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유도기합 소리에 괴로워했다'

고2학생이 작문 시간에 쓴 패러디 시 '국회의원'

등록 2004.03.22 10:16수정 2004.03.22 14:12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저는 매우 평범한 선생님입니다. 사범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면서 이런저런 실수도 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며 보람과 고통을 함께 맛보는 그저그런 국어 선생님이죠.


전교조 조합원도 아니며, 정치적으로 중립성을 갖고 교육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스스로 절감하면서도 되도록 정치 이야기는 피하는 그런 소심한 선생님입니다.

이번 탄핵안 가결 후 이 문제에 대하여 청소년기 학생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생각은 해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수업에서 언급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선생님도 있고 저런 선생님도 있으니까 저는 그저 평범하게 교과목이나 잘 가르치면서 아이들에게 사랑을 베풀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작문 수업 시간의 '패러디 시쓰기'

올해 제가 담당하고 있는 교과목은 고등학교 2학년 과정에 있는 작문 과목입니다.


작문 과목은 교재 구성 및 모든 수업 면에서 다양한 글쓰기 활동을 통해 작문 능력을 배양하도록 되어 있죠. 교육 목표 또한 "작문의 이론을 이해하고 작문 기능을 체계적으로 습득하며 글을 쓰는 목적, 대상, 내용 등을 고려하여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글로 표현하는 능력과 작문에 대한 바람직한 태도를 가진다" 라는 거창한 내용입니다.

'글을 쓰는 목적, 대상, 내용을 고려'하여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글로 표현'하는 작문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표현하는 사상과 감정은 무엇이며 그들이 쓰는 내용들은 어떤 것인지 아마 모든 이들은 궁금할 것 같습니다.


의외로 학생들은 굉장히 풍부한 감정과 생각을 갖고 있어서 작문 수업 시간에 글쓰기 활동을 하다보면 깜짝 놀라는 일들이 많이 발생합니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뭘 모를 것 같고, 어설퍼 보이는 아이들이지만 그들 속에 숨어 있는 생각들은 어른들을 능가하기도 합니다.

대통령 탄핵안 가결 후 우리 학교 학생들은 작문수업으로 '패러디 시쓰기'를 했습니다. 교과서에 명시되어 있는 윤동주의 <서시>와 예문으로 제시된 학생의 패러디 시 <축구광>이라는 시를 보고, 학생들에게 비슷한 모방 시를 쓰도록 한 것이었죠.

윤동주의 <서시>는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니까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교과서에 제시된 예문인 학생의 모방 시 <축구광>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축구광

월드컵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한 골을 먹는 소리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모든 여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축구를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응원을
이 몸 바쳐 수행해야겠다.

오늘 꿈에도 축구공이 내 눈앞에 스치운다.

(민중서림 작문 교과서 24 쪽)


<서시>와 이 모방 시를 읽고 아이들도 글쓰기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많은 아이들의 숫자만큼 다양한 시들이 탄생했지요. 그 시에 등장하는 내용들은 학교 매점 이야기로부터 두발 단속 이야기까지 아이들의 삶 구석구석을 반영하는 다양한 내용들이었습니다.

아이들은 하나하나 발표할 때마다 온갖 재미있는 이야기에 웃기도 하고 진지하게 듣기도 하면서 즐거워했습니다. 발표하는 아이들의 시를 들으면서 그들의 사상과 감정이 어떤지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지에 대해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중 눈에 띄는 시를 쓴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시를 읽자 아이들은 '우와!' 하고 경탄을 금치 못했지요. 그 내용은 바로 대통령 탄핵에 대한 이야기였으니까요. 제가 수업을 하면서 탄핵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한 것도 아니고 또 그 아이가 특별히 정치에 관심이 많은 아이도 아니었습니다.

국회의원의 유도기합 소리에...

a 학생이 쓴 모방 시

학생이 쓴 모방 시 ⓒ 강지이

이 학생의 발표를 들은 다른 친구들은 훌륭하다고 박수를 치더군요. 그 학생이 발표를 끝내자 저는 어떻게 이런 소재로 글을 썼느냐고 물었습니다. 아이는 부끄러워하며 대답했습니다. 3월 12일 텔레비전 뉴스에서 국회의원들이 탄핵안을 날치기 통과시키는 것을 보고 한심한 생각이 들어 쓰게 되었다구요.

국회의원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국회의원들의 유도 기합 소리에
나는 괴로워했다.
모든 파리들을 싫어하는 마음으로
국회의원들을 미워해야지.
그리고 나는 커서
그렇게는 되지 말아야겠다.

지금 이 순간에도 유도 기합 소리가 스치운다.

- K 고등학교 학생의 모방 시


'국회의원들의 유도 기합 소리'에 괴로워하는 아이와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한 점 부끄럼이 없길' 바라는 마음. 겨우 17세의 학생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우리 정치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수업을 끝내고 나서도 '나는 커서 그렇게 되지 말아야겠다'는 시 구절이 머리 속을 맴돕니다. 국회의원들이 서로 몸싸움을 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대통령을 밀어내는 사회. 비록 그것을 가르치지 않더라도 아이들은 보고 느낍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꿈꾸는 사회는 그런 무리들이 판치지 못하는 세상이라고 주장합니다. 모든 어른들은 아이들이 작은 감시자가 되어 두 눈 뜨고 어른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 것일까요? 아니면 알면서도 자기들 멋대로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한전 '몰래 전봇대 150개', 드디어 뽑혔다 한전 '몰래 전봇대 150개', 드디어 뽑혔다
  2. 2 "전세 대출 원금, 집주인이 은행에 돌려주게 하자" "전세 대출 원금, 집주인이 은행에 돌려주게 하자"
  3. 3 단풍철 아닌데 붉게 변한 산... 전국서 벌어지는 소름돋는 일 단풍철 아닌데 붉게 변한 산... 전국서 벌어지는 소름돋는 일
  4. 4 결혼-육아로 경력단절, 배우 김금순의 시간은 이제 시작이다 결혼-육아로 경력단절, 배우 김금순의 시간은 이제 시작이다
  5. 5 늙음은 자전거 타는 친구가 줄어들고, 저녁 자리에도 술이 없다는 것 늙음은 자전거 타는 친구가 줄어들고, 저녁 자리에도 술이 없다는 것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