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제일 무서웠어요"

아이들이 말하는 인권

등록 2004.03.12 09:40수정 2004.03.12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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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레이트 이우일

아이나 학부모나 초등학교의 문턱에 서면 설렘과 함께 고개를 내미는 두려움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 아이가 벌써 초등학생이 되다니 참 대견스럽네’ 하는 뿌듯함 뒤편에는 ‘우리 아이가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혹시 선생님에게 혼이라도 나지 않을까?’,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지 않을까?’ 등 갖가지 걱정들로 잠을 설치기 일쑤다.

걱정을 조금이라도 덜어 내기 위해 이미 학부모가 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기도, 주변의 초등학교 선생님에게 도움말을 구하기도 한다. 우스갯소리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학교가 학부모를 늘 바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여기서 작은 도움 하나를 드리고자 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해 1년 동안 학교 생활을 경험한 아이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말이다. 그들이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학교라는 공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아동의 권리라는 프리즘을 통해 엿보고자 한다.

그리고 당부 한 가지. 이 아이들은 대도시에 있는 한 학교를 다니고 있기에 무리해서 일반화시켜 생각하지는 말기 바란다. 이야기를 풀어 준 가희 희지 동연이는 지난해 1학년이었고, 승범 수현 민지 설아는 3학년이었으며, 모두 가명을 썼다.

학교 생활이 재미있어요?

수현(3): 재미있어요. 친구들하고 놀고 공부하는 것도 재미있어요.
승범(3): 쉬는 시간에 복도에서 잡기놀이 하는 거 진짜로 재미나요. 선생님한테 걸리면 혼나기는 하지만.
가희(1): 공부하는 게 재미있어요. 모르는 문제를 풀 때가 재미있어요. 선생님이 잘한다고 칭찬하면 기분이 좋아요.
희지(1): 그림 그릴 때가 제일 재미있어요. 크레파스로 색칠하고 물감으로 칠하는 게 좋아요. 친구들하고 운동장에서 놀 때도 재미있고요. 공부할 때도 재미있어요. 학교 오는 게 제일 좋아요.

친구들이 어떤 때 싫어요?


가희(1): 제 짝이 자기는 안 하고 내 거 베껴 쓸 때 정말 싫어요. 그리고 머리카락 잡아당길 때. 뭐 빌려 달라고 할 때도 수상해요. 자기도 갖고 있으면서 빌려 달라고 해요.
동연(1): ‘미쳤다’ ‘바보 멍청이’ 이렇게 놀리거나 먼저 때릴 때도 있어요. 협박도 하는데 몇 시에 운동장에서 보자, 안 나오면 죽는다고도 해요.

승범(3): 왕따시킬 때요. ‘쟤랑 놀지마’하고 왕따시켜요. 또 힘센 아이가 우리집 뒤져서 돈 찾는다고 하거나 몇 백원만 달라고 해요. 딱 한 번 싸웠는데 장난치다가 그 친구 급소를 찼어요.
수현(3): 놀려요. 제 이름 가지고 노래도 만들어서 불러요. 욕할 때도요. 놀면서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막 욕해요.
민지(3): 지렁이 머리, 베이비 쭈쭈 이렇게 놀리는 거 너무 나빠요. 막 터질 것만 같아요. 화가 나서.


선생님에게 혼난 적이 있나요? 어떻게 혼났나요?

희지(1): 처음에 선생님이 제일 무서웠어요. 혼날까봐요. 교장 선생님도 무섭고요. 공부시간에 떠들어서 혼났어요.
동연(1): 친구랑 싸워서, 떠들어서, 급식 남겨서 혼났어요. 생활일기 안 써갔을 때도요.
가희(1): 청소 안 하고 그냥 갔거든요. 그 다음날 혼났어요. 급식 남겼을 때, 숙제 안 해올 때 혼났어요. 손바닥 맞을 때 정말 아파요. 저는 두 번인가 손바닥 맞았어요. 보통은 말로 야단치는데 큰소리로 야단칠 때는 무서워요.

3학년 아이들은 숙제를 안 하거나 복도를 뛰어다니거나 준비물을 안 챙겨올 때, 불량식품을 사 먹을 때 혼났다고 했다. 주로 가벼운 꿀밤을 맞거나 손바닥을 맞기도 했고, 볼 꼬집기나 복도에서 손들고 서 있기(이건 정말 창피한 일이라고 했다), 시간 없다고 쉬는 시간에 화장실 못 가게 하는 것, 오리걸음 경주 같은 벌을 받았다고 했다.

언니나 오빠들이 괴롭힌 적은 없나요?

희지(1): 집에서는 안 그러는데 학교에서 오빠가 욕하고 때리기도 했어요. 어떤 오빠가 지나가다 먼저 제 머리를 쳤으면서 조심해서 다니라고 했어요.
동연(1): 운동장에서 놀고 있으면 자기 구역이라면서 다른 데 가서 놀라고 해요.

수현(3): 복도나 교실에서 놀면 시끄럽고 방해되니까 운동장에 가서 노는데 축구를 하면 공을 빼앗아 갈 때도 있어요. 1학년 때 골대 두 개를 써야 한다고 비키라고 했어요.
민지(3): 정글짐에서 얼음 땡 하고 있는데 내보냈어요.
승범(3): 형아들이 축구하는데 꺼지라고 했어요.
설아(3): 언니, 오빠들이 어리다고 뭐라 그래요. 문방구에서 새치기하는 오빠들도 있어요.

공부하는 시간이 너무 많지 않나요?

모두 : 너무 많은 것 같아요.

1학년 아이들은 아직까지 공부하는 시간이 많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3명 모두 학습지를 하고 있었고, 가희와 희지는 피아노 학원에, 동연이는 태권도 학원에 다녔다. 희지는 따로 영어와 미술 과외를 받고 있다고 했다.

설아(3): 보습학원에 다녀요. 1학년 때부터 다녔는데 영어, 수학, 국어, 사회 이렇게 공부해요. 학원 다니는 게 싫어요.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 좋아요. 학교에서도 공부를 많이 해서 좋지는 않지만 하루에 3시간 정도만 공부했으면 좋겠어요.
수현(3): 학교에서 4시간이면 적당할 것 같아요.
승범(3): 저는 1시간만 했으면 좋겠어요.

모두: 그건 너무 적어. 공부할 건 해야지.

민지(3) : 학교나 학원에서 내주는 숙제가 너무 많아요. 그리고 청소하는 것도.
설아(3): 9시나 10시 정도에 학교에 가면 좋겠어요. 너무 일찍 가니까 밥을 못 먹고 갈 때도 많아요.
승범(3): 숙제가 너무 어려운 게 있어서 못 해 가면 혼나니까 싫어요. 어려운 숙제를 안 냈으면 좋겠어요.

동네에서 편히 놀 수 있는 곳이 있나요?

희지(1): 놀이터가 있는데 조금 멀어요. 그래서 골목에서 자주 노는데 골목길이 너무 어두워서 무서워요.
민지(3): 골목에서 놀고 있으면 어른들이 다른 데서 놀라면서 소리를 버럭 질러요.
수현(3): 골목길이 너무 어두워요. 환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흙이 없어요.
승범(3): 흙 있잖아. 공사하는 데 거기서 놀면 되잖아.
수현(3): 아저씨들이 가라고 혼내.

집에서는 어때요?

수현(3) : 공부하라고 해요. 숙제했냐고 하고. TV 보고 있으면 숙제하라고 해요. 공부 안 하거나 일기 글씨 이상하게 쓸 때 혼내요. 주로 손바닥으로 때려요.
승범(3) : 우리 엄마도 손바닥으로 때리는데. 밤에 떠들거나 늦게 들어오면 많이 혼나요. 엄마 잔소리가 너무 길어요.

민지(3): 집에서 TV만 본다고 야단맞아요. 빗자루나 파리채로 때리시는데, 정신을 어디다 두냐고, 안 맞아서 그렇다고, 맞아야 한다고….
설아(3): 밤 1시까지 공부할 때도 있어요. 몇 시간씩 잔소리를 들은 적도 있어요. 휴~ 우리 엄마는 청소기 막대기를 빼서 때려요. 숟가락으로도.
민지(3): 대화로 하는 게 혼내는 것보다 좋은 거 같아요. 그냥 잘못한 걸 알려 주면 알아서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화부터 내세요.

1학년이 되는 동생들에게 한마디씩 해 준다면?

아이들은 ‘형아들한테 까불면 안 된다’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숙제도 잘 해야 한다’ ‘특히, 준비물은 꼭 잘 챙겨가야 한다’ ‘싸우지 말고, 왕따 같은 거 하지 마라’ ‘싫어하는 아이가 있더라도 왕따는 안 된다’ ‘양보하는 마음을 가지고 무조건 자기 마음대로 하는 애들을 가장 싫어하니까 그러지 마라’ 등의 충고를 해 주었다.

아이들의 이야기가 어두운 이유는 질문의 내용 탓이 크다. 아이들은 학교를 좋아하고 학교가 즐거움을 주는 곳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이들은 커가면서 학교에서 좋은 것만 배우지는 않는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음을 그들의 목소리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어느 인권 운동가의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춘다’는 말이 가볍게만 들리지 않는다. 아이들이 누려야 할 권리를 마음껏 누리면서 살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입시경쟁에서, 취업경쟁에서 오직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학교에 다니고, 그런 삶을 산다는 것은 얼마나 애처로운 일인가.

학교가 그런 길을 가도록 강요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 아이들에게 그런 삶을 살라고 강요하지 않기 위해서 어른들이 아이들과 함께 풀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 출발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야만 대화할 수 있고 무엇인가를 같이 만들어 갈 수 있을 테니까. 그것이 또한 인권을 가장 먼저 실천하는 길이다. 시작할 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 모르겠다. 끝으로 인터뷰에 응해 준 아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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