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큰 가시나 방을 머스마가 우째 문을 엽니꺼"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52>공장일기<32>

등록 2004.04.21 13:39수정 2004.04.21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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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죽단화를 바라보면 노오란 꽃잎을 한 잎 두 잎 떼내던 그녀의 예쁜 옆모습이 떠오른다

죽단화를 바라보면 노오란 꽃잎을 한 잎 두 잎 떼내던 그녀의 예쁜 옆모습이 떠오른다 ⓒ 이종찬


"도대체 우째 돼 갑니꺼? 진짜 누구 죽는 꼬라지로 볼라꼬 그랍니꺼?"
"설마예."
"내 참, 미치고 팔짝 뛰것네. 설마가 사람 잡는 거로 오데(어디) 하루 이틀 겪어봤습니꺼. 그 가시나 그거 하는 짓거리로 보이소. 아예 죽것다고 덤빈다 아입니꺼. 그놈의 사랑이 뭔지 정말."
"쪼매마(조금만) 더 기다려 보이소."

지난 밤, 노란 죽단화가 예쁘게 피어나고 있는 창원공단 벤치에서 만난 그녀는 나를 몹시 다그쳤다. 난들 어쩌랴. 나 또한 그녀의 친구가 목숨을 걸고 좋아하는 그 친구를 만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점심시간뿐만 아니라 퇴근길에 그 친구를 만나 소주를 주고받으며 그녀의 그런 사정을 몇 번이나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친구를 아무리 좋아하고 있어도 이미 때가 늦었다. 생산부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 그 친구는 창현이와 내가 다리를 놓았던 그 여성노동자와 이미 결혼까지 약속하고, 양가 부모님을 만나 인사까지 나눈 상태였다. 게다가 신혼살림을 꾸릴 집까지 보러 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이를 어쩐단 말인가. 나는 참으로 난감했다. 그녀는 창원공단 벤치에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오두마니 앉아 활짝 피어난 죽단화 꽃잎을 한 잎 두 잎 떼내며,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그녀를 바라보면 나는 자꾸만 마음이 저려왔다. 갓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는 죽단화보다 더 예쁜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면 문득문득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당장 눈앞의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설령 그녀가 친구 문제를 해결해주는 조건으로 나와 사귀게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속수무책이다. 또한 그 일이 백에 하나 성사가 된다 손 치더라도 헤어지는 사람의 마음에 또 하나의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를 남기게 되는 일이었다.

"영(도저히) 에렵겠어예(어렵겠어요)?"
"…"
"만약 내가 그기를 내 친구처럼 그렇게 좋아한다카모 우짤랍미꺼? 그기도 그 사람처럼 내가 죽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꼬 그렇게 생각할 낍니꺼?"
"그, 그기 머슨 말입니꺼? 그라고 내는 사귀는 가시나가 없다꼬 안 캤심미꺼."
"그라모 우짤랍니꺼? 내한테도 시 한편 써 줄랍미꺼?"

나더러 시를 한 편 써달라고? 갑자기 가슴이 콩쾅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이게 무슨 뜻일까. 혹시 그녀가 나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녀는 자존심 때문에 그녀의 친구 문제를 핑계로 내세운 것은 아닐까. 아니, 아닐 것이다. 조립부에서 '미스 조립'이라고 불릴 정도로 예쁜 그녀가 잘 생기지 못한 나를 마음에 둘 리가 있겠는가.


그날 저녁, 그녀는 내게 묘한 말을 남겼다. 키가 나보다 조금 더 큰 그녀는 나를 몇 번 만나는 동안 나란 존재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오래 전부터 공장에 다니면서도 틈틈이 시를 쓰고 있는 나를 관심 깊게 살펴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저어기예."
"와예?"
"점심 때 우리 친구 집에 같이 가보입시더. 우리 친구가 오늘 아무런 연락도 없이 결근을 했거든예."
"?"
"계장님께서 아무래도 갸(걔)가 이상하다꼬 같이 한번 가보라 카데예."

그녀의 크고 까만 눈동자에 이내 눈물이 비치기 시작했다. 아니 그렇다면 혹시? 갑자기 가슴이 철렁했다. 만약 그녀의 친구가 결국 큰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면 이를 어쩐단 말인가. 그리고 그녀에게 주기 위해 며칠동안 고민을 하면서 써놓았던 시는 또 어쩐단 말인가.


몹시 불안했다. 나는 그날 오전 내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조립품을 나르면서도 허둥대다가 몇 번이나 미끄러졌다.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평소 불량품을 내지 않기로 조립실에서 인정받던 그녀도 오전 내내 툭하면 불량품을 냈다. 그녀는 그날따라 화장실을 자주 들락거렸다.

"요깁미꺼(여깁니까)?"
"……"
"근데 조용한 걸 보이(보니까) 어디 간 모양이네예?"
"가시나 지가(자기가) 갈 데가 오데 있겠심니꺼."
"한번 불러 보이소. 혹시 몸이 아파서 자고 있을지도 모른께네(모르니까)."
"0아! 0아!"
"……"
"방문 좀 열어 보이소. 내는 몸이 떨리서(떨려서) 도저히 못 열겠어예."
"다 큰 가시나가 혼자 사는 방을 다 큰 머스마가 우째 문을 엽니꺼."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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