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위로가 되는

장인어른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날, 아들에게서 온 편지

등록 2004.04.11 11:10수정 2004.04.11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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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어른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날 저녁에 대학생인 아들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운전면허 시험에서 최종 합격했다는 반가운 소식과 함께 답장 메일을 보냈는데 용량이 초과되어 되돌아왔다는 말을 했습니다. 확인해보니 보낸 편지함을 비우지 않아 그리된 듯 했습니다. 얼른 편지함을 비우고 궁금한 것이 있어서 다시 아들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답장이라니? 언제 아빠가 메일을 보냈니?"
"저 양말 보내주실 때 편지도 함께 넣어 주셨잖아요."
"아, 그랬던가?"

아들 말을 듣고 보니 열흘 전쯤 아내의 명을 받아 양말 속에 편지를 써서 넣어준 기억이 어렴풋이 났습니다. 불과 열흘 전 일인데도 까마득히 오래 전의 일로 기억되는 것은 어쩌면 그 사이 장인어른께서 돌아가셔서 잠시 정신을 놓았던 탓도 있을 것입니다. 나이 오십을 넘어서면서 마음과는 달리 조금씩 몸이 쇠락의 길로 접어드는 탓이 더 크겠지만.

아들이 다시 편지를 보내온 것은 두어 시간이 지난 뒤였습니다. 검을 든 청동상 옆에서 포즈를 취한 사진과 함께 보내온 메일에는 제가 만년필로 써서 양말 사이에 넣어보낸 편지도 타이핑이 되어 있었습니다. 부쳐놓고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편지를 다시 읽는 맛도 새로웠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퇴근하고 돌아와 보니
너에게 보낼 양말이 보이더구나.
엄마는 그 양말을 너에게 보내기 전에
아빠의 편지를 넣어서 보낼 생각을 하고 계시더라.
역시 엄마답지?


너 여섯 살이 채 못 되었을 거야.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어디에선가 여행지에서
너에게 엽서를 보낸 적이 있었단다.
그 때 생각이 나는구나.

가족이란 소중한 가치만큼
함께 있을 때는 모르고
서로 함부로 하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그 소중함을 깨닫기도 하는데
우린 함께 있는 순간들도
서로에게 성실을 다하는 모습으로
살아온 것으로 나는 확신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아직은 한창 철이 없을 나이에
우리 사을이가 부모에게 보여준
성숙한 모습들이
우리 가족을 행복의 시간으로
초대했다고 아빠는 생각하고 있단다.

그래서 늘 네가 고맙고, 미덥고
그리고 자랑스럽기만 하다.
다만, 한 가지
매사에 좀 더 세심하게 챙기고
과정도 중요하지만 결과에도 책임질 줄 아는
우리 사을이가 되어주었으면 한다.

엄마의 사랑을 담아서 오늘은
여기서 줄이마. 안녕!

사랑하는 아빠가.


편지와 함께 보내온 아들 사진
편지와 함께 보내온 아들 사진안준철


몇 개월만에 외할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흰머리 몇 가닥과 주름살 몇 개로는
아버지를 더 늙어 보이게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는지
전보다 더 젊어지신 모습으로 내게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아마도 가르치는 학생들과 더욱 더 좋으신가 봅니다.

이제 아버지도 오십에서 일년을 더 사셨고
어머니도 드디어 오십 년을 꼬박 사셨습니다
외할아버지께서 먼 곳으로 가시자
외할머니의 뒷모습이 어찌나 쓸쓸해 보이는지..
차라리 인생을 조금 일찍 마감하더라도
부부가 함께 하늘나라로 가는 것이
서로에게 더 큰 축복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집에서는 나도 모르게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
다른 사람에게 하듯이 새살 맞게 하지도 못했고
그렇게 흔한 보고싶다, 사랑한다는 말도
입술로는 몇 마디 못했습니다

멀리 떨어져서 지내는 지금도 달라진 것은 없어서
부모님께 전화가 오면 오래도록 수다를 떨긴 하지만
여전히 보고싶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은 쑥쓰러워서
입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많이 보고싶습니다
아버지가, 어머니가, 그리고 두 분이 같이 사랑하시는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려서 눈꼬리가 쳐지고 가슴이 간질간질 합니다

사실 사춘기 때 어머니 아버지가 없어도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종종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금은 철이 든 지금 다시 생각을 하면..
말로 오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오가는
서로에 대한 의지와 달램이 절실하게 느껴져서
지금 나에게 부모님이 없다면 참 힘들 것 같습니다

훗날 나도 아버지가 될텐데
내가 아들에게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그저 아버지라는 생각만 해도 스스로 마음이 어루만져지게 하는,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커다란 위로가 되는
그런 아버지가 되고 싶습니다
지금 나의 아버지, 어머니처럼 말입니다

엄마, 아빠
고맙다는 말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어요
부탁이 있다면 두 분이 같이 오래 사세요
하나님을 믿기에 먼저 한 분이 돌아가셔도
한 분은 이 곳에서, 또 한 분은 하늘 나라에서
다시 만날 서로를 기다리겠지만
출장 때문에 하룻밤만 떨어져 계셔도
많이 보고싶어 하시는 엄마 아빤데..
혼자 계시면 제가 지켜보기 힘들 것 같아요

한 달이 지나면 어버이 날이네요
그 때 또 온 가족이 모이기로 했으니
이번에는 좀 빨리 만날 수 있겠어요
그 때까지 통화도 자주 하고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이만 줄일게요.

사랑하는 아들 올림.


편지의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아들은 장인어른의 장례식장에서 학교에서는 배우지 못할 큰 인생공부를 한 것 같습니다. 당신의 빈자리를 통해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신 것이지요.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큰 위로가 되는' 그런 아버지가 되라는 묵언의 가르침과 함께.

장인어른은 먼길을 떠나시면서 외손자에게 마지막 큰 가르침을 주신 셈입니다. 돈이라면 천륜도 쉽게 저버리는 황금만능시대에 아들에게 주신 귀한 교훈이어서 더욱 뜻깊다 하겠습니다. 장인어른의 명복을 진심으로 빌면서 혼자 남으신 장모님에 대한 부족한 효심을 더욱 깊게 하리라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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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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