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고보조금을 쿠데타군에게 줄 수는 없다"

[해설] 우리당 '총사퇴' 못하는 이유... 야당 "쇼정치의 극치"

등록 2004.03.19 15:12수정 2004.03.19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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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12일 탄핵안이 가결되자 열린우리당 소속 의원들은 "국민들에게 사과한다"며 항의의 표시로 의원직 총사퇴를 결의했다.

12일 탄핵안이 가결되자 열린우리당 소속 의원들은 "국민들에게 사과한다"며 항의의 표시로 의원직 총사퇴를 결의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지난 12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가결된 날 즉석에서 '의원직 총사퇴'를 결의한 열린우리당이 최근 고민에 빠져 있다. 열린우리당은 이미 당 소속 의원 전원이 사퇴서를 작성해 김근태 원내대표에게 일임했지만, 아직 국회에 제출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열린우리당이 온 국민이 보는 앞에서 '총사퇴'를 결의하고도 아직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총선을 불과 한 달 남겨둔 상황에서 의원직 사퇴가 가져올 불이익이 걱정되는 탓이다. 또 16대 국회의 실제 임기가 5월까지 지속되는 상황에서 국회를 비운다면 벼랑 끝까지 몰린 야당이 어떤 '꼼수'를 들고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격앙된 상태였다 하더라도, 공당의 의원들이 '총사퇴'를 선언하고도 이를 실천하지 않고 있는 것은 여론의 따가운 눈총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두 야당은 벌써부터 열린우리당의 '총사퇴 결의'를 "쇼 정치"로 맹렬히 비난하고 나섰다. 이 때문에 열린우리당은 깊은 고민에 잠겨 있다. 한마디로 총선에서의 이익이라는 '실리'를 택할 것이냐, 의회쿠데타에 항거했다는 '명분'을 택할 것이냐는 갈림길에 놓인 셈이다.

우리당 "당 재정 힘들고 야당의 임시국회 소집도 두렵다" 고백

이에 대해 열린우리당은 일단 의원직 사퇴서 제출을 망설이는 배경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국민들에게 답을 구하겠다는 입장이다. 속사정을 감추며 명분만 내세우지는 않겠다는 얘기다. 특히 신기남 상임중앙위원은 의원직 사퇴를 결의할 당시 다소 격앙돼 있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으면서 신중하게 판단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열린우리당이 이처럼 국회의원 사퇴서 제출을 미루고 있는 이유는 대략 두 가지. 야당의 총선 연기시도와 국고보조금 때문이다. 명분과 실리를 모두 얻기 위해서는 총선 후보자 등록이 마감된 뒤인 4월 2일이 가장 적절하다고 보는 분위기이다.


현재 열린우리당은 4·15 총선연기 음모가 완전히 불식되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있다. 김부겸 원내부대표는 "사퇴서를 수리하고 난 뒤 야당이 장난을 칠 여지가 있지 않느냐"며 이럴 경우 의회 안에서 저지할 방책이 없어진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자격도 없는 야당이 사퇴서를 자꾸 내라고 하는게 이상하지 않느냐"며 야당의 사퇴 촉구 배경에 강한 의구심을 표시하기까지 했다.


신기남 상임중앙위원도 "단 하루도 그 사람들과 국회의원을 더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선을 그으면서도 "쿠데타군이 국회를 점령해 개헌이 어쩌니 하는데 당신들이 막을 임무를 방기하고 감정적으로 할 수 있느냐는 여론이 지역에 가보니 많았다"고 전했다.

지역당원들을 중심으로 한 반대여론도 만만치 않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부영 상임중앙위원은 "정치적으로 격앙을 했다고 해서 총사퇴를 결의한 것에 대해서 '국회의원직을 정치적 무기로 쓰려는 것 아니냐', '당신 마음대로 사퇴서 내도 되느냐'는 비판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며 고민의 일단을 드러내기도 했다.

"쿠데타군과 싸워야 하는데…", 국고보조금 포기 땐 야당에 재배분 되는 것도 걱정

바닥을 드러낸 당 재정상황도 의원직 사퇴서 제출을 미루게 된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이다. '대포'는 아니더라도 '소총' 정도는 손에 들고 있어야 총선이라는 전면전을 대비할 수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후원회 계획도 취소한 마당이어서 재원을 조달할 창구가 당비 이외에는 없는 실정이라고 한다.

이부영 상임중앙위원은 "이번 선거에 방송이나 신문에 광고를 내야하고, 당무를 처리해야 하는데 의원직을 사퇴하고 국고보조금을 받지 못하면 재원을 마련할 대안이 없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신기남 상임중앙위원도 "솔직히 말하자면 소액의 당비를 제외하고는 국고보조금 이외에 수입이 없다"며 "그렇다고 후원회를 할 분위기도 아니어서 후원회를 열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이어 "대부분의 선거비용은 홍보비인데 쿠데타군과 싸우는데 홍보비도 없으면 어떻게 하겠나. 이것 만이라도 조달을 해야 할 처지"라고 덧붙였다.

또 의원직 사퇴로 열린우리당이 국고보조금을 수령하지 못할 경우 54억원에 달하는 자금이 국고로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야당에 재배분된다는 점도 고민거리이다. 신 상임중앙위원은 "우리가 이걸 포기하면 어떻게 되나, 그 돈이 공중으로 날아가는 게 아니라 쿠데타군(야당)에게 들어간다"면서 "이게 국민이 바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근태 원내대표와 소장파 의원들은 국민을 향한 약속이니 만큼 반드시 지켜야 한다며 이번 주중에 사퇴서를 제출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이러한 당내 사정을 솔직하게 공개한 것은 "국민들에게 솔직하게 고민을 털어놓고 해법을 찾는 과정의 일환"이라는 것이 신기남·이부영 두 상임중앙위원의 공통된 설명이다.

한나라-민주당 "대국민 기만극이자 쇼 정치의 결정판"

열린우리당이 이처럼 고민에 빠진 사이 야당은 '총사퇴 결의'를 "쇼 정치의 결정판"으로 폄하하며 맹렬히 비난하고 나섰다.

배용수 한나라당 부대변인은 18일 논평을 통해 "열우당은 12일 의원직 총사퇴 하겠다고 하더니 아직까지 사퇴서를 제출하지 않고 있다"며 "아마 기호 배정에서 3번이 겁나고, 선거보조금 54억원이 아까워서 그런 것 같다"고 비판했다. 배 부대변인은 또 "이는 이중적인 태도"라며 "의원직을 팽개치겠다는 기개대로 내던지든지 아니면 국민들에게 '쇼'였다고 사과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영창 민주당 부대변인도 같은 날 논평에서 "탄핵 당시에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겠다며 의원직 사퇴서를 작성해 국회 본회의장에 펼쳐놓고 더 이상 국회의원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했던 열린우리당의 서슬 퍼렇던 공언은 간 곳이 없다"며 열린우리당을 압박했다.

김 부대변인은 또 "전국으로 생중계 되는 방송을 통해서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의원직 사퇴를 공언했건만 현재까지 사퇴서를 국회에 접수조차 하지 않고 있다"며 "탄핵 당시에 보여줬던 광란의 몸짓과 울부짖음, 의원직 사퇴공언은 국민의 시선을 받고자 했던 '대국민 기만극'이자 쇼 정치의 결정판"이라고 비난했다.

아울러 열린우리당을 향해 "혹여 국고보조금에 연연하거나 총선의 기호를 의식해 사퇴하지 않고 있는지 묻고 싶다"며 "항상 자신들만이 개혁의 주체이고, 국민에게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강변해왔던 열린우리당은 '의원직 사퇴'라는 공개 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원직 총사퇴' 어떻게 되나 - 폐회 중에는 국회의장 허가만으로 가능

한편 열린우리당이 '명분'을 택해 총사퇴를 한다면 언제든지 의원직을 내놓을 수는 있다. 현행법상 국회의원이 사직 의사를 표명할 경우 국회가 개회 중이면 본회의 의결을 통해 사퇴 결정을 내려야 하지만, 폐회 중에는 의장의 허가만으로 사직할 수 있다.

이와 관련, 국회법 제135조(사직) 1항에는 "국회는 그 의결로 의원의 사직을 허가할 수 있다. 다만, 폐회 중에는 의장이 이를 허가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 이 때문에 열린우리당이 의원 전원의 사퇴서를 제출할 경우, 박관용 국회의장이 마음만 먹는다면 당일이라도 사직을 허가해 처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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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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