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닥다닥 붙어 앉아야 정도 생기제"

3평짜리 공간서 18년동안 학생들에게 정 나눠준 '미리내 할머니'

등록 2004.03.24 19:28수정 2004.03.26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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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건물과 건물사이에 지붕을 얹은 3평의 작은 이곳이 18년동안 할머니가 장사를 하고 있는 곳이다.

건물과 건물사이에 지붕을 얹은 3평의 작은 이곳이 18년동안 할머니가 장사를 하고 있는 곳이다. ⓒ 장성필

많은 별들이 모여 큰 강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 은하수이다. 은하수는 순 우리말로 미리내인데 '미리'는 용을 뜻하고 '내'는 시내를 뜻한다. 용이 살고 있는 큰 강이라는 뜻에서 우리 조상들은 은하수를 미리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런데 건물과 건물 사이에 지붕을 얹고 간판을 달아 그곳을 '미리내'라고 하는 곳이 있다. 18년 전 광주시 전남대학교 정문에 자리를 잡은 이 작고 초라한 분식집은 배고프고 주머니 가볍던 그 시절 대학생들의 끼니를 해결해주던 둘도 없이 소중한 공간이었다.

요즘은 신입생이 들어오면 장난 삼아 통과의례로 거쳐가는 명소 아닌 명소가 되었지만 처음 이곳에 문을 열 때만 해도 고학생들에게는 둘도 없는 소중한 공간이었던 셈이다.

미리내의 인테리어와 가격결정권은 전적으로 이곳을 찾는 학생들에게 있다. 한 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낙서판이다. 몇 월 몇 일 누구 왔다갔다는 사소한 것부터 연인들의 사랑을 과시하는 낯뜨거운 글귀까지도 서슴없이 적어놓은 것은 그만큼 이곳이 학생들에게는 편안한 곳이기 때문이다.

물론 종이를 사다가 걸어 놓는 것도 학생들이 직접 한다. 1998년 외환위기 때 다른 가게는 너나없이 가격을 올리고 있었지만 학생들의 가벼워진 주머니 사정을 알고 있는 할머니는 예전 가격을 고집했다.

a 학생들이 직접 사다가 만든 낙서판과 메뉴판. 이곳의 인테리어와 가격결정은 학생들의 몫이다.

학생들이 직접 사다가 만든 낙서판과 메뉴판. 이곳의 인테리어와 가격결정은 학생들의 몫이다. ⓒ 장성필

이를 보다못한 학생들이 손수 500원을 인상한 메뉴판을 만들어 가게에 붙여줬다고 한다. 지금도 그 때의 가격과 메뉴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니 할머니가 세상물정에 둔하신 건지 아니면 그 마음이 넓으신 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할머니가 고도의 경영마인드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다. 철저히 고객중심의 경영을 통해서 고객을 감동시키고 고객이 고객을 부르게 하는 적극적인 마케팅의 주체로 삼고 있으니 우리 기업들이 할머니의 경영마인드를 벤치마킹한다면 지금의 불황을 타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더 넓은 곳으로 옮길 생각은 없느냐는 말에 할머니는 "다닥다닥 붙어서 안거야(앉아야) 맛나고 정도 생기고 그런 것이제 머한다고 넓은디 안져서 묵어?"라고 도리어 나를 나무라신다.

"요새 아그들 여섯이만 안저도 여그 꽉차분디 처음에 장사할 적에는 열이가 안저도 넓었어"라며, 애들이 부쩍 커서 나오는 음식량도 많아지고 학생들이 불편해 할까봐 걱정은 되지만 그래도 서로 살 부대끼고 먹어야 제 맛이라는 할머니의 음식철학에 이내 수긍을 하고 말았다.


18년 동안 한 장소에서 장사를 한 덕에 옛날 그 맛을 잊지 못하고 처자식 데리고 일부러 먼 곳에서 와서 외식하는 사람도 있고 취직했다며 음료수를 사들고 온 여학생, 서울에서 출장 왔다가 옛날 생각나서 들렀다는 직장인도 있다면서 잊지 않고 찾아주는 학생들 때문에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버티고 계신단다.

깨끗이 비운 그릇을 손수 주방 앞에 놓아주는 학생들의 따뜻한 마음에 고마움을 느끼고 학생들은 싼 가격에 맛좋은 음식을 든든히 먹고 할머니의 정까지 덤으로 가져가니 일석이조의 훈훈함이 감도는 곳이다.

a 은하수에서 먹은 국밥은 할머니의 사랑과 정이었습니다.

은하수에서 먹은 국밥은 할머니의 사랑과 정이었습니다. ⓒ 장성필

국밥 한 그릇과 공기 하나를 추가해서 든든히 배를 채운 나는 설거지 중인 할머니에게 3000원을 건넸지만 "머한다고 이렇게 많이 준단가? 1000원 도로 가꼬 가소"하며 물묻은 손으로 다시 1000원을 내주신다. 미안한 마음에 다시 1000원을 할머니에게 되돌려 드리고 다시 호주머니로 들어오기를 수 차례…. 결국 할머니에게 진 나는 구겨진 1000원짜리를 호주머니에 넣고 가게문을 나왔다.

텔레비전을 통해서 연일 나오는 좋지 않은 소식들로 우리의 눈과 귀는 어느새 보지 말아야 할 것만을 보고, 듣지 말아야 할 것만을 듣는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20일) 촛불집회를 다녀오면서 피곤한 몸과 마음을, 18년간 학생들을 위해 한자리에서 정을 팔고 계시는 할머니 덕에 한방에 날려버리고 왔다. 넓디넓은 '은하수'에서 국밥 한 그릇은 세상 어디에서도 팔지 않는 미리내 할머니의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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