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 뭐꼬? 삐비 아이가"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53> 띠

등록 2004.04.26 13:18수정 2004.04.26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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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우리들이 삐비라고 불렀던 "띠"

우리들이 삐비라고 불렀던 "띠" ⓒ 이종찬

"이야~ 이기 뭐꼬? 삘기 아이가?"
"어르신이 자란 마을에서는 이걸 삘기라고 불렀습니까? 저희들 어릴 때에는 '삐비'라고 불렀는데."
"근데 이 귀한 기 오데 있더노?"
"저기 저 논둑에 지천으로 널렸습디다."
"희한하게 삘기 먹을 때로 딱 맞추었네. 삘기 이거는 때로 놓치모 금방 세어 버리기 때문에 묵고 싶어도 묵을 수가 없다카이."



지난 4월 마지막 주 토요일, 나의 여행 길라잡이 김호부 선생과 함께 함안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한적한 진동 바닷가 근처에 내려 잠시 논길을 거닐었다. 다랑이 논이 계단을 이루고 있는 진동 바닷가 마을에는 따가운 봄 햇살이 바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초봄에 갈아엎은 듯한 논 곳곳에서는 뚝새풀이 길쭉한 갈색 꽃을 매달고 있었고, 그에 뒤질세라 자운영도 보랏빛 꽃을 흐드러지게 피우고 있었다. 다랑이 논둑 한 곳에, 부지런한 농민들이 만든 못자리에서는 노란 볍씨의 밑 둥에서 하얀 싹을 삐쭉 틔웠다.

"삐비가 날 때가 되었는데?" 나는 다랑이 논둑에 앉아 혼잣말을 지껄이며 삐비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껍질을 까서 하얀 속살을 입에 넣으면 상큼한 풀 내음과 함께 껌처럼 쫄깃쫄깃하게 씹히던 그 맛난 삐비. 먹을 게 그리도 귀했던 어린 날, 허전한 입안을 달착지근하게 채워주던 그 맛난 삐비를 말이다.

쪼그리고 앉은 채로 오리처럼 뒤뚱거리며 논둑을 조금 더 나아가자 마침내 삐비가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사십대 중반을 갓 넘긴 어른이 아니었다. 열 살 남짓 먹은 까까머리 시골 어린애처럼 열심히 삐비를 뽑았다. 어린애의 왼손에는 이내 살찐 삐비가 한 주먹 가득 채워졌다.

a 그 많던 삐비는 다 어디로 갔을까

그 많던 삐비는 다 어디로 갔을까 ⓒ 이종찬


a 삐비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어릴 때의 기억 속에 첨벙 빠진다

삐비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어릴 때의 기억 속에 첨벙 빠진다 ⓒ 이종찬

그랬다. 내가 자란 동산부락 논둑 곳곳에는 삐비가 너무나 많았다. 방과 후 소 풀을 베기 위해 논둑에 나가면, 삐비를 몇 주먹씩 뽑곤 했다. 삐비는 뽑을 때마다 '삐비' 하는 소리가 났다. 아마도 그래서 우리 마을 어르신들이나 아이들은 표준말로 '띠'라고 부르는 벼과의 그 풀을 '삐비'라고 불렀는지도 모르겠다.


"아나?"
"이기 뭐꼬? 삐비 아이가."
"올개(올해) 삐비는 살이 통싱통실 하게 찐 기 참 달고 맛이 있더라. 다른 가시나들한테 주지 말고 니 혼자 살짝 묵어라."
"이 많은 삐비로 내한테 다 주모 니는 우짤라꼬. 그라지 말고 우리 마당 뫼 솔숲에 가서 같이 나눠 묵자."
"그라다가 아(아이)들한테 들키모 또 머슨(무슨) 소리 들을라꼬?"
"문디 머스마! 니캉 내캉 그렇고 그렇다꼬 소문 나는 기 그리도 겁나나."


웃을 때마다 보조개가 예쁘게 패였던 그 가시나는 나이는 나와 같았지만 나보다 키가 조금 더 컸다. 그리고 그 가시나 집에서 맛난 음식을 하거나 과일이 생기면 늘 제 몫을 남겨두었다가 내게 주곤 했다. 나 또한 삐비를 뽑거나 찔레순을 꺾을 때면, 늘 그 가시나에게 줄 생각부터 먼저 했다.


그런 까닭에 그 가시나와 나는 먹거리만 생기면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골목 어귀에 서서 서로 기다렸다가 먹거리를 주고받곤 했다. 당연히 마을 아이들 눈치를 보아가면서 말이다. 삐비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그날 내가 뽑은 삐비는 빼빼한 삐비가 아니라 몸통이 아주 굵고 속살이 꽉 찬 그런 삐비였다.

"아~"
"아~"
"니도 퍼뜩 한 개 까서 내 입에 넣어도라(넣어주라)."
"아~"
"아~"
"어떻노?"
"응. 니가 깐 삐비로(삐비를) 내 입에 넣어준께네 달착지근한 기 맛도 너무 좋타카이."


a 지금 들녘에 나가면 삐비가 추억처럼 대를 밀어올리고 있다

지금 들녘에 나가면 삐비가 추억처럼 대를 밀어올리고 있다 ⓒ 이종찬


a 마산 진동 바닷가 근처 논둑에서 내가 직접 뽑은 삐비

마산 진동 바닷가 근처 논둑에서 내가 직접 뽑은 삐비 ⓒ 이종찬



그날, 그 가시나와 나는 마을 아이들 몰래 마당뫼 솔숲 잔디밭에 앉아 삐비를 까서 서로 입에 넣어주며 맛나게 먹기 시작했다. 그 가시나가 삐비 한 개를 까서 내 입에 슬쩍 넣어주면, 나도 삐비 한 개를 까서 그 가시나의 입에 슬쩍 넣어주었다. 그렇게 삐비를 반쯤 까먹고 있을 때였을까.

"푸다다다닥!"
"얼레꼴레리~ 얼레꼴레리~ 나는 봤다~ 나는 다 봤다~ 얼레꼴레리~ 얼레꼴레리~"
"옴마야!"
"절마 저기요."
"나는 봤다~ 나는 다 봤다~"


갑자기 우리가 앉아있는 솔숲 바로 옆에서 장끼가 한 마리 날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마을에 같이 사는 동무 하나가 혓바닥을 뱀처럼 날름거리며 우리를 놀려대며 저만치 달아나기 시작했다. 난처했다. 그렇지 않아도 남의 흉보기를 좋아하는 저 동무를 그냥 두면 이상한 소문이 동네방네 날 게 뻔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그 동무를 쫓아갔다. 그리고 이내 그 동무를 붙잡아 목을 짓누르며 다그치기 시작했다. "살찐 삐비가 있는 곳을 몽땅 다 가르쳐 줄 테니까 제발 입 좀 꾹 다물고 있어라"며 "우리는 그저 살찐 삐비를 다른 아이들한테 뺏길까봐 마당 뫼에 숨어서 서로 나눠먹었다"고 변명을 둘러댔다.

"그라모 조금 전에 너거들이 묵었던 그 삐비도 내한테 다 주라. 그라모 내 입을 쎄테(열쇠)로 잠가뿌꾸마(잠궈버릴게)."
"글마 그거 앵금통(마을에 살았던 욕심쟁이 어른의 별명)보다 더 지독한 넘이네. "
"니도 배가 고파봐라. 눈에 비는 기(보이는 게) 있는 강."


그랬다. 산수골에 살았던 그 동무는 우리 마을에서 가장 가난했다. 아무리 보릿고개라 해도 그래도 우리는 때를 거르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보리밥에 쌀알이 한두 개쯤 섞여있는 그런 밥을 먹었다. 하지만 그 동무가 사는 집은 하루에 한 끼를 때우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이 돌아가면서 보리추렴을 해서 그 집에 갖다주기도 했다.

a 삐비의 하얀 속살이 먹음직스럽지 않습니까

삐비의 하얀 속살이 먹음직스럽지 않습니까 ⓒ 이종찬


a 지금 그 가시나와 그 동무도 나처럼 삐비를 뽑으며 그때 그 시절을 생각하고 있을까

지금 그 가시나와 그 동무도 나처럼 삐비를 뽑으며 그때 그 시절을 생각하고 있을까 ⓒ 이종찬

그날 나는 그 동무한테 살찐 삐비가 가득 핀 논둑을 가르쳐 줬다. 그리고 살찐 찔레순이 많이 올라와 있는 시냇가 둑까지 가르쳐 줬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삐비와 찔레순이 워낙 많아 그 가시나와 내가 아무리 많이 먹어도 쉬이 줄어들지 않을 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삐비와 찔레순은 그로부터 일주일쯤 지나면 먹지 못하는 상태가 돼 버리는 것도 한 이유였다.

"그 문디 머스마 그기 우짠다 카더노?"
"인자 당분간 모른 척해야 되겄다."
"와?"
"지금까지 절마 저기 병야시(오래 묵은 여우)맨치로(처럼) 우리 뒤로 살짝 밟아가꼬 이상한 그런 소문을 다 냈던기라."


그래. 삐비를 바라보면 그때 토끼처럼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 가시나의 발그스레한 볼과 늘 배를 곪고 다녔던 산수골 그 동무가 생각난다. 그 가시나와 그 동무도 지금쯤 나처럼 달착지근한 삐비를 먹다가 그때 그 시절의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며 '흠' 하며 코웃음을 치고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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