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구 꼴통과 마주선 당신을 위해

후베르트 슐라이허르트 지음 <꼴통들과 뚜껑 안 열리고 토론하는 법>

등록 2004.03.29 15:14수정 2004.04.08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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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적으로 생각해보지요. 당신과 나의 원칙이 다르고 전제가 달라서 당연히 해석과 주장도 달라지는데 토론을 해서 합의에 이를만한 것이 있을까요. 이 책의 지은이는 그런 토론이라면 얻을 것이 매우 적거나 아니면 아예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더군요. 그런데도 이런 제목의 책을 펴낸 이유는 무엇일까요. 궁금해서 죽을 지경입니다.


토론해봤자 이렇다 할 결론이 없을 게 뻔해서 가슴이 허해지는 기분은 근자의 탄핵 정국을 둘러싸고 TV 토론하는 광경을 시청할 때에 극에 달했었지요. 평행선도 이렇게 반듯한 경우가 드물다 싶더군요. 탄핵 사유가 안 될 뿐 아니라 정권 찬탈의 마지막 발악이라고 사태를 간파한 사람과 탄핵 사유가 충분히 되며 적법한 절차에 따랐을 뿐이라고 우기는 사람은 아무리 열린 마음으로 마주본다 한들 상대의 목소리를 수용할 리가 없지요.

어떻게 하지요. 토론을 때려치우고 처음부터 상호 비방과 폭로전에 매달려야 할까요. 개 닭 보듯 무심해져야 할까요. 아예 미친 놈 취급하고 상대하지 않는 편이 상책일까요.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저거 또라이 아닌가', '완전히 싸이코잖아', '아이큐가 한 자리수 아니야' 등등. 하지만 지은이는 냉정하게 말합니다.

"광신도와 대결할 때는 언제나 지적이고 일관성 있게 생각하는 사람과 상대하고 있다고, 그들의 행동은 결코 '비합리적', '비이성적'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꼴통이 꼴통인 이유는 막무가내여서가 아니라 그가 나와는 다른 근본과 상식을 고수하기 때문이라는 소리이지요. 따라서 만약 당신이 꼴통과 토론해서 아성을 무너뜨리고자 한다면 꼴통의 주장을 꼴통의 합리대로 철저하게 인식해야 한답니다. 이 책은 그 방면의 노하우에 대해 쓸모 있는 방책들을 제법 많이 귀띔해 주지요.

지은이가 꼽는 꼴통들의 대표적인 12가지 논거 중에서 5가지 정도만 인용해보지요. 작금의 '한민당' 정객들이 쏟아놓는 다음과 같은 말들과 비교해서 생각하시면 이해가 빠를 것 같군요. 당신이라면 어떻게 공박하실런지요. 그런 궁리를 하면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수구 꼴통의 논리라도 말만 들어서는 일단 그럴 듯한 꼴을 갖추고 있거든요.


2번째 논거 : "무지한 중생을 지켜줄 사람이 있어야지"

"국민에게는 '바보될 권리'가 있는데, 지난 대선 때 국민이 권리를 정말 잘못 행사했다. 한나라당이 대통령이 안 된다면, 하다 못해 정몽준으로 단일화됐으면 이런 꼴은 안됐다."



홍사덕 한나라당 의원의 말인데요, 촛불 집회 참가자를 '이태백'으로 비하한 유명한 발언과 함께 국민을 몽매한 양떼로 낮추고 자신을 목자로 높이는 논리지요.

5번째 논거 : "박해받은 자에게 축복 있으라"

"나는 오는 주말 광화문 촛불시위 현장에 나가서 한나라당 대표로서 하고 싶은 말을 하겠다. 만약에 내가 돌팔매에 쓰러지거든 홍사덕을 업고 총선을 돌파해 달라."


역시 홍사덕 의원 말이지요. 홍사덕 의원의 어록이 보여주는 특징은 표적을 자처하여 반대표를 결집하려는 노골적인 과시욕에 있지요.

7번째 논거 : "피장파장이네 뭐"

"김영일 전 한나라당 사무총장이 구속됐는데, 이상수 전 민주당 총무본부장 등도 구속되는 게 마땅한 도리 아니냐."


최병렬 한나라당 전 대표의 말이지요. 대선 불법 자금이 터져나올 때마다 줄기차게 써먹은 물타기 수법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1/10 발언에 대한 차떼기당의 대표적인 응수 전략이었지요. 소나타나 티코나 뭐가 다르냐는 소리입니다.

9번째 논거 : "순교자라구? 그 양반 속내를 알아?"

"당이 어려울 때는 자기 희생을 생각해야지, 자기가 국민의 지탄을 받을 대상이 됐다 하더라도, 자신의 잘못을 얘기하고 사죄할 생각을 해야지, 나는 아니다면서 빠져나가는 것은 옳지 않죠."


정균환 민주당 의원의 말입니다. 탄핵 정국에 잘못 임한 지도부 총사퇴를 주장하는 설훈 의원의 삭발식을 두고 자기만 살겠다는 비겁한 속셈이라며 폭로하는 거지요.

10번째 논거 : "저들의 몰지각한 딴지에 저주를 내리소서"

"가세가 기울어서 나이 70먹은 아버지가 밖에 나가서 돈벌이하는데 장성한 아들들은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돈벌이가 잘 안 된다, 그런 돈벌이하면 안 된다, 이것 해라, 저것 해라, 그런 격이 아닌가 한다."


당내 개혁 요구에 대해 조순형 민주당 대표가 쏟아놓은 분노의 말인데요, 말끝마다 출당과 같은 응분의 조치를 취하겠다는 경고도 빠뜨리지 않았지요.


저는 일부러 그나마 점잖은 축에 속하는 말들을 가려 뽑은 거랍니다. 염장 지르는 말을 인용해서 같이 흥분해봐야 갈피만 못 잡고 헤맬 수 있으니까요. 당신이 TV 토론 프로그램에 나가 상대해야 하는 수구 꼴통의 주장들이 대개는 이런 꼴을 갖추고 있다고 짐작하시면 맞을 것 같네요. 자 그럼 이제 어떻게 대응하시겠습니까.

이 대목에서 지은이는 또 한번 충고를 하네요. 행여라도 꼴통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반박하는 방법은 택하지 말라고요. 유럽 역사에 잔혹한 광란의 흔적을 남겼던 종교 재판과 마녀 사냥의 무수한 꼴통짓 사례를 들면서 당시의 숱한 반론들이 내재적 논증에 머물러 자초했던 자기 함정이 무엇인지, 이 책은 구구절절 방대한 자료를 들춰내고 있지요. 대신 지은이는 '뒤엎는 논증'을 하라고, 그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권고합니다.

"이데올로기는 반박되거나 패배 당하는 것이 아니라 추레해지고, 무시되고, 따분하고 지겨운 것이 되고, 그래서 잊혀지는 것이다."

몇 해 전의 일일 겁니다. TV 토론 프로그램에서 동성동본 금혼에 관한 열띤 공방이 있었지요. 법을 개정해서 금혼의 범위를 합리적으로 축소하자는 논리적이고 차분한 근거 제시에 대해 반대 입장에 있던 어느 분이 불쑥 한 마디를 꺼냈지요. "어디 사람이 짐승도 아닌데…" 일순간 출연자와 스튜디오 객석은 썰렁해지고 더러는 울분을 삭이느라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변하더군요.

당신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지은이는 관용과 웃음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면 단연 웃음을 구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비아냥대거나 과장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가볍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웃어 넘겨야 한다는 거지요. "어디 사람이 짐승도 아닌데…" 같은 얼토당토않은 비유의 덫에 비명을 지르지 말고 웃음으로 물리치라는 것이지요. 이 정도만 되어도 시청자들은 상황 파악과 가치 판단을 충분히 하고도 남으니까요.

"해방적 웃음, 어떤 이데올로기나 종교에 대한 궁극적 무관심의 바로 전 단계인 이 웃음은 물론 기나긴 발전이 이루어지고 난 후에나 나오는 것이다."

상대가 웃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수구 꼴통 앞에서 그의 주장을 듣고 평화롭게 웃는 사람은 '나는 당신을 겁내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되돌려주는 것이지요. 이런 웃음이라면 상대를 읽을 줄 아는 내공을 길러야만 가능하겠지요. 멋쩍은 면피용 웃음이나 경멸하는 냉소와는 다른 표정이어야 하니까요.

제 식대로 표현하면 '땀 뻘뻘 흘리면서 애써 공략하지 말고 상대가 본색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도록 낙후시켜라' 정도쯤 될 것 같네요. 궁금하시지요. '뒤엎기 논증'과 '해방적 웃음 전략'이 무엇인지, 이 책을 정독하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아울러 우리 모두 수구 꼴통이 되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을 갈고 닦고 꾸준히 정진하도록 노력합시다.

꼴통들과 뚜껑 안 열리고 토론하는 법

후베르트 슐라이허르트 지음, 최훈 옮김,
뿌리와이파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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