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마루에 앉아 저 산 좀 봐 !

덧없는 지상에 가없는 극락을 염원한 무량사 극락전

등록 2004.04.29 11:32수정 2004.04.29 14:43
0
원고료로 응원
만수무량(萬壽舞量). 그래서 만수산 만수리의 무량사(無量寺)다. 무량수불은 아미타불이다. 아미타불은 목숨의 근원을 불격화한 것이다. 그러니까 석가의 세상에서나 미륵의 세상에서나 죽으면 무량수불의 아미타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고은의 <절을 찾아서> 에서 -


한반도 전역을 뒤덮은 거대한 황사띠로 온 세상이 막막하고 아득하기만 한 4월 셋째 주 금요일 오후. 수업 없는 도서관 한 편에서 고은 선생의 <절을 찾아서>를 뒤적이다 무심코 찾아 낸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무·량·사

a

불사를 통해 현실의 괴로움을 잊고자 한 민중들의 염원이 담겨있는 무량사 극락전 ⓒ 장권호

예전에도 분명 저 궁벽한 백제 땅 부여군 외산면 만수산 자락의 무량사란 이름을 스치듯 들었음직 한데 세상의 첫 인연인 것처럼 강렬하게 다가오는 이 느낌. 흔히 쓰는 말로 '느낌이 꽂혔다'고나 할지. 꽃 지고 잎 피는 이 무상(無常)한 봄날 나는 속수무책으로 무량사에 가고 싶어졌다.

주문처럼 목에 걸려 가슴을 후비고 파고드는 무량(無量)이라는 어휘가 던져주는 그 묘한 느낌의 어감과 깊이에 빠져들어 헤어날 길이 없었다.

'무량(無量)이라! 만수산(萬壽山) 무량(無量)이라!'

미력한 인간의 인식으로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무한 경지를 우린 무량(無量)이라 일컫는다. 무량한 사랑, 무량한 지혜, 무량한 덕과 무량한 수명으로 실존하는 무량수불. 곧 아미타불의 세계를 우리는 극락이라 한다. 무상(無常)한 세상에서 찰나를 살다 사라지는 인간들은 만수무량(萬壽無量)을 발원하여 그토록 간절히 극락을 염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만수산 무량사에는 대웅전 대신 아미타불을 주불(主佛)로 한 극락전만 있다.

a

애기똥풀도 모르는 게 이 땅의 시인이라며 살아온 자신이 부끄럽다고 말했던 안도현. 예쁜 애기똥풀을 무량사 입구에서 한 컷 잡았다 ⓒ 장권호

잎과 꽃이 살을 섞는 4월의 산하

서둘러 떠난다고는 했지만 토요일 수업 마치고 이것저것 짐 챙겨 집을 나선 것이 오후 2시다. 호남고속도로 전주 나들목을 거쳐 전주-군산간 국도로 빠져나가 금강하구언 둑을 건너면 바로 장항 땅이다.

금강을 따라 이어지는 68번 국도와 북으로 이어지는 29번 국도 변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주변 풍광이 눈에 들어온다. 주변 풍광을 충분히 둘러보며 여유있게 달리는 국도 운행이 고속도로 질주보다 더 편안하다.

잎과 꽃이 서로 살을 섞어 환상적 색조를 이루는 4월의 산하는 지금이 절정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잿빛 가지들 사이로 이제 막 터지는 연둣빛 신록이 비치는가 싶더니, 어느새 연분홍이 고운 산벚꽃, 진달래, 철쭉, 산도화가 초록으로 번지는 잎들과 어우러져 물감을 풀어놓은 듯 곱다.

4월의 산하는 날마다 혁명 중이다. 서천을 거쳐 부여군 외산면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오후 다섯 시가 넘었다.

a

텅 빈 도솔암에 주인은 어디가고 고무신만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 장권호

상가와 접한 일주문을 지나 개울을 건너면 이내 천왕문이다. 널찍한 절 마당 위로 만수산 자락에 걸린 해가 사선으로 비켜든다. 한낮의 관광객들이 모두 돌아가 버린 한적한 절집 마당엔 한 눈에 백제 계열임이 여실한 5층석탑 한 기(基)와 조선 중기 양식의 화려한 다포계 극락전 건물이 눈길을 붙잡는다.

a

덧없는 지상에서 무상한 민중들은 가없는 극락을 구현하고자 이다지도 화려한 극락정토를 이룩해 놓았다. ⓒ 장권호

덧없는 지상에 가없는 극락을

평지 사찰인 무량사 넓은 마당을 내려다보며 우뚝 솟아오른 2층 팔작지붕 극락전은 마치 지상에 구현한 극락인 것처럼 웅장하고 화려하다. 무상(無常)한 목숨들이 가없이 이어지는 극락정토를 염원하여 이를 지상에 축소시켜 놓으니, 이게 바로 극락전이고 무량수전인 것이다.

7년 전란이 휩쓸고 간 17세기 조선 중기. 억불숭유의 폭압 정책과 전란의 피폐한 재정 속에서도 이렇게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을 조성한 걸 보면 지상의 삶이 고달플수록 영원에 대한 갈망은 간절한가 보다.

임진·병자난 이후 거의 같은 시기에 조성된 화엄사 각황전, 마곡사 대웅보전, 금산사 미륵전 등 대규모 불사에도 전쟁으로 시달린 고달픈 민초들의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다.

a

백제 땅에 세워진 고려시대 탑으로 정림사지 5층 석탑의 손자쯤으로 보면 좋을 듯 하다. ⓒ 장권호

눈길을 절집 마당으로 돌리면 백제계 후손임이 분명한, 당당한 5층 석탑 한 기(基)와 단아한 모습의 석등이 예사롭지 않게 서있다. 낮은 기단부와 얇은 지붕돌, 처마의 살풋한 반전과 상큼한 체감률 등으로 보아 정림사지 5층 석탑에서 익산 왕궁리 석탑으로 이어지는 백제계 석탑임이 여실하다.

비록 백제가 망하고 시대가 고려로 바뀌었다 하더라도 옛 백제 석공의 유전자가 오롯이 담겨 있는 이 5층석탑을 보면 아무래도 피는 속일 수 없나 보다. 다만 몸돌이 무거워 정림사지 5층석탑에 비해 경쾌함과 우아함이 떨어지는 게 흠이다.

저녁 공양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서둘러 양화궁 뒤편 새로 조성한 전각에 모셔진 김시습의 초상화를 보러 발길을 옮긴다. 문을 열자 안쪽 어둑한 공간에서 형형한 눈빛으로 쏘아보는 불우한 천재의 눈빛에 오금이 저린다.

불을 켜자 김시습의 반신상이 비로소 온전히 드러난다. 짙고 거친 눈썹, 사선으로 쏘아보는 형형한 눈빛, 크고 두툼한 귓불, 완고함으로 뭉친 당당한 콧날과 꽉 다문 입술. 불의한 시대를 저주하고 자신을 시대와 차단해 버린 우울한 천재의 모습을 본다.

a

시대와 불화했던 천재 시인 김시습의 초상화. 매서운 눈빛, 짙은 눈썹, 완고한 콧날, 두툼한 귓불, 앙 다문 입술 등에서 고독한 영웅의 모습이 엿보인다. ⓒ 장권호

이제 절을 내려가야 할 시간이다. 아직 둘러보지 못한 태조암과 도솔암은 내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천왕문을 나서는데 낮게 깔리는 긴 여운의 동종 소리가 무량사 도량을 넘어 일주문까지 따라 온다. 들어오면서 봐 두었던 외산 소재 깔끔한 숙소에 짐을 풀었다.

"여기 마루에 앉아 저 산 좀 봐"

여느 때 같으면 몇 번 잠이 깼는데 아침까지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산세가 안온해서 숙면을 취할 수 있었나 보다. 과일 몇 조각으로 아침을 대신하고 어제 못 본 태조암과 도솔암을 향해 서둘러 나선다. 무량사 매표소 못 미쳐 우측으로 포장된 도로가 태조암 오르는 길이다.

90년 초반에 폐광된 대보탄광이 들어서면서 아스팔트가 깔린 태조암 길은 지금은 탄광도로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고 어쩌다 지나는 등산객들만 스치는 한적한 시골길이다. 태조암 오르는 길에 조망하는 만수산 산세가 참 좋다.

a

마루에 앉아 오래오래 머물고 싶은 절집. 태조암 전경 ⓒ 장권호

만수산은 금북정맥 지맥이 청양 칠갑산을 거쳐 남서로 뻗어 내리다 부여 땅에 이르러 마지막 숨을 토하듯 부려놓은 산이다. 높이에 비해 품이 넉넉하고 후덕한 산세가 예사롭지 않아, 중세의 천재 김시습이 천하를 주유(周遊)하고 생의 마지막을 만수산 무량사에 의탁했을 만큼 만수산 품안은 넉넉하고 자애롭다.

대보탄광 시절 놓았다는 대보교를 지나면 이내 태조암이다. 보살님 한 분과 노스님 한 분만이 살고 계시는 태조암에서 따끈한 차 한잔을 대접받았다. 태조암 마루에 앉아 아직도 수줍음을 간직한 올해 일흔 두 살의 곱게 늙으신 보살님과 노스님 이야기에 귀를 연다.

a

저 사립문을 열고 들어가면 누가 살고 있을지? 솜씨 좋은 여염집 살림처럼 정갈한 도솔암 ⓒ 장권호

"여기서 내 삶을 마감하고 싶어 다시 찾아 왔어."

이렇게 말문을 여신 노스님의 법명은 명효(明曉)였다. 젊은 시절 태조암에 처음 왔을 적엔 여기 마루에 앉으면 앞으로 시냇물이 흐르는 게 보였고 하루 종일 물 흐르는 소리가 도란도란 들렸단다. 그 후 50여 년을 운수납자로 떠돌다가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돌아오는 길에 들른 도솔암은 비구니 암자로, 솜씨 좋은 여염집 살림처럼 정갈하다. 푸른빛이 돌 만큼 깨끗이 씻어 놓은 흰 고무신이며 온갖 봄꽃이 만개한 화단 옆에 사알짝 열어 놓은 사립문이 정겹고 정겨운 절 집이었다.

북으로 발해 땅에서 남으로는 땅 끝까지, 이 땅 구석구석 그의 발길 닿지 않은 곳이 없었던 김시습이 어찌하여 이 궁벽한 만수산 무량사까지 찾아와 생의 마지막을 의탁하려 했는지. 50여 년을 운수납자로 떠돌던 명효(明曉) 스님의 발길을 다시 이곳으로 돌리게 한 그리움의 뿌리가 무엇이었는지.

아무래도 명효(明曉) 스님의 알 듯 모를 듯한 문답에서 답을 찾아야 할 듯싶다.

"여기 마루에 앉아서 저 산 좀 봐."

산벚꽃이 바람에 눈처럼 날리는 무상한 봄날이 가고 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광주교사신문에서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2년째 광주교사신문 12면에 주제가 있는 여행 꼭지를 맡아 집필하고 있다. 또한 광주과학고등학교에서 국어를 담당하고 있으면서 학교도서관 운동에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자식 '신불자' 만드는 부모들... "집 나올 때 인감과 통장 챙겼다"
  2. 2 '판도라의 상자' 만지작거리는 교육부... 감당 가능한가
  3. 3 [단독] "문재인 전 대통령과 엮으려는 시도 있었다"
  4. 4 쌍방울이 이재명 위해 돈 보냈다? 다른 정황 나왔다
  5. 5 카톡 안 보는 '요즘 10대 애들'의 소통법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