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는 우리 사회의 각종 현안에 대해 좀더 깊이 있는 분석과 대안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매주 2차례에 걸쳐 [대안칼럼]을 내보내고 있습니다. 대안연대회의 소속 국내외 학계와 연구소 전문가 18명이 칼럼진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정치비평>편집위원인 이광일 박사는 현 탄핵정국을 과거 수구정치세력과 단절하지 못한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개혁실패가 낳은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이 박사는 또 현 탄핵규탄은 수구정치세력의 공세를 막고 일반 대중 민주주의를 방어하기 위한 대중적 의지의 표현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모든 것을 흡입하는 ‘블랙홀 탄핵정국’을 경계하면서 긴 호흡을 가지고 민주주의와 진보를 생각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수구 정치세력들에 의해 추진된 ‘대통령 탄핵’이 사실로 되었다. 국민들은 임기를 1달여 남긴 16대 국회, 그것도 ‘부패원조 국회’가 탄핵정국을 조성한 것에 대해 분노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있다. 87년 6월항쟁 이후 탈군부 민주화 이행과정을 거치며 민주주의가 진전되어 왔다는 ‘일반적 평가’ 속에 벌어진 이 사태를 보며 대중들은 아연실색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치학 교과서 첫 장에 나오는 ‘인민(대중)을 위한 정치’는 왜 이처럼 요원한가? 지금 대중이 겪고 있는 삶의 고통과 분리되어 진행되고 있는 이 사태는 이를 주도한 수구정치세력들에 대한 비판에 머무르거나 어쭙잖은 양비론으로 설명하기에는 그 심각성이 중대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역사로 돌아가 이 사태를 불러일으킨 정치세력들의 궤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여기에서 고박물관의 귀퉁이조차 차지할 수 없을 만큼 타락한 수구정치세력들의 역사적 흔적에 대해 언급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양식 있는 이 사회 구성원들을 또 한 번 죽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민(대중)을 위한 정치는 왜 요원한가
따라서 우리의 관심사는 이 사태의 다른 한 축에 서 있으며 ‘민주화운동의 전통’을 계승하였다고 자임하는 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의 궤적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물론 ‘민주주의는 항상 현재적이다’라는 진리에 주목할 때, 이들이 내세우는 ‘정통세력’ 운운은 난센스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 ‘진정 자유주의’(true liberalism)이고자 하는 이들 정치세력은 글로벌 신자유주의로 인해 소외받고 고통받는 다수 대중의 삶과는 다른 저편에 서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그 ‘자랑스런 과거’조차도 올바르게 기록되거나 평가된 것은 아니다. 엄정한 역사의 문을 하나 더 밀고 들어가면, 그 과거가 대중에게는 결코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었음을 보게 된다.
문제를 도식화시킬 위험은 있지만, 유신체제와 신군부로 이어지면서 재생산된 ‘공개적 독재체제’에 맞서 민주화투쟁을 벌이던 그 시기에, 민주화운동진영에 속했던 이들 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은 진정 대중의 고통을 자기문제로 하여 투쟁한 적이 별로 없었다.
무엇보다 이들의 발상과 행태를 지배하였던 것은 4.19혁명의 수혜를 받아 집권하였으나 5.16쿠데타로 군부에, 그리고 80년 신군부에 넘겨줄 수밖에 없었던 그 권력에 대한 향수와 강한 집착이었다.
이들 정치세력들은 그 잃어버린 권력의 분점 내지 독점을 위해 수십 년간 ‘독재권력’과 대립해 왔다. 따라서 이러한 목표를 위해서라면, 이들은 그 누구와의 타협도 마다하지 않았다.
6.29선언을 통한 신군부와의 타협, YS‧DJ의 권력경쟁으로 인한 자기분열, 그 결과 이어진 3당 합당과 DJP연합, 독자집권으로 이어져 결국 전화위복이 된 노무현 민주당후보의 정몽준과의 단일화와 결별 등은 이들의 인식과 행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은 집권에 사활을 거는 것은 마다하지 않지만, 대중들의 소외된 삶의 문제에 자신을 던지지는 않았다. 이들 엘리트주의자들에게 대중들이 직면하고 있는 삶의 고통은 그 누군가 치러야 할 불가피한 비용으로만 인식되었을 뿐이다.
현 사태는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개혁실패’가 낳은 것
그 결과 냉전 수구정치세력과 단절하고 반민주적 역사를 청산해야 할 역사의 길목에서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보여주었던 오랜 ‘타협의 정치’는 자신들에게 집권의 단맛을 보게 해주었을지는 모르지만, 대중에게는 삶의 고통, 역사에 대한 허무, 그리고 정치에 대한 냉소와 외면을 조장하는데 일조해 왔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그로 인한 ‘개혁정치의 실패’는 ‘탄핵정국’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다시 돌아왔지만, 역시 그 고통의 극복은 이들 정치세력이 아닌 대중의 몫이 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이 위기의 주요 책임이 자유주의 정치세력들에게 있음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수구적인 파시스트세력들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지체된 민주주의’의 책임을 애초 민주주의와 대립하는 수구정치세력들에게 돌리는 것은 ‘도둑에게 도둑질하지 말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것은 그들에게 양심을 기대하는 ‘도덕적 훈계’ 이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지금의 이 사태는 ‘민주주의의 공고화’라는 역사적 과제가 계속 제기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권력, 제도가 보장해 준 단맛에 익숙해져 그 과제를 방기하고 수구세력과 타협해 온 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의 ‘개혁실패’가 낳은 것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수구정치세력들의 숫자놀음에 헌정질서가 위협받는 것은 민주주의를 과거의 기억으로만 붙잡고 있던 이들 정치세력들의 안이한 인식과 태도, 50%를 상회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9%를 넘어선 청년실업으로 상징되는 대중의 삶의 고통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는 이들의 ‘제3자적 정치’가 만들어낸 결과이다.
대중 정치학습의 장이 된 탄핵정국
하지만 이번 탄핵정국은 대중에게 진정한 정치의 소재지가 어디인지 각인시켜주면서 ‘정치 학습의 장’이 되고 있다. 민주주의를 위한 최소한의 수단이 무력화된 상황에서 대중들은 자신이 위임한 주권을 회수하여 거리에서 그것을 직접 행사하고 있다.
이제 대중은 잠시 잊고 있던 기억, 즉 정치의 본질이 구체적 삶의 현장에, 그리고 스스로의 결정에 내재되어 있음을 새삼 확인하고 있다. 이들은 주권자로서 자발적으로 모여 논의하고, 요구하고, 저항한다.
모든 진보적 사회세력들, 대중들은 상이한 이념적 지향, 정치적 견해에도 불구하고 어깨를 함께 하며 과거 군부독재, 파시스트독재에 맞섰던 것처럼 최소한의 민주적 절차마저 질식시키고 있는 수구정치세력들의 정치적 공세에 대응하고 있다.
이 와중에서 자신들이 벌인 행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수구정치세력들은 자발적인 대중의 행동에 놀라 당황해 하면서 이번 사태의 원인을 언론에, ‘현명하지 못한 대중’에 전가시킴으로써 스스로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지고 있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냉정하게 이 탄핵정국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무엇 때문에 다수 대중이 냉전 수구정치세력들과 맞서고 있는가? 지금 대중이 자신의 ‘일반의지’를 드러내 보이는 것은 수구세력에 의해 훼손된 ‘민주적 절차’를 단순히 복구시키자는데 있지 않다. 또한 그것을 회복시켜 기존의 부패하고 부도덕한 정치세력들에게 되돌려주자는데 있지 않다.
탄핵규탄은 수구세력공세 차단하고 일반민주주의 방어위한 대중적 표현
이런 맥락에서 탄핵에 대한 대중의 저항은 결코 노무현 정권과 열린 우리당에 대한 지지로 환원될 수 없다. 민주주의와 사회진보를 위해 전개된 그 동안의 역사는 자유주의 정치세력을 신비화시키는 행위가 결국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가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바로 그것이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10:90 사회,’ ‘한 국가 내에 풍요와 빈곤에 시달리는 두 국민’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지금 대중이 수구정치세력들과 대결하는 목적은 고통 받고 소외받는 사람들의 삶의 목소리를 더욱 효과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보다 수평적인 사회관계들, 정치관계들을 재구성하는데 있다.
이런 맥락에서 탄핵규탄은 수구정치세력의 파시스트적 공세를 차단하고 ‘일반민주주의’를 방어하기 위한, 즉 87년 6월항쟁 이후 그나마 진전된 ‘제한된 정치적 자유화’의 성과를 방어, 유지하기 위한 대중적 의지의 표현이다.
지금의 탄핵정국이 노무현정권의, ‘진정 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의 헤게모니 제고를 위한 정치적 효과를 조성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보적인 사회정치세력들이 이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은 ‘경쟁적 신자유주의 권력’인 노무현 정권에 의해 가속화되고 있는 대중의 피폐한 삶이 지금의 탄핵반대 의지를 노무현 정권, 열린우리당에 대한 지지로 귀결시키려는 사회정치세력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중의 삶에 밀착되어 있는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사회정치세력들의 대안과 실천을 통해 해소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많은 대중들은 ‘진정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열린우리당에 대한 지지로 급속히 경도되고 있다. 하지만 삶의 무게에 눌린 대중들은 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이 보여 온 오랜 ‘타협의 정치’를 떠올리며 이들의 향후 정치적 행보에 의구심을 보내고 있다.
많은 대중들은 대통령 탄핵을 계기로 표출된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들의 결속력을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친노 대 반노’라는 담론과 접합시키며 과거에 그랬듯이 그들의 정치적 입지 확대와 권력 강화를 위한 정당성의 근거로 이용하는 것은 아닐까 우려하고 있다.
탄핵을 정치적 입지와 권력 강화 정당성으로 이용할 것
그런데 지금 그러한 우려는 탄핵정국을 경과하면서 점차 가시화되고 있다. 이 와중에서 부안사태, 이라크 파병문제 등에서 보이듯 대중을 대상화시켜 왔던 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의 반개혁적 정치, 노무현정권의 국정책임은 자연스럽게 희석되고 있다.
그렇다면 ‘탄핵 및 총선정국’이 일단락된 후, 한국의 정치는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될까. 이 국면이 일단락되면 ‘진정 자유주의’를 지향하고, 글로벌 신자유주의를 자신의 물적 근거로 삼고 있는 열린우리당, 노무현정권은 우리의 희망과는 달리 소외된 사람들과 분리된 채, 점차 저 멀리에 우뚝 선 권력이 될 것이다.
선험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이들 정치세력들은 다수의 국회의원을 배출한 정당으로서, ‘의회쿠데타의 역모’를 온 몸으로 막아낸 유일한 ‘민주정치세력’이라는 공적을 앞세우며 국회로 진입할 것이다.
큰 이변이 없는 한 노무현정권은 헌법재판소의 탄핵불가 판결을 배경으로 다시 청와대에 복귀할 것이다. 총선을 통해 확인된 대중적 지지와 최고법원의 탄핵기각이라는 판결을 정당성의 근거로 하여 이제는 너무도 식상한 ‘개혁정치’의 바람이 또 다시 불 것이다.
하지만 이들 ‘진정 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이 전개할 ‘개혁정치’는 소외받고 차별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반하는 글로벌 신자유주의 정치의 또 다른 이름 내지 그것의 변형일 것이다. 바로 이것이 ‘2만 불의 장미빛 정치,’ 이른바 ‘천상의 정치’에 가려진 ‘고통스런 지상의 정치’이다.
결국 다양한 삶의 고통을 탄핵정국이라는 장에 표출하고 있는 많은 대중은 이 게임이 일단락된 후, 자신이 ‘탄핵정치의 주체’가 아니었으며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점차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서 있는, 변하지 않은 삶의 현주소를 되돌아 볼 것이다.
모든 것을 흡입하는 ‘블랙홀 탄핵정국’을 경계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탄핵정국과 다가올 총선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총선을 한달 앞둔 지금, ‘진정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정치세력은 현재의 정국추이에 만족해하면서 대중들의 저 열정 뒤편으로 물러나, ‘민생정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커다란 실수만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고 발목을 잡는 장애들도 사라질 것이라 낙관하고 있다. 다른 한편 초라한 모습의 수구정치력들은 이 역풍을 하나의 에피소드로 생각하며 그것이 지나가면 자신들의 지위가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무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희망사항일 뿐이다. 이번 선거는 수구정치세력들의 쇠락이라는 흐름과 반대로 글로벌 신자유주의에 지친 대중의 소외된 삶을 극복하기 위한, 무늬만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민생정치를 펼칠 사회정치세력이 전면에 부각하는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전후 지속된 보수독점의 정치체제는 자기수명을 다할 것이다. 바로 여기에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사회정치세력들이 수구정치세력들의 공세에 적극 대응하면서도, 시장합리성을 내세워 글로벌 신자유주의를 심화시키고 대중의 삶을 곤경에 빠뜨리는 노무현 정권, ‘진정 자유주의 정치세력’과 거리를 두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모든 것을 무차별 흡입하는 ‘블랙홀의 탄핵정국’을 경계하며 긴 호흡으로 ‘민주주의와 진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이유가 있다. 글로벌 신자유주의에 더욱 규정될 한국정치의 미래와 소외된 대중의 삶의 변화 여부는 이제 대중 스스로 행사하게 될 진정한 자기결정(self-determination)의 향방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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