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모도가 내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

4월 끝자락에 떠난 석모도 기행

등록 2004.05.01 12:54수정 2004.05.01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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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석모도로...

기억이란 머리 속에 보관돼 있는 흑백 사진이다. 그 무채색의 기억이 동영상이 되려면 빛이 있어야 하고 색감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추억이라고 느껴지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내가 석모도를 안 것은 영화 <시월애>를 통해서다. 잔잔한 강물처럼 느껴지던 그 새벽녘의 푸른 바다, 그리고 여주인공의 흩날리던 긴 머리카락, 그렇게 다분히 낭만적인 멋을 낼 수 있는 곳으로 다가왔었다.


a 바다와 배,  그리고 갈매기

바다와 배, 그리고 갈매기 ⓒ 박소영

4월 끝자락에 하루 일정으로 새벽 공기를 가르며 고속버스에 올랐다. 방금 떠오른 태양빛을 참으로 오랜만에 이마에 느끼는 순간, 스르르 찾아오는 졸음도, 지난 밤의 피로도 해갈되는 것 같다. 아, 이 여유! 모든 게 빛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인간이란 역시 양지쪽에 속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임을 확인한다.

이날을 위해서 완비한 장구들을 챙긴다. 먼저 운동화와 챙이 있는 모자는 필수. 산을 탄다고 했으니 음료와 과일, 그리고 사진기. 이 정도면 모두 갖춘 셈이다.

섬으로 간다더니 산이네!

우리가 오를 해명산은 서너 시간 걸린다, 강화도에서 배를 탈 때는 갈매기들을 위해 '새우깡'을 준비하라는 말까지 인솔자로부터 듣는다. 근데 갈매기한테 새우깡을 줘도 되나?(나는 새우깡을 준비하지 않았다. 언젠가 매체에서 사람들이 새우깡으로 갈매기의 입맛을 버려 갈매기들의 생태가 파괴되고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 배를 타보는 나로서는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어떻게 그 무거운 자동차들을 그리 크지 않은 배에 모두 실을 수 있는지, 그리고 배에 왜 태극기가 나부끼는 지도 의아했다.


배의 만드는 물살을 따라오는 울음소리가 희한한 갈매기 무리. 갈매기들의 무한한 번식력이 문제라고 말했던 어느 교수의 말처럼 정말 그 많은 갈매기들이 다 어디에 있었던 건지 입이 딱 벌어진다.

a 해명산에서 본 석모도

해명산에서 본 석모도 ⓒ 박소영

이윽고 석모도에 도착, 이제부터 산에 오른다는 말과 함께 사람들은 말없이 산을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내딛기 시작했다. 시각은 오전 10시. 산 위에 오르면 무엇이 나를 기다릴까. 무엇이 나를 맞을 것인가. 목적지는 그 무슨 암벽화가 있다는 유명한 절, 보문사.


등반이 처음인 나에게 이번 코스는 좀 힘든 여정이 될 듯도 하지만 나는 입을 앙 다물고 오르기 시작했다. '산아, 거기 있어라, 내가 너에게 가리라.'

그러나 끝없는 산자락이여! 언제까지 가야 끝을 볼 것인가. 오로지 가야한다는 일념으로 매달리는 시간이다. 다리는 슬슬 풀리기 시작하고 허벅지와 엉덩이까지 아프기 시작한다.

긴 사람의 띠에서 제일 끝에 달랑달랑 매달려 가기를 두 시간. "아직도 멀었어요?"라는 내 간절한 물음에 일행은 "아직 반을 더 가야 해요!"할 뿐이다.

힘겨운 산행 끝에 얻은 자연

자연을 느끼고, 가슴에 담아 오리라는 나의 초심은 간데 없어지고 이맛살이 찌푸려지다니…. 나는 내심 '그래도 이렇게 높이 올랐으니 산의 정기를 흠뻑 들여 마셔야지'하며 자위했다.

그러고 보니 산 곳곳에 피어 있는 꽃들이 도심에서 숱하게 보아 온 꽃들임에도 다르게 보인다.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심어져 편하게 보인다고 해야 할까.

사람들의 눈을 위해 만들어진 꽃의 자리가 이곳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저 무심하게 놓여져 있는 듯하다. 그 '무심함'이란 것이 본래 '자연'의 본질이 아닌가 싶다.

a 보문사를 향한 산행의 마지막 가파른 계단

보문사를 향한 산행의 마지막 가파른 계단 ⓒ 박소영

이윽고 보문사를 눈 앞에 둔 지점, 갑작스런 낭떠러지 같은 기울기에 놀라며 그 어려운 길에 가파른 계단을 만든 것에 다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 아찔한 기울기에도 차근차근 놓여져 있는 나무 계단을 보며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 그 집요한 정신에 대해 잠시 한눈을 팔기도 했다.

그 가파른 계단을 겨우 내려오면서 갑자기 수천 개는 되는 돌계단이 하늘까지 뻗어 있는 곳에 마애존불이 있는 것을 알고는 결국 나는 포기하고 말았다. '여기까지가 끝'이라고 했는데 추가로 뻗어 있는 계단들은 나를 한없이 의지력 없는 인간으로 추락시켰다.

다시 배를 타고 외포리로 와 밴댕이 회를 먹었다. 밴댕이를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나는 과연 말 그대로 밴댕이가 멸치보다는 크고 조기보다는 작을 것이라는 말을 해가며 밴댕이를 상상했다.

어스름하게 해 지는 바다를 보며 그저 풍경이었을 이 작은 섬이 내가 힘겨운 걸음을 4시간이나 걸었다는 인연으로, 움직이는 영상으로 추억할 수 있는 그리움을 남기게 된 곳이라 생각하니 바다 위에 펼쳐진 산자락들이 이불처럼 느껴졌다.

a 밴댕이 회 한 접시.

밴댕이 회 한 접시. ⓒ 박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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