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내가 하느님 같다

8년 동안 누군가의 맘을 울린 나의 시

등록 2004.03.22 08:17수정 2004.03.22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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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편지라는 것이 참 귀하지 싶습니다. 우체국 집배원이 매일같이 우편물을 가져다 주지만 편지는 거의 없습니다. 그저 책과 신문, 이곳저곳의 홍보물과 고지서 따위가 대부분입니다. 더러 편지 봉투에 담겨져 오는 것들은 '지로장표'가 아니면 모임을 알리는 인쇄된 편지들입니다. 친필로 씌여진, 그리고 내 개인에게로만 오는 진짜 편지를 받는 일은 정말 가뭄에 콩 나는 정도고, 또 그것을 당연지사로 여겨야 하는 시절 같습니다.


나 역시 요즘에는 편지라는 것을 거의 쓰지 않고 삽니다. 전화기만을 사용하며 살던 시절에는 편지를 꽤 썼던 것 같습니다. 육필로 뭔가 증거를 남기고 싶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전화기보다 편지가 더 효과적일 거라고 믿어지는 사안이 있을 때는 꼭 편지를 쓰곤 했습니다.

하지만 컴퓨터를 사용하기 시작한 후로는 편지도 육필이 아닌 키보드로 쓰게 되었지요. 키보드로 쓰고 프린터에서 뺀 편지일지라도 수신인과 발신인의 이름만큼은 꼭 친필로 쓰지만, 그것도 일종의 편법일 것만 같은 느낌 때문에 미안함이나 죄송스러움도 함께 느끼곤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마저도 거의 사라져버린 듯 싶습니다. 우표를 붙여서 부치는 편지는 정말 나에게서도 아주 드문 일이 되었지요.

그리고 이제는 휴대폰으로 문자 메시지도 보내고, 거의 모든 편지를 인터넷 이메일로 대신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홈피 게시판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이메일로 소식이나 메시지를 전하는 일은 나에게도 자연스런 일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변화 속에서 가끔은 육필로 편지를 쓰고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넣곤 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향수에 젖기도 합니다. 비록 적잖은 시간과 정성, 공력이 필요한 일이었지만, 그런 육필 편지들이 사람의 체온과 숨결, 그리고 진심을 을 더 많이 알뜰히 전해 줄 수 있었다는 생각도 하곤 합니다.


그런 향수 때문에 과거 많은 사람들에게서 받았던 숱한 편지들을 버리지 못하고 오래 간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편지들이 어디에 소용이 될 것도 아니고, 언제 다시 한번 읽어볼 것도 아니건만 과감하게 버리지를 못하고 보물단지처럼 간직하고 사니, 그런 면에서도 나는 참 오종종한 위인일 듯싶습니다.

아무튼 육필 편지에 대한 향수를 지니고 사는 내게, 지난해 가을부터 비교적 자주 육필 편지를 보내오는 분이 있습니다. 경북 청송감호소에서 생활하고 있는 분인데, 지난해 <생활성서> 9월호에 실린 우리 가족에 관한 기사를 보고 내게 편지를 쓰게 된 분이지요.


나는 그 분의 편지를 받기만 하는 편입니다. 일일이 답장을 드리지 못하는 것이 여간 미안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내게 절대로 답장 부담을 갖지 말고 자기 편지를 읽어만 달라고 합니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다는 사실이, 자신에게도 편지를 쓸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그 사실이 그는 더 중요하다고 했지요.

나는 일일이 답장을 쓰지 못하는 대신 내 글이 실린 이런저런 읽을거리들을 보내 드리곤 합니다. 그리고 그의 편지들을 잘 간직하면서, 지독하리만큼 악필인 편지글을 애써 식별을 해서 컴퓨터 안에 담아두곤 합니다. 그가 장차(잘하면 올해 안에) 출소를 하게 되면 컴퓨터로 잘 정리된 그의 편지들을 선물할 생각입니다.

지난 20일에는 그 분이 아닌 다른 분에게서 색다른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예쁜 무늬가 있는 노란 봉투부터 색다른 느낌을 주더군요. 더구나 등기 우편으로 날아온 것이라서 더럭 호기심을 갖게 하였습니다.

발신인은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나래1리에서 사시는 김 모니카라는 분인데, 천주교 신자에다가 여자 분이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나로서는 전혀 기억에 없는 분이었습니다. 내 주소를 번지까지는 적지 못했는데, 이름은 속명과 세례명, 두 개의 이름을 다 적었더군요.

재미있는 것은 수신인 주소 옆에 '집배원 아저씨! 번지는 없으나 꼭 전해 주세요'라는 말을 적은 것이었습니다.

청소년 시절부터 해 온 습관대로 가위로 편지봉투 한쪽 끝을 반듯이 자른 다음 내용물을 꺼냈습니다. 그림이 있는 미색 종이 한 장으로 된 육필 편지였습니다. 글씨들이 예쁘지는 않으나 또박또박 시원스럽게 씌어져 있었습니다.

그분께 미리 양해를 구하지는 않았으나, 공개를 해도 괜찮을 소박한 내용이라서 여기에 소개를 해보겠습니다.

지요하 막시모 씨!
나는 귀여운 손자손녀를 다섯이나 둔 65세 할머니입니다.
일찍이도 소식 전하지요?
1996년 9월 1일, <평화신문>에 실렸던 '때로는 내가 하느님 같다'라는 글이 너무 마음에 들어 잘 오려서 다른 종이로 배접을 하여 수첩 안에 잘 넣어오다 요즘엔 아주 수첩에다 붙여서 지니고 다닙니다.
그리고 8년이 지난 오늘 내 책상인 식탁에서 몇 자 씁니다.
그때 그 애기 많이 자랐지요?
또 좋은 글 많이 쓰셨구요?
나는 내 이름만 겨우 그리는 할머니지만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하느님의 자녀임을 감사하며 이번 사순절 잘 보내려고 노력합니다.
두서 없이 미안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2004. 3. 18. 장호원 본당 김모니카.


나는 그 편지를 여러 번 읽었고, 어머니께 읽어드리기도 했지요. 참 고맙고도 행복한 마음이었습니다. 내가 8년 전에(그때가 벌써 8년 전이라니!) 천주교 신문인 <평화신문>에 발표했던 시 한편을 그 분이 읽고 감동을 한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인데, 그 시를 애지중지 간직하며 자신의 수첩에다 붙여서 지니고 다닌다니…!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으로서(명색의 비중이야 어떠하든), 자신의 글이 미지의 독자를 감동시키고 독자로부터 사랑 받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처럼 기쁘고 보람된 일이 또 있을까요. 더구나 이번 일은 참으로 특별한 경우였습니다. 시를 발표한 지 8년이나 지난 때였습니다. 전혀 상상도 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나에게 안겨진 기쁨이었지요.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에게 큰 기쁨을 주신 김모니카씨에게 나는 진심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루 생활을 마감하는 저녁기도 중에 생면부지의 김모니카씨를 기억했습니다. 그분의 가정과 다섯명의 귀여운 손자손녀들을 위해서도….

김모니카씨의 그 편지 덕분에 8년 전에 <평화신문>에 발표한 그 시를 찾아서 다시 한번 읽어볼 수 있었습니다. 천안에서 혼자 자취하며 공부하고 있는 고2 딸아이를 생각하고, 텔레비전이 보여 주는 서울 광화문 광장의 촛불시위 장면에 열중하고 있는 중2 아들녀석을 돌아보면서….

여기에 그 시를 소개해보고 싶군요.

때로는 내가 하느님 같다

수만 가지 마음과 본능 중에서도
가장 지순한 것의 하나가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일지니
늦으막히 결혼하여 아비된 날부터
갖기 시작한 자식에 대한 사랑이
스스로 느끼기에도 극진하고 신기하여
어느 날 문득 하느님을 생각했네
자식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으로부터 연유된 것일까
그러므로 나는 지금 가장 지순한
하느님의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절로 흥겨워지고 감사한 마음이면서도
자식에 대한 사랑이
진실로 하느님의 사랑과 일치할 수 있는가를
뼈아프게 생각했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이기 위해서는
내 자식만을 생각하지 않는 마음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내 자식처럼 사랑하는 마음이어야 함을
가슴 아프게 생각했네
두 팔로 겨우 내 자식들밖에 안지 못하는
능력 없는 사람일지라도
감히 하느님의 마음이고자 하는 것은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바르고 좋은 세상을 희구함일지니
그것은 결국 훗날 내 자식들이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을 지니고 행실하며 사는
참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일레.

(1996년 <평화신문>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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