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구덩이에서 빠져 나오길"

단병호가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내는 글

등록 2004.04.12 10:35수정 2004.04.12 10:48
0
원고료로 응원
민주노총 전 위원장으로 이번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의 비례대표 후보 2순위로 나선 단병호 후보가 민주노동당 홈페이지(www.pangari.net)에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내는 글을 올렸다. 민주노동당의 '진보가 보수에게'시리즈 마지막이다.

단 후보는 91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위원장으로 일하다 구속됐을 때 변호인단의 한 사람이 노 대통령이었다는 개인적인 인연을 소개했다. 이어 노 대통령의 당선소식을 감옥에서 듣고 "더 큰 기득권 세력을 대변하는 이회창 후보를 꺾은 게 반가웠으나 이내 마음은 담담해졌다"며 "한국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핵심문제인 신자유주의 정책에서 과연 노대통령이 자유로울 수 있을까 생각했을 때 결코 만만치 않은 문제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어 "1년이 지난 지금 당시 비관적 예측이 거의 빗나가지 않았다는 점에서 저는 오늘의 사태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며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겠다는 감동어린 공약이며, 노사간 힘의 균형이 필요하다거나 비폭력 불법파업 불구속 수사 원칙 등 개혁 노동정책들이 정확히 180도로 뒤바뀌어 버렸다"고 지적했다.

다음은 단 후보의 글 전문

휴가 잘 보내고 계신지요? 저는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2번의 책무를 다하려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노동현장을 중심으로 전국을 돌고 있답니다. 새벽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그 어느 때 못지 않은 강행군이지만 육체의 피곤함보다는 마음의 생기가 돋아납니다. 역시 현장 노동자들을 만나면 언제나 힘이 솟구칩니다.

제가 '인권변호사 노무현'과 인연을 맺은 것은 감옥에서였습니다. 직접 만난 것은 아니었지만 1991년 당시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위원장으로 일하다 구속됐을 때 변호인단의 한 사람으로 참여해주셨죠. 지금도 그 때 일을 감사 드리고 있습니다.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소식을 접한 것도 감옥에서였습니다. 2002년 12월 다섯 번째 옥살이를 하던 서울 구치소에서였죠. 우선 더 큰 기득권 세력을 대변하는 이회창 후보를 꺾은 게 반가웠습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은 담담해졌습니다. 기득권층 주류를 제친 노무현 대통령 당선 자체가 한국사회의 큰 변화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한국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핵심문제인 신자유주의 정책에서 과연 노대통령이 자유로울 수 있을까 생각했을 때 결코 만만치 않은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면회 온 어떤 분에게 제가 "'인간 노무현'은 신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대통령 노무현'은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습니다. 하지만 왜 기대가 없었겠습니까. 최소한 대선 공약과 인수위원회 시절에 제시한 개혁정책을 지키려 애쓰기만 해도 나름대로 의미가 작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지금 당시 비관적 예측이 거의 빗나가지 않았다는 점에서 저는 오늘의 사태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대통령께서도 휴가 기간에 민심에 부응하려 나름대로 노심초사하시리라 믿습니다만, 대통령께서 생각하는 민심은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노동현장에서 만난 민심은 상상을 뛰어넘었습니다. 특히 기존 정치권에 대한 불신은 대단했습니다. 이런 민심 때문인지 정치권은 앞다퉈 사죄하느라 바쁘더군요. 어떤 이는 부처님 앞에서 108배를 올리고, 어떤 이는 광주 영령에게 3보 1배 사죄를 하고, 어떤 이는 노인들 앞에서 9배를 하며 잘못했다고 합니다. 감성정치니 뭐니 말들이 많지만 저는 과연 정치권은 자신들이 뭘 잘못했는지 알고나 있는지 그것을 묻고 싶습니다.

저는 이 점에서 노대통령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나라당 보다 많지 않다고 면죄부를 받을 수 없는 수백 억의 불법 정치자금 문제며, 불필요한 소모전을 자초한 문제 발언들이며, 국민과 헌정질서를 볼모 삼은 재신임 발표, 국민참여를 봉쇄한 부안사태…. 노대통령이 이끄는 참여정부는 출범 초 국민들에게 약속했던 개혁정부로서의 정체성을 사실상 상실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외교 등 주요 정책에서 개혁성을 잃었습니다. 정부가 앞장서서 미국의 침략전쟁에 가담한 이라크 파병 결정, 농업을 말살시키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체결, 비정규직 노동자 양산 정책 등은 국민 앞에 약속한 개혁정책과는 정 반대의 정책이었습니다.

미국 갔다 오면서 갑자기 '2만불시대론'을 꺼내들고, 재벌총수들과 삼계탕 먹으며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자 건배하던 대통령의 낯선 모습이 점차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성장과 분배의 조화를 이루겠다'던 대선공약은 불과 몇 달만에 '분배는 간 데 없고 성장만 나부끼는' 형국이 됐습니다.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겠다는 감동 어린 공약이며, 노사간 힘의 균형이 필요하다거나 비폭력 불법파업 불구속 수사 원칙 등 개혁 노동정책들이 정확히 180도로 뒤바뀌어 버렸습니다.

배달호, 김주익, 이용석… 노동자들의 분신자살이 이어졌던 지난 1년이 저 자신에게는 노동운동 18년 세월 보다 더 길고 고통스러웠던 한 해였습니다. 특히 노대통령이 노동자들의 처참한 분신정국에서 취했던 태도나 '분신자살로 목적을 이루던 시대는 지났다'와 같은 잇단 발언은 쉽게 아물지 않는 상처로 노동자들 가슴에 아프게 남아있습니다.

노대통령께서는 1년 만에 180도로 달라진 말과 태도를 무엇이라 설명할지 궁금합니다. 역시 '실제로 국가를 경영해보니…'인가요? 저는 2003년 9월 30일 대통령과 비공식으로 허심탄회하게 대화했던 자리에서 해답을 이미 찾았습니다. 비공식 자리이기 때문에 그 내용을 일일이 옮기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나 그 때 느꼈던 대통령의 생각은 철저한 성장논리, 철저한 신자유주의 정책의 신봉 그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마음속으로 대통령이 신자유주의의 구덩이에 빠져버렸다는 한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구덩이에서 빠져 나오지 않는 한 당선 당시 국민에게 약속했던 공약들은 결코 지킬 수 없다는 판단이었습니다. 초국적 자본과 재벌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노동 유연화를 통한 비용절감과 공기업 민영화를 통한 자본의 활동영역 확대를 핵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포기하지 않는 한 노동·사회정책은 물론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맹주인 미국의 군사패권주의에 대항해야 하는 외교정책에서도 개혁성을 회복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저는 반개혁 정책에서 열린 우리당과 공범관계에 있는 한나라당 민주당 자민련의 대통령 탄핵사유는 물론 탄핵 그 자체에 결코 찬성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노대통령은 다시 대통령직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시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될 날을 떠올리면 걱정이 앞서는 것도 솔직한 심정입니다. 노대통령이 이끄는 참여정부가 개혁성을 회복하고 거듭나려면 신자유주의 구덩이에서 빠져나와야 하는데 과연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생각해보면 회의적입니다.

노대통령께서도 보도를 보셨겠지만 얼마 전 경기도 평택에서 병든 홀어머니와 두 동생을 부양하던 열 다섯 살 소녀가장이 고단한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목 메 죽은 사건은 우리 모두를 가슴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그 소녀는 "차라리 고아로 태어났으면 좋았을걸… 차라리 거리의 풀 한 포기로 태어났으면 좋으련만… 차라리 바람에 휘날리는 모래 한 줌으로 태어났으면 좋으련만…, 내게 미래란 보이지 않는다"는 유서를 남겼다고 합니다. 그 소녀는 마지막 가는 길에 두 여동생이 먹을 밥을 전기밥솥에 가득 지어놓았다고 하지요.

소녀가장의 죽음 앞에서 과연 나 자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자괴감이 듭니다. 그리고 민중생활을 외면하고 미국과 초국적 자본, 재벌에 굴종해온 이 시대 한국정치가 무릎꿇고 반성해야 할 곳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이 소녀가장의 한 맺힌 주검 앞이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초국적 자본과 거대재벌의 이익을 위해 민중을 더 힘겹게 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이야말로, 삶의 고단함을 못 견뎌 목숨을 끊어야만 했던 소녀가장이 지어놓은 마지막 밥조차 빼앗아 자본의 이윤추구 수단으로 쓰는 야만의 극치라 비유하면 지나칠까요? 민중이 먹을 밥을 짓는 정치는 못할망정 민중의 밥을 앗아가는 신자유주의 정치는 개혁과 양립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인권 변호사와 수감자, 대통령과 민주노총 위원장으로 만났던 우리는 얼마 후면 대통령과 진보정당 국회의원으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민주노동당은 민중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맞서는 데 쓸 수 있는 모든 힘을 다 쏟을 것이며, 저 자신도 당원의 일원으로서 미력하나마 최선을 다해 활동하려 합니다.

저는 민주노동당이 추진하는 정책과 노동자 민중들이 고통받고 있는 삶의 현장, 투쟁의 현장에서 제기되는 요구들을 치열하게 쟁점화하고 이를 다시 대중투쟁으로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또한 진보정당을 통해 국회로 진출한 노동자 국회의원의 표상을 세움으로써 노동자, 농민과 민중들이 정치를 자신의 삶을 바꾸는 유력하고 친숙한 참여공간으로 여길 수 있도록 힘써나갈 것입니다.

단병호 후보
단병호 후보오마이뉴스 이종호
노대통령께서도 부디 휴가기간 동안 신자유주의 구덩이에서 빠져나올 비책을 세우시길 당부 드립니다. 그리하여 진정한 개혁정책을 추진하는 보수여당과 진보야당 민주노동당이 민중의 행복을 위해 멋진 경쟁을 벌이게 되길 기대합니다. 참여정부가 신자유주의 구덩이에서 끝내 탈출하지 못하고 이전과 같은 반개혁 정책을 계속한다면 민중의 탄핵, 역사의 탄핵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하시길 진심을 담아 말씀드립니다.

민주노동당은 총선 후 17대 개원국회에서 한국을 침략전쟁의 공범으로 만드는 이라크 파병 계획 철회 결의안을 제출할 것입니다. 노대통령이 이끄는 참여정부와 열린 우리당도 민주노동당과 함께 파병 철회에 적극 동의하셔서, 미국의 침략전쟁에 동조했던 역사적 과오를 씻음과 동시에 신자유주의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는 첫 걸음을 내딛기를 기대합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콩나물밥 이렇게 먹으면 정말 맛있습니다 콩나물밥 이렇게 먹으면 정말 맛있습니다
  2. 2 "손님 이렇게 없을 줄은 몰랐다"는 사장, 그럼에도 17년차 "손님 이렇게 없을 줄은 몰랐다"는 사장, 그럼에도 17년차
  3. 3 유인촌의 문체부, 청소년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유인촌의 문체부, 청소년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4. 4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에 '조선일보' 왜 이럴까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에 '조선일보' 왜 이럴까
  5. 5 윤 대통령 측근에 이런 사람이... 대한민국의 불행입니다 윤 대통령 측근에 이런 사람이... 대한민국의 불행입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