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66

등록 2004.04.08 16:12수정 2004.04.08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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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장수가 형제국 군사들을 이끌고 먼저 돌아간 이후부터 에인은 향수병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 병은 지독해서 의욕과 식욕마저 뺏어갔다. 그는 모든 업무를 은 장수에게 맡기고 날마다 강가에 나갔다.


강에 우두커니 앉아 일몰을 지켜보면서 전에 신용을 기다렸듯이 이젠 소호국의 산천을 기다렸다. 해가 고향산천을 그림자로 옮겨와 그 하늘에 펼쳐줄 것 같았다.
그러나 해는, 붉게 치장한 그 둥근 해는 황하도, 교화방 동무들도,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들 얼굴도 보여주지 않았다.

오늘도 해는 쓸쓸히 져가고 있었다. 그는 슬펐다. 요즘 들어 자꾸만 그렇게 슬펐고 그 슬픔이 마치 그의 온 넋을 푸르게 푸르게 멍을 들이는 것 같았다. 가슴 저리도록 느꼈던 슬픔, 울음산에서 처음으로 껴안았던 그 슬픔이 불현듯 다시 찾아온 것이었다.

그때는 그 기분이 익숙하지 않아서, 이상하고 어색해서 곧 잊었는데 다시 찾아온 이후로는 아주 친숙한 벗인 양 그의 곁을 따나려 하지 않았다.

그가 만약 두개의 넋을 가졌다면, 환족의 천자들이 그래왔듯이 그것이 반신반인(半神半人)인 것이라면 슬픔은 반인, 인간의 몫일 것이었고 그는 지금 반쪽, 그 인간을 채우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리하여 그는 이제 해를 보면서도 신용이나 오룡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부모와 형제, 동무, 고향산천을 찾고 있었다.

사실 그는 인간의 감정을 잘 몰랐다. 그 울음산을 지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때까지 그는 온통 천계의 일에만 관심을 쏟았고 그래서 보통 사람이 보아도 뭔가 달랐으며 그의 얼굴 테두리에는 항상 후광이 감돌았다.


그러나 울음산에서, 슬픔이 가슴이 아리도록 젖어온 이후로는 그의 생각과 관심은 인간에게만 쏠렸고 그 얼굴도 인간을 닮아가고 있었다. 반신반인이 그의 숙명이라면, 나이 열아홉 살에, 다른 사람보다 좀 늦게 인간의 감성이 채워졌고 그럼으로 이제야 그는 자기 숙명으로 완성되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슬픔은 너무도 쓰라렸고 그리움은 또 너무 깊었다. 그는 점점 수척해갔고 마침내는 식사조차 할 수가 없었다. 기억력도 희미해져 주변 사람들마저 까맣게 잊어갔다. 그가 오직 잊지 않고 되풀이하는 것은 해만 뜨면 강으로 걸어 나가 하염없이 해만 바라보는 일이었다.


해가 져갔고 바람이 해의 얼굴을 쓸쓸하게 빗기고 있었다. 오늘도 해는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강바닥에 드러누웠다. 이제는 처소로도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이대로 강변에 누워 뜨는 해와 지는 해만 보고 싶었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와 그의 옆에 조용히 앉았다. 책임선인이었다.
"장군님…."
날이 저물어가고 있으니 분명히 마을로 돌아가자고 할 것이었다. 에인이 눈을 감으며 말했다.

"마을로 가자고 하실 참이면 혼자 돌아가시오. 난 오늘 여기에 머물 것이오."
"그게 아닙니다, 장군님. 천둥이를 보십시오."
"천둥이가 어쨌단 말이오? 녀석이 달아나기라도 했단 말이오?"
"아, 장군님, 천둥이가 저기 누워 있지 않습니까?"

에인이 고개를 돌려보자 천둥이는 50보쯤 떨어진 곳에서 그 큰 몸을 뉘이고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책임선인이 말했다.

"장군님은 아시는지요. 천둥이는 언제나 장군님만 따라다녔습니다. 장군님이 앉으시면 자기도 앉고 누우시면 자기도 저렇게 누워서 오직 장군님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내버려두시오. 녀석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뿐이오."

"천둥이는 지금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둥이도 지금…."
"……."
"장군님처럼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있습니다. 벌써 사흘째입니다. 장군님이 진지를 드시지 않은 이후부터 여물엔 입도 대지 않습니다. 이러다간 우리는 장군님도 천둥이도 다 잃게 생겼습니다."

에인은 벌떡 등을 일으켰다. 그리고 말의 눈을 바라보았다. 천둥이는 기운이 다 소진했는지 얼굴까지 바닥에 뉘였고 그러면서도 하염없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널 죽일 뻔했구나, 널…."
에인은 몸을 일으키고 천둥이한테로 다가갔다. 녀석도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는 녀석의 머리를 왈칵 껴안고 얼굴을 비볐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너를 생각지 못한 나를 용서해다오."
천둥이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어쩌면 안도의 이슬이 그렇게 망막을 씻어내는지도 몰랐다. 그는 녀석의 귀를 들어올리고 거기에 대고 말했다.

"천둥아, 우리 어서 가자꾸나. 나도 몹시 배가 고프다."
그 말을 듣고 천둥이는 벌떡 일어났다. 그러다가 다시 반쯤 주저앉았다. 책임선인은 깜짝 놀랐다. 천둥이가 기운을 잃고 마침내 쓰러지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에인은 태연하게 말하고 있었다.

"아니야, 내가 널 탈 수는 없지. 우리 나란히 걸어 가자꾸나."
천둥이는 자기가 서 있으면 기운이 없는 에인이가 자기에게 뛰어오를 수 없을 것 같아 그렇게 등을 구부려준 것이었다. 기력을 잃은 것은 피차 마찬가지였을 텐데도 천둥이는 그랬다.

천둥이에게 에인은 주인이 아닌 친구였다. 둘 다 막 청년기로 접어든 데다 그래서 더욱더 서로를 잘 이해하는 그런 친구였다. 천둥이는 여태 에인과 같은 주인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에인은 자기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모두 다 꿰뚫어보고 그것을 활용하거나 나눌 줄 알았다.

지금 에인은 천둥이의 배를 쓸쓸 쓰다듬으며 걷고 있었다. 이제 에인이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천둥이는 알아차렸고 에인 역시 똑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천둥아, 우리 기운을 차리면 이제 그 연습을 하자꾸나. 내가 너의 배에 들러붙는 법 말이다. 그러고도 넌 얼마나 달릴 수 있는지 나에게 보여다오."

마을이 가까워졌다. 뒤를 따르던 책임선인은 혼자 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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