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독립운동가 후손의 '인생화보'

'진천부대 비장패 두령' 의 유일한 후손 백도선씨의 기구한 인생역정

등록 2004.03.02 12:34수정 2004.03.02 18:46
0
원고료로 응원
얼마 전 모 언론사가 민족문제연구소의 조사자료를 통해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속설이 사실임을 객관적으로 입증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친일관리들의 전면적인 재등용, 반민특위법 제정의 무산 등 해방후 이승만 정권이 첫단추를 잘못 꿴 결과로 친일분자들은 호의호식하며 영화를 누린 반면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해방된 지 58년이 지나도록 지지리도 못 배우고 못 먹고 살아온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 조사의 결론이었다.

3·1절 85주년을 맞아 미주지역 곳곳에서도 기념행사가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플로리다 한 구석진 시골에서 가슴에 응어리를 품은 채 여생을 살아가고 있는 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있다. 일제 강점하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운 '진천부대 비장패 두령' 백기환 지사의 아들 백도선(71)씨다.

백도선씨의 부친 백기환 지사는 1883년 평남 평양시 신흥리에서 백낙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백낙흥은 갑오경장 당시 평양군 총사령으로 청국군 사령관 이진 장군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맞서 싸워 패배하기는 했으나 그쪽에서는 모두 알아주던 신화적 인물.

아버지는 '진천부대 비장패 두령'

기독교 신자였던 백기환은 일찌기 평양 숭실학교 2학년을 수료하고 캐나다로 유학하여 대학에서 3년동안 건축학을 공부한 후 귀국해 함경도 일대에서 선교사 및 건축기술자로 일했다. 그는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후 만주로 건너가서 김좌진 장군이 교장으로 있던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했다.

졸업후 백씨는 자신의 호를 따서 무장독립투쟁부대인 '진천부대'를 창설한다. 백기환은 진천부대를 이끌고 압록강 건너 초산 경찰서를 습격하여 서장 등 일경들을 살해하고 바람과 같이 사라져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며 일대의 조선인들에게 아버지에 이어 또하나의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그 지역 일본 헌병들과 경찰들은 '진천부대 비장패'라 하면 무척 행동이 빠르고 전술이 뛰어나 오금을 펴지 못할 정도로 무서워 했다고 한다. 백씨는 여러 동지들과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한편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하여 독립신문을 전국에 배포하는 등 독립사상을 고취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결국 백씨는 평양경찰서와 평남도청 폭파 계획을 세우다 일제 밀정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백기환 지사의 부인 강해숙씨 또한 비장패 두목의 아내 답게 독립정신이 투철했다. 재판이 벌어지던 날 강씨는 법정 앞마당에 있는 자갈 두 개를 치마폭에 몰래 싸가지고 들어간다. 그녀는 재판을 지켜보고 있다가 재판관이 백 지사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하자 "조선 사람이 조선 나라를 되찾으려고 하는 게 뭐가 잘못된 거냐"고 고함을 치며 자갈을 던져 판사에게 상처를 입혀 법정 모독죄로 2년형을 받았다.


당시 11세이던 백도선의 '고난의 행군'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엄동설한에 졸지에 소년 가장이 된 백도선은 동생들을 돌보며 어머니가 담가놓은 김치로 한달 반을 견디며 살았다. 일경의 감시가 심했던 터라 친척도 동네 사람도 백씨의 집에 얼씬거리지 못했다. 다행히 굶어죽기 직전에 어머니가 가석방되었다.

백도선은 소학교 4학년 때 4번이나 퇴학을 맞아야 했던 일화를 갖고 있다. 일본인 선생이 통신표에 부모 도장을 찍어 오라고 했는데, 성씨 개명을 하지 않은 데다 '백기환' 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도장을 찍어서 가져간 덕분이었다. 백도선은 아버지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늘 집 주변을 경찰이 감시하는 속에 불안한 나날을 살아야 했다.

'진천부대 비장패 두령' 백기환 지사의 유일한 후손 백도선(71) 씨가 3월 1일(미국시간) 오후 7시 플로리다 잭슨빌에서 벌어진 3·1절 기념행사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있다.
'진천부대 비장패 두령' 백기환 지사의 유일한 후손 백도선(71) 씨가 3월 1일(미국시간) 오후 7시 플로리다 잭슨빌에서 벌어진 3·1절 기념행사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있다.김명곤
감시를 피해 어머니와 함께 평양에서 100리 떨어진 삼릉으로 이사해 살던 백도선이 해방을 맞은 것은 13세 때였다. 해방된 조국은 백도선 가족의 찌들린 삶에도 당장 '해방'을 안겨다 주었다. 북에 들어와 권력을 잡은 김일성은 백도선의 아버지에게 '혁명가' 라는 칭호를 붙여주며 건설상 자리를 줄테니 함께 일하자고 했다.

대우는 황송할 만큼 융숭했다. 아침 저녁으로 승용차를 보내 혁명가 백기환을 출퇴근시켰다. 쌀은 물론 갖가지 먹을 것 입을 것과 집도 제공되었다. 어린 백도선은 어리 둥절하기만 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쫓기던 생활만 해 오던 아버지가 요샛말로 '뜨는' 생활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아버지는 '미국의 스파이' 라며 잡혀 갔다.

어느날 남쪽에서 김구 선생이 밀사를 보냈는데 그 밀사는 명주천에 김구 선생의 '어서 내려 오라' 는 밀서를 써 갖고 왔다. 기독교인으로 공산주의 사상이 체질에 맞지 않았던 백기환은 즉시 명주천에 밀서를 써서 '가겠다' 며 내려 보냈다. 그런데 38선을 건너다 그 밀사가 그만 붙잡히고 만 것이다. 백기환은 즉시 체포돼 평양 형무소에 수감됐으나 김일성의 배려로 3개월만에 석방되었다.

별을 보며 남으로 향하다

풀려나서 조심스레 상황을 지켜보던 아버지는 어느날 저녁식사를 마치고 백도선을 마당으로 불러 냈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너 저기 별 보이냐"고 물어보시더니 "내일 저 별만 보고 당장 이남으로 내려 가라"고 백도선에게 명령했다. 백도선의 나이 14세 때였다.

사고무친으로 서울에 온 백도선은 '피난민 고아'나 다름없었다. 백도선은 거리를 전전하다 빈민들이 모여 살던 왕십리에 단칸방을 겨우 마련했고, 얼마 후 아버지가 네 식구를 이끌고 남녘으로 내려 왔다. 가족들은 그나마 여섯 살배기 막내 동생을 어딘가에 놓쳐버리고 왔다.

후에 북에 살다 남하한 어느 분을 만나 여섯 살배기 그 동생이 홀로 집에 돌아와 있더라는 얘기를 듣고 백도선의 가족은 가슴을 쳤지만 때는 너무 늦었다. 이후로 아버지 백기환 지사는 혼란한 해방 정국에서 김구 선생을 도와 새나라 건설에 앞장섰으나 김구 선생이 암살당하자 정치판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비좁은 단칸방에서 다섯 식구가 비벼 살며 하루 하루를 견디는 중에도 백도선은 공부를 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백도선은 따로 떨어져 나와 신당동에 문칸방을 얻어 배명중학교에 보결로 입학해 향학열을 불태운다. 이때 백도선은 광교 조흥은행 옆에서 구두닦이를 하며 자신의 학비는 물론 가족의 생계까지 담당해야 했다.

'고구마 세 알' 싸들고 해군 입대

그러던 어느날 회현동 해군본부 앞을 지나는데 게시판에 '해군모집' 광고가 눈에 들어 왔다. 당시 16세이던 백도선은 '밥 걱정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나이를 17세로 속여 응모해 무난히 합격했다. 며칠 후 백도선은 어머니가 '가다가 요기하라'며 싸주신 따뜻한 기운이 식지 않은 고구마 세 개를 기차에서 풀어 먹으며 진해로 향했다. 백도선은 이 '고구마 세 알'의 모정을 평생 잊지 못하고 살았다고 한다.

백도선은 해군에 입대해 '신호병' 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해군 인사본부에서 '발광 신호나 수기 신호 '최고수' 하면 백도선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군대에서 별난 특기로 인정을 받게 된 백도선은 신이 났다. 밥 걱정 잠 걱정 해결에 모두 인정해 주는 특기 사병이 되었으니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백도선은 이 신호 특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뒤바뀌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백도선이 해군에 입대한 지 1년 3개월만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종종 일본에 가서 배를 인수하는 일에 신호병으로 파견되던 어느 날, 백도선은 3개월 훈련일정과 함께 이번에는 미국 샌디에이고로 파견된다. 샌디에이고에서 3개월 훈련이 끝나고 귀로에 오르기 하루 전날 백도선은 약간 풀어진 기분으로 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 농장을 운영하며 살고 있던 이모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샌디에이고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고 버스에 몸을 실은 것이 잘못이었다. 2,3시간 거리인줄로만 알고 출발한 백도선은 한참을 달리고서야 자신의 무모함을 깨달았다. 다시 되돌아 가기에 버스는 너무도 멀리 달려 와 있었고, 하루 반나절을 걸려 다음날 아침 6시에 샌프란시스코 이모집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네가 도선이냐!" 며 반겨 맞아 준 이모에게 백도선은 아침을 먹자 마자 사정을 말하고 다시 버스역으로 향했다. 어떻게든 12시까지 귀대해야 했다. 조금 늦으면 배가 기다려 줄 것이라 생각했다. 백도선은 식구들의 선물을 사라며 이모로부터 받은 3백불을 받아 들고 가슴을 졸이며 귀로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한 참을 달린 끝에 버스가 백도선을 내려 놓은 곳은 애리조나였다. 애당초 영어 한마디 못하던 처지에서 중간에 차를 갈아타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백도선은 운전사에게 손짓 발짓을 다 해가며 다음날 아침 일찍 샌디에이고로 가는 첫 차가 있다는 것을 겨우 알아냈다. 뜬눈으로 버스역 부근의 호텔에서 밤을 지샌 백도선은 다음날 아침 버스를 타고 부랴부랴 샌디에이고로 갔다. 도착해 보니 이미 배는 떠나고 없었다.

백도선은 훈련 중 누군가가 '배가 귀로 중 샌프란시스코에 들렀다 간다'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즉시 버스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로 달려 간 백도선은 바닷가 호텔의 꼭대기층을 잡아놓고 창에 목을 드리우고 배가 오기를 기다렸다. 낮에는 호텔 꼭대기 방에서, 밤에는 항구를 빙빙 돌며 무려 15일 동안을 기다렸으나 허사였다.

관련
기사
- 어느 독립운동가 후손의 '인생화보'-②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미국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발행되는 주간지 코리아 위클리(한국주간) 3월 4일치에도 실립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미국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발행되는 주간지 코리아 위클리(한국주간) 3월 4일치에도 실립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행담도휴게소 입구, 이곳에 감춰진 놀라운 역사 행담도휴게소 입구, 이곳에 감춰진 놀라운 역사
  2. 2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3. 3 '딸 바보' 들어봤어도 '아버지 바보'는 못 들어보셨죠? '딸 바보' 들어봤어도 '아버지 바보'는 못 들어보셨죠?
  4. 4 '도이치' 자료 금융위원장 답변에 천준호 "아이고..." '도이치' 자료 금융위원장 답변에 천준호 "아이고..."
  5. 5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