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가는 이 땅의 모든 남자들에게

[태우의 뷰파인더 14] 시간을 버티고 무사히 돌아오시길

등록 2004.04.07 10:54수정 2004.04.07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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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여름, 나는 군대에 갔다. 50년 만에 찾아왔다는 폭염으로 연일 최고 온도의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었다. 또한 김일성의 사망으로 국방에 더욱 만전을 기해야 한다는 뉴스가 보도되던 시절이었다.


이미 그때부터 ‘신의 아들’, ‘장군의 아들’ 같은 병역비리가 무성했기 때문에 군대에 간다는 것이 무척이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이발관의 거울을 통해 무더기로 짤려 나간 내 머리칼을 보면서, 이왕 가야 하는 거라면 당당하게 갔다 오자고 애써 나를 다독였다.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병 생활을 마치고, ‘자랑스러운’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이등병 계급장을 달던 순간의 뿌듯함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이름도, 계급도 없이 그저 ‘나열된 숫자로 불려지던 훈련병 시절’이 끝나고, 드디어 군인이 된 실로 감격스러운 날이었던 것이다.

본격적인 군 생활을 보낼 부대에 도착한 날은 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이었는데,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이등병 계급장이 ‘조금도 자랑할 만한 계급이 아니라는 걸’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고참들이 무더기로 도착한 나와 동기들을 향해 ‘추석 선물 세트’라며 기뻐했으니까. 2년 여에 걸친 군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김태우
군대에서는 누구나 알고 있는, ‘시간과 관련된 우스개’가 있다.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매달아 놓아도 흘러간다”는 이 말은 군 생활이 힘들고 적막하게 느껴질 때 주로 회자된다.

아무리 지금 이 순간이 힘들고 어렵다고 하더라도 시간은 흐르고 있으며, 제대 날짜가 다가오고 있으니, 희망을 가지라는 뜻이 이 우스개에 담겨있는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건데, 나는 ‘군대라는 집단’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국방의 의무라는 확실한 대의명분이 있긴 했지만, 인권은 무시되기 일쑤였고, 월급이라고 손에 쥐어지는 돈은 ‘차라리 한푼도 주지 말지’라는 원망을 품게 만들 정도의 초라한 금액이었다.

군대 내에서도 민주화의 열풍이 불어, 사병들 사이의 구타와 기합은 점점 줄었다. 과도기에 놓인 군대는 혼란스러웠다. 군 생활을 하고 나면 ‘진짜 남자가 된다’ 혹은 ‘철이 든다’는 말은 내 경험에 비춰보면 그저 우스운 농담이었다.


저돌적인 마초가 인정을 받는 군대 내의 분위기는 인간의 개성과 사고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없었다. 상병하복의 체계에 순응하고, 이성적인 행동을 마비시킨 채 그저 명령에 열심히 순응하는 인간만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군 생활을 하며 시간의 속성에 대해 절실히 느꼈다. 수첩에 제대 날짜가 며칠 남았는지 하루, 하루가 지날 때마다 세는 짓은 하지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제대의 그 날이 오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하긴 어떤 병사인들 집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지 않겠는가.

하지만 도무지 올 것 같지 않은 제대의 막막함 때문에 불안했다. 분명 같은 템포로 움직이고 있는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시간이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휴가를 나가면 친구들은 “너, 또 휴가 나왔냐?”며 속도 몰라줬고, 상병을 달았다고 하면 절반이나 남아있는 군 생활을 두고 “야, 이제 다 했네”라며 염장을 질렀다.

조금씩 군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고, ‘시간을 견디는 법’을 알게 되었다. 이등병에서 일병으로, 일병에서 상병으로, 상병에서 병장으로 진급을 했고, 마침내 말년 휴가까지 다녀왔다. 그런데도 제대를 한다는 사실이 실감되지 않았다. 정말 내가 다시 민간인이 될 수 있을까.

김태우
제대하기 전 날밤에 꾸는 가장 무서운 악몽에 대한 우스개가 부대 내에 떠돌았다. 그 악몽은 ‘바로 입대하는 꿈’이다. 2년 여의 군생활 때문이었겠지만 좀처럼 제대가 실감나지 않았다.

마침내 제대를 하던 날 아침, 부대 위병소를 벗어나자마자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렸다. 내가 달리기 시작하자, 함께 제대했던 동기는 의아스럽게 “왜 그렇게 뛰어?” 물으며 내 뒤를 쫓았다.

나는 두려웠다. 누군가 뛰어나와, “국가 비상사태가 발생했다. 오늘 아침부로 제대 명령을 취소한다. 모두 부대에 복귀해”라고 외치며, 내 뒷덜미를 낚아챌 것만 같은 불길한 상상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국가 비상사태는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무사히 제대할 수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 제일 느리게 변하는 곳이 나는 군대라고 생각한다. 이제 나라를 지키겠다고 찾아온 이 땅의 젊은이들을 실망시키는 군대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금전적인 문제에서부터 병역비리에 이르기까지 전체적인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

화려한 젊은 날의 한 때를 나라를 위해 기꺼이 바치는 만큼 나라도 이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그래야 젊은이들도 기꺼이 분단된 조국을 위해 그들의 시간을 바칠 것이다.

군대에 가야 하는 젊은 남자들이여, 시간을 버티고 살아 남아 무사히 돌아오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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