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65

등록 2004.04.07 14:48수정 2004.04.07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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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후 포로들의 인수인계가 있었다. 제후가 에인의 군사들로부터 그 소관을 인계받은 것이었다.

그날 밤이었다. 제후와 그의 주민들은 포로들을 한사람, 한사람 꼭꼭 묶었다. 적장 이외에도 3백여명이었다. 에인의 군사들이 모두 잠자리로 돌아간 사이 그들은 그 포로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포로들이 끌려간 곳은 강이었다. 마을과 좀 떨어진 하구였다. 강이 깊고 물살이 센 곳 바위 위에 먼저 적장이 세워졌다. 두 팔과 입에 재갈이 물린 적장은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 누군가가 적장의 목을 쳤다. 목이 먼저 철벅 소리를 내며 강 속으로 떨어졌다. 이상하게도 몸은 그대로 서 있었다. 옆에 있던 주민이 발로 적장의 몸뚱이를 차냈다. 비로소 적장의 몸뚱이도 그의 머리를 따라 강물에 쓸려갔다.

다음은 적장의 사병들이 차례로 목이 베어졌다. 나머지 포로들은 긴 창으로 심장 쪽의 뒷등을 깊이 찌른 후 강물에 떠밀려졌다. 단 한사람의 여자만 남기고 포로들은 전부 그렇게 죽었다.

딜문 사람들은 한참 동안 강가에 서 있었다. 아무도 살아서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모든 시신들이 강물을 따라 잘 떠내려 간 것이었다. 제후가 들고 있던 횃불을 마지막으로 그 강에 던졌다.

사람들의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딜문 주민들은 한 여자를 풀어주었다. 단 한사람 남아 있던 그 포로였다. 그녀는 큰 자부 강 하류, 님루드에서 좀 늦은 시간 양떼를 몰고 오다가 보쌈을 당했고, 그리하여 족장의 네번째 부인이 될 뻔한 그 처녀였다.


처녀는 강에서 돌아섰다. 그리고 늪지대로 해서 멀어져 갔다. 겨울에는 뱀이 없으므로 그렇게 가도 위험하진 않을 테고 하루나 이틀쯤 걸어가면 자기 집에 도착할 것이었다.

제후가 포로들을 그렇게 서둘러 처리한 것은 분노 때문이 아니었다. 분노는 어느 순간엔가 사라져 버리고 그 자리에 새롭고 강하게 들어선 것은 경제였다. 따라서 그는 오늘 자신이 내린 결단에 매우 만족했고 그 학살은 자기가 취할 수 있는 가장 경제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첫째로는 시체를 치우는 번거로움을 줄였고 또 당장 3백명분의 식량이 절약되는 것이었다. 그간 포로들에게 하루 한끼를 주었다 해도 그 입은 큰 법이다.

전에 그는 경제를 알지 못했다. 모든 것이 그 자리에 있거나 주어졌고 자신은 그것을 향유만 하면 되었다. 마을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거야 아버지를 비롯한 장로회에서 알아서 처리해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장로회도 없고 민회를 담당하던 청년들도 얼마나 돌아올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되었다. 영토를 빼앗겼던 제후로서의 오명도 자신이 씻어야 할 일이었다.

'그래, 평화를 지켜주는 것은 경제와 군사력이다. 그런데….'

그는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 때문이었다.

'군사력만 있으면…. 그렇다면 형제국 군사들을 돌려보낼 것이 아니라 다른데 이용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니야, 그러자면 유지비가 있어야 한다. 더욱이 지금으로서는 어느 수장국이 부유한지, 침략해서는 얼마나 건질 수 있는지 알 수도 없다. 좋은 계획도 가진 것만큼 행해야 얻을 수 있는 법이다. 그래, 지금은 모든 것이 역부족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뇌리에는 '군사'에 대한 생각들이 떠나지 않았다.

'경제만으로는 평화가 유지되지 않는다. 군사력 없는 부는 오히려 침략자의 구미만 돋울 뿐이다. 둘 다 지킬 수 있는 길은 역시 군사력뿐이다.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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