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294

어떤 놈이야? (2)

등록 2004.03.03 17:29수정 2004.03.03 18:06
0
원고료로 응원
* * *

“자, 지금껏 수련한 대로만 하면 된다. 만일 정신 못 차리고 우왕좌왕하면 우리가 전멸할 수도 있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마라.”
꿀꺽! 꾸울꺽!
“……!”


울창한 수풀 속에서 나직하지만 위엄 넘치는 음성에 이어 누군가가 잔뜩 긴장한 듯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같은 순간 약간 떨어진 곳에서 또 다른 누군가의 음성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영악한 여우새끼의 목을 비틀 것이다. 그래서 지난 몇 달간 고된 수련을 겪은 것이다. 지금부터는 정신 바짝 처리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동료의 목숨이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신호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알겠느냐?”
“조, 존명!”

이곳 역시 잔뜩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누군가의 지시에 대답은 하고 있지만 약간씩 더듬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수풀 속에서도 음성이 들리고 있었는데 이번엔 젊은 여인의 음성이었다.

“지난 밤, 도상(圖上)에서 훈련한 대로만 하면 되요. 그러니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아, 그렇다고 너무 긴장을 풀면 안 되지요. 적당한 긴장은 일을 원활하게 풀어줄 거예요. 자, 이제 신호가 오면 곧장 출발해야 하니까 슬슬 준비하세요.”
“아, 알겠습니다!”

이곳에서는 지시하는 여인이나 대답하는 장한들이나 모두 긴장한 것이 역력하였다. 대화가 오간 세 군데에서 대략 오십여 장 정도 떨어진 암석군 속에서도 또 다른 여인의 음성이 있었다.


“소녀가 놈을 유인해낼 수 있을까요?”
“물론이다. 누가 네게 넘어가지 않겠느냐? 놈은 지난 몇 달간 색에 굶주릴 대로 굶주렸다. 따라서 치마만 둘러도 환장하고 따라나오게 될 것이다. 하물며 너 같은 절세 미녀를 그냥 보고만 있겠느냐? 그러니 이번 계책은 성공할 것이다. 허나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자칫 천추의 한이 남을 수도…“

“걱정하지 마세요. 위급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도움의 손길이 뻗칠 때까지는 어떻게든 견딜 수 있을 거예요.”
“그래 너라면 버틸 수 있을 게다. 그래도 주의를 게을리 하면 안 된다. 알았지?”


“알았어요. 자, 그럼 출발할까요?”
“아니다. 아직 날이 어두워지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알았어요.”
“자, 이걸 먹어둬라.”

“이게 뭔 데요?“
“흠! 뭔지는 알 필요 없고, 무조건 먹어둬라.”
“……!”

건네 받은 단환이 무엇인가 싶어 요리조리 살피던 사라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삼켰다. 무엇인지 대강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이곳 항룡협(降龍峽)은 어지럽게 놓여 있는 집채만한 암석군들 사이로 마차 둘이 겨우 스치고 지날 만큼 좁은 통로가 있는 곳으로 태산 와룡곡으로 진입하는 유일한 통로이다.

그 중 대화가 오간 곳은 통로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곳으로 집채만한 바위들 틈에 생긴 공간이 미로처럼 얽혀 있어 유사시에 도주로로 활용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그곳에는 일남일녀가 있었는데 하나는 사라였고, 다른 하나는 왕년에 산해관 무천장주를 지낸 사면호협 여광이었다.

사라는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들이 즐겨 걸치는 기포(旗袍 : 치파오)를 걸치고 있었다. 이 옷은 온 몸이 착 달라붙어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데다 허벅지 아래 부분이 갈라져 있어 상당히 야해 보이는 복식(服飾)이다.

겨울에는 찬바람을 막기 위해 두툼한 피풍(皮風)을 걸치므로 별 상관이 없다. 그러나 여름에는 속살이 훤히 보이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아는 여인이라면 집안에서만, 그것도 실내에서만 걸치는 의복이 바로 치파오이다.

만일 이것을 걸치고 돌아다니는 여인을 본다면 누구나 건드려도 좋은 노류장화(路柳墻花)이거나, 홍루(紅樓) 기녀라고 보면 된다. 사내들을 유혹하기 위해 일부러 걸치기 때문이다.

사라는 분명 그런 여인은 아니다. 그렇다고 중원 여인도 아니기에 속살을 보이는 것이 청백을 더럽히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렇지만 드러내 놓고 속살을 보인다는 것에는 수치심을 느끼기에 치파오를 걸친 적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이런 차림을 하고 있는 것은 와룡곡에 틀어박힌 채 꼼짝도 않는 늙은 여우 초지악을 끌어내기 위함이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