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한번 바꿔 볼까요?"

[동행취재] 민주노동당 한 정치신인의 선거운동 현장

등록 2004.04.08 10:08수정 2004.04.08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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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5일 광주 서구 풍암지구 인근에 위치한 금당산 등산로 한 정자. 한 등산객이 명함을 살펴보고 있다.

5일 광주 서구 풍암지구 인근에 위치한 금당산 등산로 한 정자. 한 등산객이 명함을 살펴보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국언


오병윤(46) 후보는 황금연휴라는 지난 5일 주민들이 즐겨찾는 광주 서구 풍암동 금당산 등산로를 찾았다. 정치에 첫 입문한 오 후보는 민주노동당을 간판으로 광주 서구을 선거구에 출사표를 던졌다.

전두환 군사정권의 서슬 퍼런 폭압정치가 한창인 지난 85년, 전남대학교 첫 직선 총학생회장을 지낸 오 후보는 광주학살 진상규명과 6월 항쟁 거리에서 빨간 마이크를 쥐고 금남로와 중앙로의 시민항쟁을 주도하기도 했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등에서 주요 직책을 거친 그는 이번 총선에서 '빛고을 광주 정신'을 대표하는 후보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전국자치분권연대'와 '국민의 힘', '총선 물갈이연대'로부터는 총선 지지후보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첫 노크하는 진보정치... 선뜻 내주지 않는 민심

총선이 중반을 달리면서 각 후보들의 득표활동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금당산 등산로 아래에 위치한 풍암저수지에는 낚시객들을 상대로 한 후보의 부인이 부지런히 인사를 건네고 있다. 후보들의 애타는 심정과는 달리 아직까지 유권자들은 선뜻 자신의 내심을 비치지 않고 있다.

"모처럼 좋은 산에 오셨는데 유쾌하지 않은 얘기를 꺼내 죄송합니다. 어쩔까요. 이번에 정치 한번 바꿔 볼까요?"

정자에서 등산객을 만난 오 후보가 꺼낸 첫 인사말. 오 후보가 두른 어깨띠에는 "미련 없다, 확 바꾸자"라고 씌여 있다. "나 혼자 바꿀 수 있다면 바꾸겠는데…"라며 다음 화제를 잇는다. 80년대 격동의 현대사의 한 복판에 서있던 그였지만 현실정치의 벽은 여전히 낯설기만 하다.


분위기를 읽은 듯 가벼운 웃음으로 화답한 등산객이 쉴 참해서 마루에 자리를 정한다. 선뜻 자신의 속내를 표현하고 있지 않지만 얘기는 들어볼 참이라는 표정이다. 정치인이 싸잡아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때, 이만한 것도 다행이다. 민주노동당에 대한 유권자들의 달라진 태도를 반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a 오 후보는 시장골목이나 슈퍼, 미장원 등 시민들의 삶을 생생히 느낄수 있는 곳을 찾겠다고 말한다. 격려보다는 따끔한 비판이 많을 때도 있다.

오 후보는 시장골목이나 슈퍼, 미장원 등 시민들의 삶을 생생히 느낄수 있는 곳을 찾겠다고 말한다. 격려보다는 따끔한 비판이 많을 때도 있다. ⓒ 오병윤선본제공

사실 정치 얘기라면 아예 신물을 내는 판이다. 쌍촌동에 산다는 50대 후반의 등산객은 "자기들끼리 트집이나 잡고있는 싸움꾼"들이라며 아예 16대 국회를 싸잡아 몰아세운다. 자연스레 화제는 '삼보 일배'로 불똥이 튀었다. 이 등산객은 "광주만 오면 망월동을 가는데 평소에 잘하면 될 일 아니냐"고 불편한 심기를 마저 쏟아 놓는다.


가족과 나들이에 나선 오영렬(42·풍암동)씨는 "삼보일배도 바람몰이를 노리는 쇼에 불과하다"며 "이미 지나간 사람을 거론해 박정희 향수를 끄집어내는 것을 보면 우습기만 하다"고 냉소를 던졌다. 오씨는 "당리당략에만 휩싸일 것이 아니라 정책정당으로 변모해야 한다"며 "민초들의 삶을 되돌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너무 강성 아니냐"... "천천히 뚜벅뚜벅 갈 것"

오 후보가 정자에서 점심나절까지 3시간여의 시간을 머물러 만난 유권자는 고작해야 40여명. 더러는 자신을 알아보며 반갑게 인사하는 시민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입장을 신중히 했다. "너무 강성이더라, 더 낮춰 대중적으로 가야하지 않느냐"는 따가운 비판도 없지 않았다.

"사람들이 많은 곳보다 시민들의 일상 생활현장을 더 많이 찾아갑니다. 노동사업장이나 동네슈퍼, 미장원, 복덕방 등이 그런 곳입니다. 삶의 터전에서 만나 직접 얘기를 들어봐야 시민들의 바램을 생생히 체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속과 수배를 넘나든 자신이었지만, 시민들이 이뤄낸 민주화의 승전보는 어느덧 진보정당의 원내진출 시대가 목전에 다가올 만큼 뚜렷하다. 유력한 경쟁 후보들은 국회와 정부 요직 등을 거친 쟁쟁한 인물들. 인지도만이 쫓자면 아직 견줄 바는 아니다. 오 후보는 이에 대해 "진보정치란 바람처럼 한순간에 오지 않는다"고 잘라 말한다.

오 후보의 수첩엔 어느덧 3천여명에 달하는 지인들의 명함으로 가득 차 있다. 무시할 수 없는 힘인 셈이다. 하지만 향후 진보정치를 일궈갈 더 없이 소중한 인연들이라는데 더 각별한 의미를 둔다.

오 후보는 "진보정치란 그렇게 가야 하지 않느냐"며 "급하게 생각지 않게 뚜벅뚜벅 가겠다"고 말한다.

새벽시간 이름 없이 배달 된 김밥 두 줄

지난달 중순에 있었던 일. 새벽시간 오병윤 후보 선거사무실로 난데없이 김밥 두 줄이 배달됐다. 밤늦은 시간에 귀가하던 누군가가 사무실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대신 부탁한 것이다. 말 없는 시민이었다.

출처를 밝히지 않고 전해지는 시민들의 온기는 비단 김밥만이 아니다. 사무실 한 켠을 차지하며 한창 봄기운을 전하고 있는 화분 하나도 마찬가지로 이름을 밝히지 않는 어느 시민이 보내 온 것. 민주노동당 후보들의 발걸음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제조업에 근무하는 최성봉(38)씨는 최근 자신의 봉고차를 선거기간 동안 사무실에 내놨다. 최씨는 그동안 이 봉고차를 통해 회사 직원들의 출퇴근을 도와오며 부수입을 받아오던 중이었다. 맞벌이에 나선 부인은 공교롭게도 올해 초 정리해고를 당하기도 했다.

이번 선거기간, 몇몇 당원과 부인들은 그동안 일해온 아르바이트를 그만뒀다. 월차를 쓰고 자원봉사를 자청하고 나선 사람도 있다. 사실 맞벌이나 아르바이트 등으로 대부분 어려운 생활을 꾸려가는 형편들이다. 민주노동당이 또 한번 넘어서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 이국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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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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