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학 한 쌍이 깨어날 때까지"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41> 공장일기<26>

등록 2004.03.04 12:54수정 2004.03.04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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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하얀 목련이 필 때면 다시 생각나는 사람"

"하얀 목련이 필 때면 다시 생각나는 사람" ⓒ 우리꽃 자생화


그래. 아마 그해도 올해처럼 꽃샘추위가 앞 다투어 피어나는 매화꽃을 마구 시샘할 그런 때였을 것이다. 공장 주변을 휴전선 철책처럼 빙 둘러친 철망 사이로 개나리가 노오란 얼굴을 하나 둘 내밀고, 사출실 뜨락에 깡마른 몸매로 서 있던 백목련의 꽃눈이 바나나 껍질처럼 서서히 벌어질 그런 때였으니까.


"저어기 잠깐 나 좀 보입시더."
"와예?"
"이거!"
"이기 뭡니꺼?"
"나중에 퇴근한 뒤에 집에 가서 꼬옥 펴 보이소."


하지만 나는 궁금증을 도저히 이기지 못해 화장실에 들어가 그녀가 전해준 사각 진 조그만 상자를 서둘러 열어 보았다. 사출실에서 나이가 가장 어린 그녀가 내게 전해준 것은 진달래빛 종이학 두 마리였다. 그중 한 마리는 꽁지가 넓게 접혀 있었고, 다른 한 마리는 꽁지가 좁게 접혀 있었다. 그것은 종이학 한 쌍을 상징하는 의미였다.

그리고 종이학 한 쌍 아래에는 장밋빛 감도는 조그만 쪽지가 하나 들어 있었다. 그 쪽지에는 "이 종이학 한 쌍이 깨어날 때까지 그대를 기다리겠습니다" 라는 깨알 같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아니, 대체 어쩌자는 거지? 이제 기껏 열일곱 먹은 소녀가 나이 차이가 일곱 살이나 나는 나를 좋아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나는 적이 놀랐다. 내년이 되어도 산업체특별고등학교에 입학을 할지 말지 모르는 나이 어린 그녀가 내게 사랑고백을 하다니. 그것도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특별한 의미를 담은 멋진 글까지 써서 말이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가 준 종이학 한 쌍을 돌려주기도, 그렇다고 가지고 있기에도 참으로 애매했다.

더구나 당시 내가 다녔던 공장은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가 거의 반반이어서 그런지 공장 안에서 남녀간의 사랑문제가 빈번하게 일어나곤 했다. 또한 그런 사실이 밝혀질 때마다 공장에서는 그 둘을 축복해주는 것이 아니라 시말서를 내게 하여 그 둘 사이를 애매하게 갈라놓거나, 심하면 해고를 시키는 일들이 빈번했다.


"이로 우짜모 좋것노?"
"니 사실 겉으로 말은 그렇게 해도 속으로는 억수로 좋제?"
"속으로 아무리 좋으모 뭐하노. 내는 지금 병역특례로 받고 안 있나. 잘못하다가는 군에 끌려가는 수가 있다카이."
"하긴 인자 열일곱 묵은 갸(걔)가 그런 니 입장을 우째 알것노."


난감했다. 그렇다고 나로 인해서 나이 어린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게 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진심 어린 마음의 고백을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나는 며칠간의 고민 끝에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나의 여러 가지 모순점을 최대한 그녀에게 보이려 애썼다.

하지만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내가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는 더욱 집요하게 종이학과 쪽지를 접어서 보냈다. 그 쪽지에는 늘 "종이학 천 마리를 접어 보내면 어떤 소원이든 다 이루어진답니다. 이번이 그대에게 접어 보내는 ○○○번째 종이학이랍니다"라는 그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니 자꾸 나이 어린 갸 마음을 애 태우게 하지 말고 고마 받아주모 안 되것나? 니도 갸가 아예 싫지만은 않은 거는 확실하다 아이가?"

"사실 나도 고민이 많다. 내가 갸 마음을 받아주모 둘이 중에 하나가 공장을 그만 두어야 된다카는 거는 니도 잘 안다 아이가. 갸가 그만 두모 학교로 포기해야 되고, 내가 그만 두모 당장 군에 가야 되고. 그래, 니 같으모 우쨌으모 좋것노?"


슬픈 현실이었다. 당시 현장 노동자들은 공장 내에서 같이 일하는 그 누군가가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함부로 마음의 고백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까닭에 서로 눈빛이 마주쳐 좋아지게 되면 어느 한쪽이 아예 회사를 그만두기도 했다. 회사를 그만 두는 쪽은 주로 여성 노동자들이긴 했지만.

하긴, 가끔 공장에서는 사내 커플을 인정할 때도 있었다. 그리고 공장 간부들의 축복 속에 사내 결혼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그 사내 커플과 사내 결혼은 현장 노동자들의 몫이 아니라 사무직 노동자들이거나, 대학을 갓 졸업하고 기사란 직책을 달고 다니는 간부들의 몫이었다.

"제조2부에서 선반을 만지는 그 헹님(형님) 안 있더나?"
"와?"
"이달 말에 결혼한단다."
"그으래. 신부가 누구라 카더노?"
"작년에 그만 둔 서양이지, 누구기는 누구겠노."
"그래. 누구는 공장을 그만 두어야 결혼을 할 수 있고, 누구는 필자가 좋아서 사내 결혼까지 하고도 나란히 공장에 다니고… 내 참 더럽다, 더러버(더러워)."


그래. 해마다 이맘 때, 개나리와 목련이 피어날 때면 열일곱 먹은 그녀의 쌍꺼풀 예쁘게 진 커다란 눈동자가 떠오른다. 그리고 <마산문화> 2집에 본명으로 시를 발표한 사건(?)으로 내가 또다시 부서 이동을 당할 때까지 매일 같이 연분홍빛 종이학과 쪽지를 고이 접어 내게 보낸 그녀에 대한 미안한 마음 감출 길 없다.

덧붙이는 글 | <계속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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