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독립운동가 후손의 '인생화보'-②

'진천부대 비장패 두령' 의 유일한 후손 백도선씨의 기구한 인생역정

등록 2004.03.02 16:54수정 2004.03.02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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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디에이고에서 탈영병 되다

'탈영병'이 되어 버린 백도선은 당시로서는 거액이던 3백불을 며칠만에 다 써버렸다. 영어를 못해 최고급 호텔에서 룸서비스를 받아가며 생활한 결과였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백도선은 무작정 버스를 타고 시내를 돌았다. 그러다 어느 버스칸에서 동양여자를 만났는데 일본 여자였다. 결국 그 여자의 친절한 안내로 직업소개소를 찾았고 직업소개소에서는 이틀을 기다리면 일거리가 있으니 기다리라고 했다.

백도선은 그 유명한 금문교가 바라다 보이는 공원 벤치에서 이틀동안 새우잠을 자고 지정된 시간에 새벽같이 일어나 직업소개소 앞으로 갔다. 곧 트럭 한대가 오더니 백도선을 비롯한 몇사람의 노동자를 싣고 한 참을 달리더니 짐을 부리듯 내려놓은 곳은 화훼 농장이었다.

노동 첫날, 시간당 50센트, 하루 4불의 임금을 받았는데, 당장 잘 곳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일이 끝난 다음 서성거리고 있는 백도선에게 십장이 무슨 볼일이 있냐는 듯 물어 왔다. 노 하우스! 십장이 손짓으로 따라오라고 했다. 그러더니 보일러 창고 뒷켠에 있는 빈방으로 안내했다. 보일러 지기가 살던 방이었다. 제법 깨끗해 보이는 침대에 시트도 있었고 화장실은 물론 샤워시설까지 갖추어진 훌륭한 방이었다.

1주일간 개밥을 먹다

들어온 지 일주일 되던 날 영어가 가장 큰 문제였던 백도선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 함께 일하던 친구가 백도선이 침식을 해결하고 있는 방에 놀러 왔다. 여기 저기 나 뒹구는 빈 깡통을 보곤 친구가 "너 개 키우느냐" 고 물었다. 백이 고개를 저으며 노!라고 대답하자 친구가 "오 마이 갓! 저건 개가 먹는 깡통음식이야!" 라며 소리를 질렀다. 백도선은 일주일 동안이나 개밥을 먹고 살았던 것이다.

미국에서 개가 깡통밥을 먹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데다 당시 개밥 깡통에는 지금처럼 개그림이 없었으니 백도선이 그런 야만적인 실수를 할 수밖에.


예기치 않게 삶의 공간이 바뀌어 어벙벙했지만 백도선은 너무도 고맙고 감사했다. 한국 해군 생활에서 익힌 대로 새벽 6시에 일어나 화훼농장 화장실 청소부터 시작해서 사장이 쓰는 지저분한 사무실을 매일 깨끗이 청소해 놓았다. 놋으로 만들어진 재떨이를 반짝 반짝 빛이 나게 닦아 놓기도 했다. 그러기를 며칠 백도선을 눈여겨 본 사장이 백도선이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자초지종을 묻더니 그날 저녁으로 자신이 보증을 서 야간학교에 입학시켰다. 백도선은 9개월간 그 학교에 다니며 영어를 익혔다.

사장은 이후 가끔 백도선을 자기 집으로 초대해 저녁을 대접했다. 어느날 저녁 식사 중에 "너는 매우 스마트한데 지금 너의 형편으로는 군대에 가면 훨씬 나은 생활을 하게 될 것" 이라며 미군에 지원 입대할 것을 권유했다. 백도선은 앉은 자리에서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그렇게 하겠다" 고 대답했다. 이 때 사장이 백도선에게 신문에 난 광고문을 보여 주었는데 미 육군에서 한국어 통역관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미 육군에 입대

백도선은 다음날 모병소에 가서 신체검사와 함께 응시원서를 내 합격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3월 미군이 되어 한국전에 재배속된다. 1948년 4월 대한민국 해군 제복을 입고 군대생활을 시작한 백도선이 한국전쟁 중에 신호 특기자로 뽑혀 배를 인수하러 미국에 갔다가 뜻하지 않게 탈영병이 되었고 이번에는 미 육군 제복을 입고 한국전에 참전하게 된 것이다.

백도선씨는 "아마도 세계전쟁사상 한 전쟁에서 한 군인이 완전히 바뀐 국적으로 한번은 해군, 다른 한번은 육군으로 참전한 예는 없을 것" 이라고 말했다.

백씨의 기구한 삶의 여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직 한국에는 자신이 돌보아야 할 부모 형제들이 시퍼렇게 살아 있었고 전혀 예기치도 바라지도 않았던 미국인으로 살기에는 된장 냄새가 너무 깊게 박혀 있었다. 특히 존경받던 독립군의 후손이 떳떳하지 않게 탈영병의 불명예를 안고 살아 간다는 것도 늘 께름직했다.

전쟁이 끝나고 이승만 정권이 썩을대로 썩어 말기 증상을 보이던 1959년 초. 백씨는 미 육군으로 제대하기 2주 전에 회현동에 있던 해군본부를 찾아 갔다. 참모총장에게 자신이 어쩔 수없이 탈영병이 될 수밖에 없었던 자초지정을 설명하고 선처를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놀랍게도 참모총장은 자신이 탈영병이 될 당시 대령 계급으로 함장이었던 이용훈 장군이었다. 괘씸하다는 표정으로 한참 설명을 듣던 참모총장이 법무감을 불러 탈영병에 대한 처리를 지시했다. 그러나 법무감은 "우리 해양 경비법에 미 육군 하사를 처벌할 법은 없다"면서 탈영병 오명을 벗고 싶으면, 미군에서 제대하고 오라고 일렀다.

한국 군사재판서 사형선고 받다

백씨는 미 육군에서 제대한 후 즉시 한국 해군에 자신의 탈영사실에 관한 재심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군사재판 사상 초유의 이 재판을 지켜 보기 위해 재판 당일 법정은 방청객들로 꽉 들어 찼다. 백씨는 이 날 한국전 당시 샌디에이고에서 벌어졌던 모든 상황을 다시 설명했고 자신이 미군이 되어 많은 훈장을 받은 것과 다시 한국전에 참여하게 된 것을 들어 선처를 호소했다. 그러나 이 날 군사재판에서 백씨는 법대로 사형선고를 받았고 즉시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사형수로 감방생활을 하는 중 당시 육군 법무관이던 백씨의 이종사촌형의 귀띔으로 자신이 곧 석방될 것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정치 상황으로 정권이 뒤바뀌면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3개월이 되던 어느날 저녁 이종 사촌형이 형무소 감방에 찾아와 백씨를 불러냈다.

백씨는 "당시의 정치 상황에서는 가능한 일이었다"면서 "아마도 재판 전부터 사전에 어느 정도 협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자유의 몸이 된 백씨는 다시 먹고 살 일이 걱정이었다. 그때까지 자기 한 몸은 건사 할 수 있었으나 아직도 서울에 가족이 살고 있었고 때는 보릿고개로 굶어죽는 것이 예삿일이던 시절이었다.

백씨는 미 8군에 군속으로 다시 취직해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백씨는 1973년 미국으로 다시 이주해서 텍사스와 뉴욕에서 잠시 살다가 플로리다 중부 스타크라는 농촌도시에 둥지를 틀고 20여년을 살았다.

"이젠 고국에 돌아가 살고 싶다"

한때는 100에이커의 땅을 빌려 각종 채소를 심어 팔기도 했으나 크게 재미를 보지 못한 채 지난해 은퇴한 백씨는 한국정부에 대해 할 말이 많다.

"최근에 친일파 후손들이 자기땅을 찾겠다며 날뛰는 것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오고 손이 떨릴 지경"이라며 "한국정부는 도대체 무엇을 하는 집단이냐"고 거칠게 불만을 토로했다. 백씨는 그동안 수차례 고국을 드나들며 국가보훈처 등 정부 요로에 해외에 살고 있는 독립 유공자 후손들에 대한 정당한 예우와 경제 도움을 요청했는데 그때마다 '당신 아버지는 독립지사로 이미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고 당신은 미국에서 잘먹고 잘 살 텐데 웬 불만이냐'며 핀잔을 받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나마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해외독립유공자예우법안이 통과돼 지난해 5월부터 월 8백불 정도의 생계보조금이 지급되기 시작해 백씨는 크게 감사해하고 있다. 백씨는 해외에 90여명 정도의 독립운동가의 직계 후손이 살고 있다고 전했다.

어렸을 적부터 배를 곯는 생활을 수없이 경험해 온 백씨는 현재 한국 정치인들의 부정부패에 대해서 몹시 비분강개해 했다.

"한국전 당시인가 국민방위군 사건 때 사병들이 먹어야 될 양식을 빼돌렸던 사람들이 사형당한 일 있잖습니까. 남에는 결식아동들이 아직 많고, 북에서는 배곯아 죽는 사람들이 아직 많은데 국민의 돈을 빼돌려 자기 배를 채운 사람들을 가만 놔둘 수 있는 겁니까? 중국사람들, 아랍 사람들 이런 것 깨끗하게 잘 처리하는 데 우리는 왜 못하는 겁니까. '역적법'이라도 만들어서 이들을 다스려야 되는 것 아닙니까?"

70을 넘긴 백씨는 이제 한국에 영구 귀국해 살고 싶어한다. 가장 큰 이유는 최근 몇년간 거칠고 텃세가 강한 남부 백인 '레드넥' 들에게 당한 수모 때문이다. 초기 정착과정에서 백씨는 미국인들에게 많은 은혜를 입었지만 최근 한국인 하나 없는 동네에서 백인 레드넥 지주들과 살면서 이민 생활에 뒤늦은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평상시 잘 알고 지내던 미국인 지주가 어느날 갑자기 부당하게 렌트비를 올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래도 참을 만했다. 수해나 냉해 때문에 작물에 피해를 입어 보상을 신청할라치면 지주가 달려 와서는 "내 땅에 농사를 지었으니 나와 반반씩 나눠먹자"고 억지를 쓰는데 백씨는 질려 버렸다.

거부하면 변호사를 동원해서 소송을 제기해 법정에 불려다녀야 하는 통에 결국 지주가 해달라는 대로 거의 다 들어주어야 했다. 독립군 후손이 여기까지 와서 지주의 횡포를 견디며 수모를 당하며 산다는 생각에 서글퍼지기 시작했고 건강도 옛날 같지 않아 백씨는 지난해 완전히 농삿일에서 손을 떼고 은퇴했다.

백씨가 영구 귀국해 살고 싶어 하는 이유는 또 있다. 못 살아도 좋으니 선친이 그렇게도 사랑하던 고국에서 '명예롭게' 살고 싶다는 것.

"제때 배우지도 못했지요,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것도 없지요, 더구나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고 누가 인정해 주지도 않지요, 무슨 맛으로 말년을 이 미국땅에서 살아갑니까. 그래도 한국에서 독립 유공자 자녀라고 3·1절이나 8·15 때 초청받기도 하면서 우리말 하며 살아 가는 것이 훨씬 낳지 않겠어요? 북에 두고 온 막내동생도 찾아 나서야겠고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미국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발행되는 주간지 코리아 위클리(한국주간) 3월 4일치에도 실립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미국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발행되는 주간지 코리아 위클리(한국주간) 3월 4일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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