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64

등록 2004.04.02 10:13수정 2004.04.02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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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색이 제후라면서, 그 자발없는 성격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는 그래봐야 소호 국 제후였다. 제후 주제에, 본국에서 마음먹고 내준 장군 앞에서 그렇게 감정대로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1천의 군사만으로도 빼앗긴 땅덩이를 찾아주지 않았는가 말이다. 한데도 이처럼 작은 일을 가지고 트집을 잡는다면 그것은 에인이 나이가 어리다고 깔본다는 증거다.


강 장수가 거듭해서 '어쩔거냐'고 물으려는 참에 뜻밖에도 에인이 먼저 중재하고 나섰다.

"자, 이제 그만들 하시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지 그 방도나 서로 의논해봅시다."

잔뜩 굳어 있던 제후의 얼굴이 에인의 그 한마디에 또 활짝 펴졌다. 그에겐 확실히 에인이 편했다. 장수들은 이미 자기 고집대로 굳어버렸지만 에인의 사고방식은 유연하고 부드러웠다. 전에는 그런 점들이 걱정이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어떤 가능성처럼 푸근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제후는 금방 힘을 얻고 자기 흉중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자꾸 같은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만, 사실 당장 큰 부담이 군사들의 입입니다. 아국 군사야 몇 안 되지만 형제국 군사는 그 입이 천입니다. 더욱이 지금은 겨울입니다. 곡물을 사들이자면 남쪽으로 며칠을 가야하고 그렇다 해도 한꺼번에 많은 분량의 식량은 사들일 처지도 못됩니다."

"진작 그렇게 말씀 하시지 그랬습니까?"
에인이 말해놓고 그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제후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에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좋습니다. 그러면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형제국 군사들을 먼저 철수시킨다면, 그 다음 우리 아군의 입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까 말씀하셨듯이 아군군사들이 가옥을 보수한다면 그동안의 식량을 어떻게든 조달할 수 있습니다."
"그럼 요청하신대로 내일 당장 형제국 군사들을 철수시키겠습니다."

에인이 흔쾌히 대답했다. 그러자 제후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럼 귀환군사들을 위해 저는 어떻게 대처하면 됩니까?"


강 장수는 그렇게 즉시 태도를 바꾸는 제후가 징그러웠고 그 간교에 휘둘리는 에인이가 딱했다. 그럼에도 에인은 순순히 대답했다.

"가는 동안의 식량만 준비해 주십시오."
"그러지요. 살아 있는 양들이 3백 수쯤 된다는데 얼마나 실어주면 될까요?"
"그건 강 장수와 따로 이야기 하십시오."

제후의 얼굴은 앓는 이를 뽑은 듯이 개운해졌다. 에인이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불쑥 물어보았다.

"그럼 이제 제가 물어보겠습니다만, 우리 군사들이 가옥수리를 끝낸다면 그 뒤는 어떻게 됩니까?"
"그것까지는 아직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일이 끝나면 우리도 곧 귀환할 수 있습니까?"
"그 일은 차차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일의 진척을 보아가면서 다시 얘기해도 늦지 않지요."

에인은 사실 형제국 군사들만이 아닌 자신들도 철수하고 싶었다. 제후가 들어와 투덜거릴 때 당장 그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명령을 기다리는 중이었고, 그 전령이 돌아오지 않는 한 함부로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그로서는 처음으로 치르고 또 가져본 승리였다. 그럼에도 그 기쁨은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뒤이어 찾아온 것은 깊은 혐오감뿐이었고 그래서 어서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을 뿐이었다. 한데 제후는 말 꼬리 하나를 또다시 감추었고 그것을 보이기 싫어 얼른 피하려고만 했다.

"자,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제후는 정말 이제 어서 빨리 그 자리를 뜨고 싶었다. 에인이 자기도 지금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겠다고 나온다면 그건 곤란한 일이었다. 지금 딜문의 급선무는 마을을 다시 일으키는 것이다.

만약 군사들이 모두 떠난다면, 이웃부족들이 그 사실을 안다면 당장 쳐들어올지도 몰랐다. 당장은 아니라 해도 주민들이 합심해서 한창 마을을 건설하는 도중에도 침략해올 수가 있었다. 두 번 다시 그런 사태를 겪지 않기 위해서라도 군사주둔은 필수적이다. 마을이 단단해질 때까지 에인이 군부대는 여기 있어야 한다. 더욱이 에인의 군사들은 근동에서는 가장 무서워하는 기마병들이 아닌가.

제후가 그런 생각에 쫓겨 허둥지둥 돌아설 때 에인이 그의 등에 대고 말했다.

"오늘부터 포로들은 딜문 사람들이 맡으십시오. 감옥을 지키던 우리 군사들이 말을 알아듣지 못해 곤란한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지요."

제후는 얼른 대답하고 그 방에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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