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대선 '클라크 폭로' 새로운 변수

"부시행정부, 9·11전 테러대비 못했다"... 언론, 부시에 비판 화살

등록 2004.03.26 16:42수정 2004.03.27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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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희생자들, 여기 방청석에 앉아 있는 분들, 지금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는 모든 분들, 여러분의 정부는 여러분을 지키는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을 보호할 책임을 맡은 사람들도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나 또한 그 일을 하는데 실패했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러분을 지키는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실이 드러났을 때, 나는 그 실패에 대해 여러분들의 이해와 용서를 구할 것입니다."

위는 지난 22일 <모든 적들에 대항해서(Against All Enemies)>라는 책을 통해 9·11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알 카에다의 테러 가능성을 경고했으나 부시 행정부가 이를 묵살했고, 결국 9·11이 일어나자 알 카에다보다는 이라크의 배후설을 조작해 엉뚱하게 이라크전을 일으켰다고 주장했던 리처드 클라크 전 안보 및 테러 보좌관이 24일(현지 시간) 청문회에서 증언 초두에 언급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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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부시 보좌관 "이라크 위기 조작됐다"


클라크의 '참회'에 환호와 흐느낌

리처드 클라크의 청문회 발언을 보도한 25일자 CNN인터넷판
리처드 클라크의 청문회 발언을 보도한 25일자 CNN인터넷판CNN인터넷판
24일 미 전국에 생중계된 가운데 열린 청문회에서 행한 리처드 클라크의 참회에 가까운 언급은 청문회장에 꽉 들어찬 9·11 희생자 가족들의 환호를 받았고 일부는 흐느끼기도 했다.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의 주요 언론들은 25일 전날 벌어진 청문회 소식을 1면 톱 또는 헤드라인 뉴스로 크게 보도하고 클라크의 '고백'을 (또 하나의) '스타 탄생'을 예고하게 한 감동적인(emotional) 언급이었다고 보도했다. 특히 보수적인 <워싱턴포스트>도 리처드 클라크의 위 언급을 '오늘의 어록'으로 직접 인용부호를 써서 따로 명기했다.

24일 청문회에서 테러리스트 공격에 대한 조사위원회 10명의 조사위원들 중 3명의 공화당 소속 조사위원들은 클라크가 <모든 적들에 대항해서>라는 책을 내게 된 동기가 민주당의 케리 후보로부터 장래에 어떤 고위직을 얻거나 '책장사'를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냐며 먼저 따져 물었다.

클라크 "케리가 어떤 직위 제안해도 사양"

정식 공화당원이기도 한 클라크는 이에 대해 한 수 가르치는 교사 같은 침착한 태도로 "선언컨대 나는 결코 케리가 어떤 직위를 제안해 온다 하더라도 사양할 것"이라고 이들의 의도적인 공격을 일축했다.

또한 공화당 조사위원들이 클라크가 지난해 3월 테러 보좌관직을 사임할 당시 부시 대통령의 9·11 테러 대처 능력을 칭찬하는 메모를 남기고는 이번에 발간된 책에서는 그와 상반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며 그의 '도덕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나섰다.

이에 클라크는 "나는 (레이건, 조지 H. 부시, 클린턴 등) 역대 행정부에서 일하면서 항상 지나간 정권들의 행적에 대해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면을 내세우도록 요청을 받았다"면서 '부시 칭찬' 메모가 지극히 관례적이었음을 주장하고 "이는 나의 '도덕성'에 대한 질문이 아니고 '정치적'인 질문"이라며 예봉을 피했다.

클라크의 이날 증언 중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부시행정부가 이라크에 대해 전쟁하려는 것에 지나치게 빠져 있었던 나머지 (자신이 9·11 일주일 전에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테러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지 못했다"고 한 주장이었다.


클라크는 이날 증언에서 9·11이 일어나기 일주일 전인 2001년 9월 4일 알 카에다를 주요 이슈로 다루는 작전명령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 작전명령에 "우리의 목표는 알 카에다를 제거하는 것"이라는 문구를 삽입할 것을 주장했으나 부시 행정부 관리들이 그의 제안을 "지나치게 욕심에 넘친 것"이라며 거절하고 대신에 목표를 "빈 라덴의 조직을 점차로 와해시키는 것"으로 바꿨으며, 결국 9·11이 터지고서야 그 작전명령의 목표를 "(빈 라덴을) 제거하기 위한 것"으로 바꿨다고 말했다.

클라크는 증언에서 9·11이 발생하기 전인 9월 4일 콘돌 리자 라이스 대통령 안보담당 보좌관에게 "정책입안자들은 한 테러리스트가 공격해 수백명이 국내와 해외에서 죽게 된다는 것을 상상해 보라"며 '예언적인' 편지를 보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최근 라이스 안보보좌관이 "(9·11전에) 부시가 알 카에다와 탈레반 리더십, 지상군과 기타 목표물에 대해 군사적인 공격을 감행하는 옵션을 가졌다"고 언급한 것에 대해 클라크는 '사실이 아니다'고 답했다.

CIA도 지난 주 조사위원회에 미리 제출된 보고서에서 '2001년 8월 6일에 테러리즘에 대한 집중적이고 세밀한 검토가 있었을 뿐 부시 대통령이 (알 카에다 공격 계획에 대한) 브리핑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그 브리핑은 CIA 내부에서 왔다'고 증언해 클라크의 앞선 주장을 뒷받침해 주었다.

"부시, 9·11 전 알 카에다 군사공격 조치 옵션 없었다"


특히 CIA와 클라크의 이같은 주장은 그동안 부시가 예상되는 알 카에다에 의한 국내 테러 위협에 대한 브리핑을 2001년 8월에 요구했다고 주장해온 것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어서 부시의 정직성에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클라크는 이 날 증언에서 클린턴 행정부는 테러리즘을 가장 긴급하고 우선적인 순위로 취급했으나 부시 행정부는 공격받기 전까지 그것을 긴급한 사안으로 다루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이번 조사 중 2001년 여름 대 테러 전문 베테랑 관리들이 알 카에다의 위협과 임박한 재앙에 대해 보고했고, 그들 중 한 사람은 사임한 후 일반 대중에게 그들의 우려를 알리는 방안을 고려하기도 했다는 증언도 나와 클라크의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했다.

이번 조사에서 조사위원들은 과거 클린턴 행정부 시절 클린턴이 빈 라덴을 암살하라는 비밀 지령을 CIA에 내렸으나 CIA 조지 테넷 국장과 관계자들은 당시의 명령을 빈 라덴의 확실한 생포를 시도하라는 것으로 해석했고, 생포 임무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을 경우에만 사살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밝혀냈다고 공개했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이미 빈 라덴 살해 계획이 있었음에도 '의사불소통(miscommunication)'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부시 임명 CIA 요원 정보 파악 능력 없어"

조사에서 CIA활동과 관련된 것 중 또 하나는 고위 CIA 관리들 중에는 부시에 의해 임명받은 일부 CIA 요원들이 테러리스트 위협에 대해 밀려드는 정보들을 파악하는데 익숙하지 못하다는 것과 신속 대응 능력에도 문제가 있다고 불만스러워 했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조사위원회 보고서는 여러 증거들에 의해 "부시행정부는 9·11 이전에 빈 라덴 조직에 대해 포괄적인 대책을 수립하지 못했다"면서 "새로운 행동을 추진하기보다는 긴 정책 토론에 몰두했고, 클린턴 행정부의 아이디어들을 비효과적이고 폭 좁은 아이디어들로 밀쳐 버리며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도 문제가 있다"고 발표했다.

첫째 날만 해도 비교적 공정한 자세를 유지해 오던 조사위원들은 이날 완전히 민주당 출신들과 공화당 출신이 팽팽하게 갈라져 신경전을 벌였으며, 공화당 출신 위원들은 클라크의 주장의 신뢰성과 도덕성을 공격했고, 민주당 출신 위원들은 클라크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기 위해 유도 심문을 이어갔다.

공화당은 만약 클라크에 의한 폭로가 사실로 받아들여진다면 부시의 재선을 위한 정치적 자산이 허물어지기 때문이며, 민주당은 아직은 부시의 선전도구로 쓰여지는 '강력한 리더십의 전시 대통령' 이미지를 일거에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클린턴-부시 행정부 양비론 속 부시행정부 책임론 화살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보스톤글로브> 등 미국의 주요 언론들의 25일치 인터넷 판을 분석해 보면, 이번 청문회를 통해 클린턴 행정부와 부시행정부 양 대에 걸쳐 고위관료들의 관료주의적 직무태만, 부처간의 의사 불소통, 즉각적 군사조치에 대한 주저, 고급정보의 확보 실패,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인한 알력, 정책과오 등이 9·11을 사전에 막지 못했다고 일차적으로는 양비론적 결론을 내리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제목이나 기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9·11이 부시행정부가 정권을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벌어졌고, 사건의 직접 당사자라는 점을 들어 위의 비판의 화살이 부시 정권쪽으로 확연히 쏠리고 있다. 특히 공화당이 이번 청문회 전에 터진 클라크의 폭로에 대응하는 태도가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인 '도둑 제발 저리기'식이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미국 언론들은 부시행정부가 클라크의 주장을 무조건 비판하기보다는 '사실(facts)'로 당당하게 대응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클라크는 자신의 책이 22일 미국 전역 서점가에 뿌려진 뒤 언론에 의해 곧바로 쏟아진 사실여부 질문에 '모두가 사실이며, 치우침이 없다'(factual, not polemic)고 답한 바 있고 이번 청문회를 통해 사실이 상당부분 확인됐다.

특히 이번 청문회에서 뚜렷하게 확인된 것은 비교적 하위 레벨에 있는 안보관련 실무자들이 9·11 훨씬 전부터 알 카에다의 공격을 경고해 왔으며, 부시 행정부가 클린턴 행정부 당시 안보 관련 정보들을 우습게 여겼다는 것이 확인됨에 따라 클라크의 폭로가 크게 설득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현재 청문회 최대 승자는 리처드 클라크"

때문에 이틀간에 펼쳐진 이번 청문회의 최대 승자로 클라크를 꼽을 수밖에 없다. 이날 열린 청문회에서 조사위원인 밥 케리 전 상원의원(민주당·네브라스카)는 클라크에게 "당신이 오늘 말한 모든 것은 당신의 주장의 일관성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다"면서 클라크의 증언에 신뢰감을 표시하고 "아마도 당신은 오늘부터 엄청난 전화공세와 이메일을 받게 될 것"이라고 클라크를 '스타'로 추켜세웠다.

민주당은 뜻하지 않게 맞은 '살아있는 호재'에 들떠 있는 분위기다. 클라크의 증언이 '성공적'으로 치러지자 존 케리 진영은 발빠르게 주요 신문의 인터넷판 청문회 기사 중간 중간 눈에 잘 띄는 곳에 '20달러를 케리에게'라는 플래시 광고를 통해 모금운동을 벌이고 있다.

클라크의 책은 서점에 나온 지 하루만에 베스트 셀러에 오르는 등 현재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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