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 떨어질 뻔했다 아이가, 문디 가시나야"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51>공동우물

등록 2004.04.19 14:29수정 2004.04.19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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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카프 시인 권환의 고향에서 마주 친 낡은 우물

카프 시인 권환의 고향에서 마주 친 낡은 우물 ⓒ 이종찬

"어! 이게 뭐야? 공동우물 아냐?"
"히야~ 아직까지도 이런 우물이 남아 있다니. 이 바가지 좀 봐? 내 어릴 때 물을 길어올리던 그 바가지하고 꼭 같네."
"근데 물이 너무 더러워 식수로는 사용하지 못하겠네요."
"그래도 아직까지도 바가지가 우물가에 걸려 있는 걸로 봐서는 아예 버린 우물은 아니구먼."



지난 4월 첫째 주 토요일 오후, 문화예술인모임 '미리내' 회원들과 함께 이 지역 출신 카프 시인 권환의 생가가 있다는 마산 진전면에 있는 작은 마을에 들렀다가 마을 어귀에 있는 낡은 우물 하나를 보았다. 그 우물은 마을 사람들이 버린 우물처럼 보였다.

마치 오랜 추억 속의 한 장면처럼 동그마니 앉아 있는 그 우물 속을 들여다 보았을 때 우물물은 이미 먹구름 빛깔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고인 우물물 곁에는 초록빛 이끼까지 끼어 있었다. 하지만 우물가에 매달린 낡은 바가지에 물이 약간 담겨 있는 걸로 보아 아예 버려진 우물은 아닌 것 같았다.

"아마도 가뭄 때 이 우물물을 퍼서 농업용수로 사용하는 것 같구먼."
"근데 물이 왜 이리도 탁해졌을까요? 우물의 위치나 우물 주변의 널찍한 공간을 보아서는 한때 이 마을사람들이 이 물을 먹고살았던 것 같은데."
"그야 뻔한 거 아니겠어. 산골짝 여기 저기를 쑥대밭처럼 다 파헤쳐 놓았으니 그럴 수밖에."


그래. 내가 살던 창원군 상남면 동산부락 한가운데에도 그 우물과 꼭 닮은 공동우물이 하나 있었다. 그 우물은 우리 마을사람들의 식수는 물론 금세 밭에서 캐낸 상치, 파, 감자 등 여러 가지 먹거리를 깨끗이 씻는 곳이기도 했다. 또 그 우물은 아무리 큰 가뭄이 오더라도 언제나 거울처럼 맑은 물을 퐁퐁 솟아냈다.

a 희미한 추억처럼 우물물은 흐리고 군데군데 이끼가 끼어 있다

희미한 추억처럼 우물물은 흐리고 군데군데 이끼가 끼어 있다 ⓒ 이종찬

이른 새벽이면 우리 마을 어머니들은 누구나 동그란 양철 물통을 머리에 이고 서둘러 그 우물가로 향했다. 행여 늦게 가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려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길러온 우물물을 부엌 한 편에 있는 커다란 단지에 부었다. 그리고 그 단지에 물이 가득찰 때까지 몇 번이나 물동이를 이고 그 우물가를 들락거렸다.


우리들은 장닭이 홰를 몇 번 칠 무렵이 되어서야 눈을 비비고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그때쯤이면 어느새 단지 가득 우물물을 가득 채운 어머니께서는 밥솥에 불을 떼고 계시다가 단지에서 물을 한 바가지 퍼내 주셨다. 어머니께서 이른 새벽에 길러온 그 우물물은 얼음처럼 시원하고 달았다.

"논에 나가셨던 너거 아부지 돌아오실 때가 됐다. 퍼뜩 도랑가에 가서 이 닦고 세수하고 오이라."
"소금이 다 떨어졌뿟는데예?"
"그라모 모래로 대충 닦아라모."



그래.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치약 같은 게 몹시 귀했다. 그래서 우리 마을사람들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대부분 왕소금으로 이를 닦았다. 그러다가 간혹 왕소금이 떨어지면 도랑가에 곱게 깔려 있는 고운 모래를 손가락에 묻혀 이를 닦기도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우물가에서 세수를 하거나 이를 닦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 마을에 꼭 하나 있었던 공동우물은 마을사람들이 그 무엇보다도 신성하게 여기는 생명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에 우리 마을 어머니들은 그 우물가에서 먹거리까지 깨끗이 씻고 나면 우물의 뚜껑을 덮었다. 행여 먼지나 불순물이 우물 속으로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a 오래된 두레박. 예전에는 철모 속에 든 동그란 모자를 두레박으로 사용했다

오래된 두레박. 예전에는 철모 속에 든 동그란 모자를 두레박으로 사용했다 ⓒ 이종찬

"누가 우물을 쇠테(열쇠)로 잠가뿟노(잠궜느냐)? 목이 말라 죽 것거마는."
"아까 두대때기(두대댁)가 밭에 나감시로(나가면서) 잠갔뿟는데예."
"니 퍼뜩 가서 내가 쌔떼 도라카더라(달라고) 캐라(해라). 지가 뭔데 주인 허락도 없이 우물을 함부로 잠구고 댕기는데?"


그랬다. 그 우물 뚜껑 때문에 가끔 마을사람들끼리 말다툼이 일어날 때도 있었다. 그 우물은 우리집 맞은 편, 그러니까 큰집 바로 앞에 있었다. 그 때문에 큰집에서는 그 우물이 마을의 공동우물이 아니라 큰집 소유라고 우기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 우물은 큰집과 담장 사이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크게 말다툼을 해도 그 우물은 단 한번도 큰집의 소유가 되어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마을에서 개인 우물을 가지고 있는 집은 고작 2~3집뿐인데다가 개인 우물은 모두 집 안에 있었기 때문에 마을사람들이 수시로 우물물을 사용하기에 몹시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우와! 오늘은 와 이래 덥노."
"니 망 좀 봐라."
"와?"
"퍼뜩 등목 한번 하구로."
"그라지 말고 고마 도랑에 가서 씻어라. 어른들한테 들키모 반쯤 죽는다카이."
"도랑물은 미지근해서 등목을 해도 한 것 같지가 않다카이."


그날은 사월의 날씨답지 않게 몹시 더웠다. 하지만 우리들은 소풀을 베기 위해 땀방울을 훔치며 들판 곳곳을 헤집고 다녀야만 했다. 그리하여 겨우 소풀을 한 짐 지고 누구의 소풀이 더 좋다느니 하면서 집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근데 너무 더웠다. 그때 우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우물가로 향했다.

아이들 몇몇은 어른들이 올까 봐 들마당에 서서 망을 보았고, 또 몇몇은 그 시원한 우물물을 바가지로 떠내 등목을 하기 시작했다. 하긴, 우리들이 하는 등목이라고 해야 그저 윗도리를 훌훌 벗어 던지고 시원한 우물물 한 바가지를 "어푸 어푸" 하면서 그냥 뒤집어 쓰는 것뿐이었다.

a 공동우물과 두레박, 마치 오랜 추억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공동우물과 두레박, 마치 오랜 추억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 이종찬

이윽고 내가 윗도리를 벗어 던지고 막 우물가에 엎드렸을 때였다. 그런데 그때 하필 그 가시나가 불쑥 우물가에 나타난 것이었다.

"옴마야!"
"누… 누고(누구야)?"
"내…내는 아무 것도 안 봤다이. 내는 아무 것도 안 봤다카이."
"에이~ 간 떨어질 뻔했다 아이가, 이 문디 가시나야."


그 가시나와 나는 속으로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그 가시나는 아마도 큰집에서 소꿉놀이를 하다가 집으로 가기 위해 아무런 생각도 없이 우물가로 나왔던 모양이었다.

그날 내 알몸을 슬쩍 훔쳐본 그 가시나의 볼은 유난히 붉었다. 그 가시나는 나와 눈빛이 마주치자마자 두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긴 생머리를 나풀거리며 탱자나무 울타리 사이로 숨어버렸다. 그 뒤부터 그 가시나는 나를 슬슬 피해 다녔다. 간혹 골목길에서 나와 정면으로 마주칠 때에도 예전의 눈웃음은커녕 땅만 보고 휙 지나쳤다.

"니 요새 와 그라노?"
"…"
"인자 내가 싫나?"
"몰라 몰라 몰라! 이 문디 머스마야."

그래. 요즘도 나는 길을 가다가 문득 오래된 공동우물을 바라보면 그 가시나의 우물처럼 깊숙한 눈동자가 떠오른다. 그래. 이 공동우물의 물을 마시며 어린 시절을 보냈을 카프 시인 권환도 나처럼 이 우물에 얽힌 예쁜 추억 몇 토막쯤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비록 우물물처럼 흐릿한 시절이 되고 말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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