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말똥가리 시인'의 노래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의 시집 <기억이 나를 본다>

등록 2004.03.11 11:19수정 2004.03.11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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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기억이 나를 본다>
책 <기억이 나를 본다>들녘
-"시는 죽었는가, 아니다.
시는 어디에 있는가. 여기 있다. 저기에 있다.
또한 시가 없는 곳에도 시가 있다.
인류의 시작과 함께 있는 시.
인류의 오랜 삶과 함께 있는 시.
인류가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질 시.
그리하여 시는 이 지상의 처음과 끝이다."
- '오늘의 세계 시인'의 책임 편집자 고은의 말에서


북유럽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북유럽 특유의 깨끗하고 차가운 풍경에 새삼 놀란다. 그 아름다움을 시로 표현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시인은 그가 속한 세상의 모습을 다른 세계에 전하고 그 이미지와 형상화 속에 삶의 의미와 성찰을 전하는 임무를 지닌 사람이다.


그래서 스웨덴의 국민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의 시에는 스칸디나비아 특유의 자연환경에 대한 깊은 성찰과 명상이 담겨 있다. 다양하고 풍부한 시 창작으로 스웨덴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노벨상 수상 후보로 거론되는 그의 시에 대해 문학평론가 김성곤씨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는 정치적 다툼의 지역보다는 북극의 얼음이 해빙하는 곳, 또는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화해와 포용의 지역으로 독자들을 데리고 간다. 그리고 북구의 투명한 얼음과 끝없는 심연과 영원한 침묵 속에서 시인은 세상을 관조하며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보편적 우주를 창조해낸다."

우리에게 조금은 생소하지만 스웨덴 시인이 지닌 감수성은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하는 궁금증으로 이 시집을 읽으면 될 것 같다. 그릇의 모양에 따라 거기 담긴 물의 모양도 달라지듯이 시인의 시들은 그 시인의 처한 환경의 모양새를 닮아 간다.

그래서인지 이 시집의 정서는 우리와 조금은 다르다. 하지만 그 다름 속에 보편적인 정서 또한 내포하고 있기에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시인이 묘사하는 세상의 모습은 다르지만 그 속에 개성과 보편성이 함께 존재하면서 아름다운 가치를 뿜어내기 때문이다.

-"우리가 던진 돌들이 유리처럼 선명하게/ 세월 속으로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골짜기엔/ 순간의 혼란된 행위들이/ 나무꼭대기에서 꼭대기로/ 날카롭게 소리치며 날아간다. 현재보다/ (중략) 우리의 모든 행위들이/ 유리처럼 선명하게 떨어진다,/ 바로 우리들 자신/ 내면의 바닥으로." - 시 <돌>


떨어지는 돌이 내는 소리, 유리의 선명함 등을 통해 '우리들 자신의 내면의 바닥'을 생각하는 시인의 놀라운 형상화는 웬지 모르게 시인 김수영의 <폭포>를 떠올리게 한다. 폭포 소리를 통해 자신을 반성하고 깨달음을 얻는 투명한 마음과 이 스웨덴 시인의 감수성은 서로 통하는 데가 있다.

이 시집의 가장 큰 특징은 이와 같은 자연의 묘사를 통한 내적 성찰이다. 아름답고 투명한 북유럽의 하늘과 호수, 바람과 차가운 공기, 침엽수림 등을 떠올린다면 그의 시를 이해하는 데에 조금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 차갑고 시원하고 투명한 자연 속에 시들은 다양한 이미지를 한껏 뽐낸다.


-"저 잿빛 나무를 보라. 하늘이/ 나무의 섬유질 속을 달려 땅에 닿았다./ 땅이 하늘을 배불리 마셨을 때, 남는 건/ 찌그러진 구름 한 장뿐. 도둑 맞은 공간이 비틀려 주름잡히고, 꼬이고 엮어져/ 푸른 초목이 된다. 자유의 짧은 순간들이/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 운명의 여신들을 뚫고 그 너머로 선회한다." - 시 <사물의 맥락> 전문

이미지가 중심이 되는 현대시라고 주제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가 스웨덴의 국민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이유는 이미지 속에 담긴 가치 있는 삶의 성찰 때문일 것이다.

-"꿀벌 위의 꽃가루처럼 모피 모자마다 햇살이 달라붙었고, 햇살은 겨울이라는 이름에 달라붙어, 겨울이 떠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눈 위의 통나무 정물화가 나를 생각에 잠기게 했다. 나는 물었다.
'내 유년 시절까지 따라올래?' 통나무들이 대답했다. '응.'

잡목 덤불 속에는 새로운 언어로 중얼거리는 말들이 있었다.
모음은 푸른 하늘, 자음은 검은 잔가지들, 그리고 건네는 말들은 눈 위에 부드러웠다."
- 시 <정오의 해빙(解氷)> 중에서


이 시를 읽으면서 눈이 스르르 녹는 따뜻한 오후의 졸음을 떠올리고, 행복했던 유년 시절을 떠올린다면 시란 결코 이해하기 어려운 문학 장르가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비록 이 시가 북유럽에서 창작되었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따뜻한 정서는 우리 모두가 느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과나무, 벚나무, 호수, 잔디밭, 햇볕, 얼음, 눈, 붉은 벽돌집. 이 시에 등장하는 소재들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북유럽을 여행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아마도 이 시인이 전하는 스웨덴의 아름답고 선명한 자연 묘사와 그 속에 담긴 풍요로운 사랑의 마음이 이국 땅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말똥가리 시인'이라는 그의 별명처럼 작고 소박하면서도 날카로운 세계에 대한 인식이 담겨 있는 시. 심리상담사로 일하면서 40여 년 간 시 창작을 해 온 그가 10여 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한다. 그의 이 고통스러운 체험 또한 시에 녹아들어 독자의 감수성에 호소하는 좋은 작품이 탄생하길….

기억이 나를 본다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지음, 이경수 옮김,
들녘,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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