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양심'이라는 단어를 접할 적마다 선친을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 '도둑'이라는 단어를 접할 때도 선친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내 선친은 어찌 보면 사회의 낙오자였다. 평생을 가난 속에서 가난을 고수하며 산 분이었다. 여기에서의 '가난'이란 빈곤이나 궁핍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욕심'이 없는 상태, 그리스도교의 성서에서 접하게 되는 그런 가난을 말하는 것이다.
그 가난 속에는 양심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나는 아버지의 가난 속에서 양심의 실체를 볼 수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그때 우리 집은 조악한 형태의 곡물업을 하고 있었다. 전주(錢主)로부터 돈을 얻어다가 촌락의 농가들을 다니며 미리 곡물 값을 깔고 약정한 날에 벼나 보리를 받아 정미소로 운반해서 도정을 해 가지고 전주에게 넘기는 식의 장사였다.
남의 돈으로 하는 장사이니 이윤은 항시 박할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전주로부터 야박한 소리나 폭언도 들어야 했다. 우리 어머니와 동갑이며 과부인 '상짜'라는 이름의 전주는 부모님의 왕이요, 상전이었다.
하루는 또 한번의 벼 도정 작업을 끝내고 상차(上車)까지 마친 후 정미소의 사랑방에서 상짜와 아버지가 마주앉아 계산을 하는 모습을 방문 앞에서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먼저 어버지와 상짜는 치부책에 적혀 있는, 그들 사이에 여러 차례 오고간 금액을 서로 맞춰봤다. 상짜가 우선 자기 치부책에 적혀 있는 사항들을 불렀다. "몇 월 며칠에 얼마"하는 식으로…. 그리고는 아버지의 치부책은 보려고도 하지 않고 자기 치부책을 덮어버렸다.
이제 아버지가 "맞다"고 하면서 계산을 끝내면 그만일 상황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연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아주머니의 치부책에 하나가 빠진 것 같유."
"그류?"
"내 치부책이는 이 달 초이튿날 2만원이 온 게 적혀 있는디, 아주머니 치부책이는 그게 안 적힌 것 같유."
"그류이잉?"
상짜는 얼른 자기 치부책을 다시 펴보더니, "그러네유. 이 달 초이튿날 2만원 간 게 빠져 있네유. 큰일날 뻔했구먼"하고는 방바닥의 계산지에다가 2만원을 새로 적어 넣었다.
1960년대 중반의 2만원이 지금의 화폐 가치로는 어느 정도의 돈일지 확실하게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당시 2만원이면 적지 않은 돈이었다. 내가 1970년 월남에 갔을 때 병장이 받는 한 달 전투 수당이 54달러, 우리 돈으로 1만5천 원 정도였으니까…. 내가 월남에서 벌어온 20여만원의 돈으로 내 누님이 혼수를 장만해서 시집을 갈 수 있었으니까….
하여간 나는 그 날 아버지의 그런 처신을 보면서 어금니를 악물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못나 보일 수가 없었다. "저런 바보 같은!"이라는 소리가 내 입안에 꽉 차서 목구멍까지 아리게 했다.
정미소에서의 모든 일을 마치고 저녁 무렵 집으로 돌아가던 신작로에서 나는 아버지께 볼멘 소리를 했다.
"워째 그러셨대유?"
"뭘?"
"아버지가 그 이만원 발러준 것 말유. 그냥 물르는 척 넘어갔으면 그 상짜 여편네두 생전 몰를 텐디…."
"여편네라니?"
"암튼유"
"상짜 아주머니를 쇠길 수는 있어두, 하느님은 뭇 쇠기는 겨."
"하느님유?"
"그려."
"하느님을 뭇 쇠기면유?"
"지옥 가지."
"지옥유?"
"그려. 내가 단돈 이만원 때미 지옥 가면 되겄냐?"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부터 하늘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하느님은 뭇 쇠기는 겨"하면서 하늘을 쳐다보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후로도 종종 하늘을 쳐다보곤 했고, 그것은 거의 버릇이 되기까지 했다. 양심이라는 단어를 접할 때마다 하늘을 쳐다보게 되는 것은 거의 자동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이 세상에 삶의 목적을 두고 있지 않음을 아주 일찌감치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는 참으로 마음 깊이 '하느님의 나라'를 소망했고, 그리고 참으로 가난하게 이 세상을 사신 것이었다.
한때 당신의 무능과 가난도 죄가 될지 모른다는 말씀을 술회하신 적도 있긴 하지만, 극심한 병고 중에서도 마침내는 참으로 편안하게 삶을 마치실 수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깊이 소망했던 하느님의 나라가 아버지에게는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나를 생각하곤 한다. 아버지의 그것을 깊이 이해하고, 아버지의 삶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살아 있는 내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자주 '위령미사'를 봉헌하는 일임을 잘 알고 있다. 아버지의 영혼이 하느님의 품안에 안기도록 자주 '연미사'를 봉헌하곤 한다.
나는 내 자식들도 내 아버지 식으로 가르친다. 양심을 가르치고, 하느님을 알게 하고, 가난의 미덕을 가르치려고 애를 쓴다.
그것이 비록 현실적으로는 무가치하고, 출세에는 오히려 장애가 될지라도, 나는 내 자식들이 정의에 눈멀지 않고 바르고 착하게 살기를 바란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님을 깊이 알고, 현세의 욕망에 지나치게 경도되지 말며, 나그네의 마음으로 겸허하게 살게 되기를 소망한다.
많은 천주교 신자 부모들이 공부 손해를 우려하여 자녀들을 성당에도 잘 보내지 않고 있는 현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는 공부보다도 하느님이 더 중요함을 아이들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하느님의 자리까지 온통 공부로만 채우게 하면서 아이들을 기르고 싶지는 않다.
아이들을 그렇게 기른 성과로 훗날 나 죽은 후에 내 아이들이 아비를 위해 기도를 하고 미사 봉헌을 하며 산다면, 내 이승에서의 삶 또한 보람으로 승화될 것이다. 나는 신앙인으로서 그런 식의 '성공'을 거두고 싶다.
내 아버지처럼….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