한명이 "도련님,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습니다. 노루 대신 여인이라도… "하며 말끝을 흐렸다. 도령은 "에끼 이 녀석, 무슨 말버릇이 그리 방자하냐. 자 어서들 돌아가자"하고 야단을 치며 양반의 체통을 지키려 걸음을 재촉했지만 뛰는 가슴을 어쩔 수는 없었다.

노루 사냥이 절정에 달했을 때 홀연히 나타난 여인! 어쩜 천생연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수덕 도령의 가슴은 더더욱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도령의 마음엔 온통 아가씨의 환상뿐이다.

눈길에서 멀어져 가는 여인을 뒤로 하고 집에 돌아왔으나 들떠 있는 수덕의 가슴은 진정되지 안았다. 책을 펼쳐도 글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눈에 어리는 것은 여인의 아리따운 모습뿐이었다. 여인 대한 그리움은 열병처럼 도령을 엄습해 버렸다. 그러기를 며칠, 하는 수 없이 수덕 도령은 할아범을 시켜 그 여인의 행방을 알아오도록 했다.

a 대웅전 서측 백련당 뒤쪽에는 관음상이 모셔져 있고 관음상 뒤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이 바위가 설화에 나오는 관음바위다.

대웅전 서측 백련당 뒤쪽에는 관음상이 모셔져 있고 관음상 뒤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이 바위가 설화에 나오는 관음바위다. ⓒ 임윤수

할아범이 알아 온 바에 의하면 그녀는 바로 건넛마을에 혼자 사는 덕숭 낭자였다. 아름답고 덕스러울 뿐 아니라 예의범절과 문장이 출중하여 마을 젊은이들이 줄지어 혼담을 건네고 있으나 어인 일인지 모두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덕의 가슴엔 불이 붙었다. 자연 글 읽기에 소홀하게 된 수덕은 훈장의 눈을 피해 매일 낭자의 집 주위를 서성댔다. 그러나 먼 빛으로 스치는 모습만을 바라볼 뿐 낭자를 만날 길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열병 같은 짝사랑에 가슴을 태우던 수덕 도령은 용기를 내어 낭자의 집을 찾았다.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며 도령은 덕숭 낭자에게 진지하게 청혼을 했다. 만약 청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죽음으로라도 그 뜻을 풀어야 한다는 굳은 의지를 밝혔지만 낭자는 아직 혼인할 나이도 아닐 뿐더러 고아와 같은 미천한 처지라며 완강하게 청혼을 거절했다.

수덕 도령의 마음은 점점 더 낭자에게 빠져들었고 조급해졌다. 앉으나 서나 온통 낭자의 환상에 잡히게 되어 정말 더 이상은 참을 수 없게 되어 몰골이 된 모습으로 다시 낭자를 찾아 혼인해 줄 것을 애절하게 간청했다.

a 설화에 나오는 관음바위에 피어난 꽃이다. 이 꽃이 정확하게 버선꽃인지는 모르지만 순백의 꽃잎에서 낭자의 아리따움을 연상하게 된다(2003. 6. 12)

설화에 나오는 관음바위에 피어난 꽃이다. 이 꽃이 정확하게 버선꽃인지는 모르지만 순백의 꽃잎에서 낭자의 아리따움을 연상하게 된다(2003. 6. 12) ⓒ 임윤수

수덕의 간청을 듣고 있던 낭자는 두 볼을 붉히며 한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낭자가 가지고 있는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면 청혼을 받아 주겠다는 말이었다. 낭자의 소망은 다름 아닌, 일찍이 비명에 돌아가신 어버이의 고혼(孤魂)을 위로하도록 집 근처에 큰 절을 하나 세워 달라는 것이었다.

도령은 낭자의 부탁을 쾌히 들어주겠다 약속하고 곧바로 불사에 착수한다. 마음이 바쁜 수덕 도령은 부모님의 반대와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도 상관치 않고 오직 불사에만 전념했다. 터를 가다듬고 기둥을 세웠다. 서까래를 올리고 벽을 쌓으며 기와를 구웠다. 불철주야로 불사에 혼신을 다하니 이윽고 한달만에 절이 완성됐다.

불사를 끝낸 수덕 도령은 한걸음에 낭자의 집으로 달려갔다. 들뜬 마음에 낭자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막 단청이 끝낸 절을 구경하러 가자고 하니 낭자는 구경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고 한다. 한번도 절 짓는 곳을 다녀간 적이 없는 낭자가 불사된 절을 본 듯 말하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 할아범이 헐레벌떡 뛰어와 혼신을 다해 세운 절이 불길에 휩싸여 폭삭 주저앉았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 동안의 공덕이 수포로 돌아가는 듯한 절망감과 하루라도 빨리 낭자를 품에 안고 싶은 열망에 찬물이 끼얹어지는 순간이기에 수덕 도령은 좌절하며 부처님을 원망했다.

a 덕숭산 정상으로 오르다 보면 '소림초당'이란 편액이 붙어있는 초가가 나온다. 산길을 오르다 커다란 바위에 틀어 앉은 초가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업이 한 꺼풀은 벗겨진다.

덕숭산 정상으로 오르다 보면 '소림초당'이란 편액이 붙어있는 초가가 나온다. 산길을 오르다 커다란 바위에 틀어 앉은 초가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업이 한 꺼풀은 벗겨진다. ⓒ 임윤수

그러자 옆에 있던 낭자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속삭이듯, "한 여인을 탐하는 마음을 버리고 오직 일념으로 부처님을 염하면서 절을 다시 지으면 된다"고 위로했다. 수덕 도령은 결심을 새롭게 하고 다시 불사를 시작했다. 매일 저녁 목욕재계하면서 기도를 했으나 이따금씩 덕숭 낭자의 얼굴이 떠오름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마다 일손을 멈추고 마음을 가다듬어 수행하듯 절을 완성할 무렵 또다시 불이 나고 말았다. 수덕 도령의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지만 낭자에 대한 도령의 사랑과 애틋함은 불사의 손길을 멈추지 않게 하였다.

또 다시 한달의 시간이 지나 드디어 신비롭기 그지없는 웅장한 대웅전이 완성되었다. 그 동안의 우여곡절이 주마등처럼 기억에 지나가니 도령은 자신도 모르게 두 손 모아 합장하고 "관세음보살"을 연송했다.

수덕은 흡족한 마음으로 뛰다시피 덕숭 낭자를 찾아 절이 완공되었음을 알린다. 이번에도 낭자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던 듯 도령을 반갑게 맞이하며, 소녀의 소원을 풀어주셔서 그 은혜 백골난망이며 정성을 다해 모시겠다 약속을 했다.

며칠이 지나 마침내 신방이 꾸며졌다. 오직 하나, 덕숭 낭자를 맞아들이기 위해 주위의 비난과 조롱쯤 아랑곳하지 않고 오랫동안 일념의 시간을 보내 온 도령에게 있어 신방은 꿈이었으며 뜨거운 피를 식힐 수 있는 유일한 도원이었다.

a 소림초당을 지나 더 올라가면 만공탑이 나온다. 둥그런 지구의 형태인 탑에서 뭔가를 느껴질 듯하다.

소림초당을 지나 더 올라가면 만공탑이 나온다. 둥그런 지구의 형태인 탑에서 뭔가를 느껴질 듯하다. ⓒ 임윤수

들뜸과 설렘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둘 만이 남게되었을 때 촛불 은은한 가운데 낭자가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말문을 열었다. "부부간이지만 잠자리만은 따로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이게 무슨 날벼락같은 말인가. 부부의 연을 맺었으면 잠자리를 함께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렇게 하는 것만이 도령의 뜨거움을 식힐 수 있는 길인데 잠자리를 따로 하자니….

도령의 가슴은 너무도 뜨거웠고 그 뜨거움을 주체할 수 없었기에 낭자의 애절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수덕은 낭자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런 순간 뇌성벽력과 함께 돌풍이 일며 낭자의 모습은 섬광처럼 문밖으로 사라졌고 수덕 도령의 두 손엔 버선 한짝만이 남겨져 있었다.

은밀하게 차려졌던 신방도, 연지곤지를 찍고 아름답기만 했던 덕숭 낭자도 순식간에 세속의 탐욕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정신을 차린 도령이 손에 든 버선을 들여다보는 순간 신방에 있던 큼직한 바위와 그 바위 틈새에서 낭자가 신었던 버선과 흡사한 하얀 꽃이 피어 있는 이변이 일어났다.

그때서야 수덕 도령은 덕숭 낭자가 관음의 화신임을 알게되었다. 이렇게 깨달음을 얻은 도령은 낭자와의 애틋한 사랑을 기리기 위하여 절 이름을 '수덕사'라 부르고 수덕사가 자리잡고 있는 산을 덕숭산이라 했다고 한다.

자신은 비록 덕숭 낭자의 품에 안기지 못했으나 자신이 불심으로 일군 절이라도 덕숭 낭자의 품에 안기고 싶어 절을 품고 있을 산의 이름을 덕숭산이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a 정혜사 경내에 있는 석탑이다. 선원에서 갇힌 듯 수행 생활을 하는 많은 선승들에 깨우침을 향한 염원과 기도의 애환이 깃들여 있을 듯 하다.

정혜사 경내에 있는 석탑이다. 선원에서 갇힌 듯 수행 생활을 하는 많은 선승들에 깨우침을 향한 염원과 기도의 애환이 깃들여 있을 듯 하다. ⓒ 임윤수

지금도 수덕사 인근 바위틈에서는 해마다 '버선꽃'이 피며 이 꽃은 관음의 버선이라 전해 오고 있다하니 기회 되면 관음이 화신한 덕숭 낭자를 닮았다는 버선꽃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흔들리는 마음과 갈등을 잠재우기 위해 절을 찾았건만 설화 속 덕숭 낭자와 수덕 도령의 이루지 못한 애틋한 사랑이 다시 마음을 흔들어 댄다. 역시 40대 나이는 어느 것에도 흔들리는, 미혹되지 않을 게 없는 부불혹(否不惑)의 나약하고 위험한 나이인가 보다. 이제야 알겠다. 세월의 관성만큼 분명한 관성은 그 어디에도 없음을.

덧붙이는 글 | 수덕사 찾아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천안 I.C → 21번 국도 → 예산 → 45번 국도 → 덕산면 → 622번 지방도 → 수덕사

덧붙이는 글 수덕사 찾아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천안 I.C → 21번 국도 → 예산 → 45번 국도 → 덕산면 → 622번 지방도 → 수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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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좋아하는 거 다 좋아하는 두 딸 아빠. 살아 가는 날 만큼 살아 갈 날이 줄어든다는 것 정도는 자각하고 있는 사람.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是'란 말을 자주 중얼 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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