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집 앞마당에 서 있던 그 가죽나무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55>냄새조차 맡기 싫었던 "가죽순"

등록 2004.05.03 13:49수정 2004.05.04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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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가죽순 따서 끓는 물에 살짝 데쳐 고추장에 찍어 먹어 보세요

가죽순 따서 끓는 물에 살짝 데쳐 고추장에 찍어 먹어 보세요 ⓒ 이종찬




나는 내가 부족한 나무라는 것을 안다.
어떤 가지는 구부러졌고
어떤 줄기는 비비꼬여 있다는 걸 안다.
그래서 대들보로 쓰일 수도 없고
좋은 재목이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다만 보잘 것 없는 꽃이 피어도
그 꽃 보며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도 기쁘고
내 그늘에 날개를 쉬러 오는 새 한 마리 있으면
편안한 자리를 내어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내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사람에게
그들의 요구를 다 채워 줄 수 없어
기대에 못 미치는 나무라고
돌아서서 비웃는 소리 들려도 조용히 웃는다.
이 숲의 다른 나무들에 비해 볼품이 없는 나무라는걸
내가 오래 전부터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 한 가운데를 두 팔로 헤치며
우렁차게 가지를 뻗는 나무들과 다른 게 있다면
내가 본래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누군가 내 몸의 가지 하나라도
필요로 하는 이 있으면 기꺼이 팔 한 짝을
잘라줄 마음 자세는 언제나 가지고 산다.
나는 그저 가죽나무일 뿐이기 때문이다.

(도종환 '가죽나무' 모두)


붉은 황토가 잘 다져진 내 고향집 앞마당에는 전봇대보다 조금 더 키가 큰 가죽나무가 세 그루 있었다. 한 그루는 사립문 왼쪽 닭장 옆에 삐죽하게 서서 큰집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두 그루는 사립문 옆 오른쪽 담벽에 우뚝 서서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처럼 산수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가죽나무는 부모님께서 내 고향집으로 이사를 오기 전부터 떨감나무 한 그루와 함께 그곳에 문지기처럼 우뚝 서 있었다고 했다. 처음 그 집으로 이사를 왔을 때 아버지께서는 그 가죽나무를 모두 베어버리려 하셨나 보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그 가죽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셨다고 했다.

a 가죽나무 끝에 매달린 여린 가죽순

가죽나무 끝에 매달린 여린 가죽순 ⓒ 이종찬

내 어머니의 말씀은 그 가죽나무가 언뜻 보기에는 볼품이 없고 달리 쓰임새가 없어 보이지만 그 나무가 거기에서 자라고 있는 것은 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는 거였다. 또한 어머니께서는 처음 이사를 와서 멀쩡한 나무를 벤다거나 무언가를 많이 뜯어 고치는 것은 그리 좋지 않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았다.

"김산 집 자슥들이 와 자꾸 밖으로 나도는지 아능교?"
"아, 허우대만 멀쩡하다꼬 다 사람이라카더나. 농사는 짓기 싫고, 머리에 든 거는 하나도 없으이 만날 빈둥거리다가 싸움박질이나 하고 댕기지."
"그기 아이라카이요(아니라니깐요). 그 집 자슥들이 그리 된 것도 재작년에 오래 된 대추나무로 비고(베고) 나서부터 그리 됐다카이요. 사람만 혼이 있는 기 아이고 나무도 오래 묵으모 혼이 생긴다카이요."
"귀신 씨나락 까묵는 소리 하고 있네."



아버지의 말씀처럼 그 가죽나무는 우리집 앞마당에 가지를 그물처럼 펴고 있는 박태기나무와 감나무에 비해 정말 볼품이 없는 나무처럼 보였다. 하지만 마음이 몹시 여린 어머니께서는 몹시 하찮아 보이는 것들도 그냥 넘기지 않았다. 마당에 난 작은 풀꽃 하나도 결코 소홀히 대하지 않았다.

가까운 불곡사에 열심히 다니셨던 어머니께서는 살아 있는 생명체는 다 이유가 있어 거기에서 자라고 있다고 하셨다. 또 어머니께서는 길을 가다가도 무심코 나뭇가지를 꺾거나 나뭇잎을 따지 말라고 하셨다. 내가 꼭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만 따라고 하셨다. 아무런 쓸 곳도 없이 멀쩡한 생명체를 왜 죽일 것이며, 그렇게 죽이는 것이 곧 대자연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하셨다.


a 우리들이 개죽나무, 개옻나무라고 불렀던 진짜 가죽나무.

우리들이 개죽나무, 개옻나무라고 불렀던 진짜 가죽나무. ⓒ 이종찬

"인자(이제) 가죽순이 올라올 때도 됐는데..."
"올개(올해) 가죽순이 디기(많이) 늦게 올라오는 걸 보이(보니까) 보릿고개도 질기(길게) 가것구먼."


그 해 우리집 가죽나무에서는 가죽순이 좀처럼 올라오지 않았다. 원래 가죽순은 우리집 앞마당에 있는 박태기 나무에서 연보랏빛 꽃이 지고 하트 모양의 잎사귀가 예쁘게 피어날 때쯤이면 고사리 모양의 붉으죽죽한 싹을 쑥쑥 내밀기 시작했다.

근데 그해 세 그루의 가죽나무는 꼼짝을 하지 않고 있었다. 감나무 가지에서 연초록빛 새순이 마악 돋아나고 있는 데도 말이다. 아니, 아니. 가죽나무 꼭대기에 매달린 서너 개의 가지에서 분명 새순이 삐죽 보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일주일이 흘러가도 늘 그대로였다. 아버지께서도 그 가죽나무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밤마다 누가 장난을 치는 거 아이가. 저럴 리가 없는데."
"누가 지 죽을 줄 모르고 저 높은 곳에 올라가서 가죽순을 딸끼요. 쪼매마(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하여튼 사람들 심뽀하고는. 아, 내가 해마다 가죽순을 따모 오데(어디) 내 혼자 묵더나. 저거들 하고 다 나눠먹을 낀데... 쯧쯧쯧."


a 우리 마을사람들은 '참죽나무'를 '가죽나무'라 불렀고, 진짜 '가죽나무'는 '개죽나무' 혹은 '개옻나무'라고 불렀다.

우리 마을사람들은 '참죽나무'를 '가죽나무'라 불렀고, 진짜 '가죽나무'는 '개죽나무' 혹은 '개옻나무'라고 불렀다. ⓒ 이종찬

그랬다. 해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집 가죽나무에서 가죽순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길다란 장대 끝에 시퍼런 조선낫을 매달아 가죽순을 땄다. 아버지께서 가죽나무 세 그루에 매달린 가죽순을 따기 시작하면 마을 어르신들이 우리집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가죽나무 꼭대기에서 툭툭 떨어지는 가죽순을 먹기 좋게 다듬었다.

가죽나무 세 그루에서 따낸 여린 가죽순은 금세 한 소쿠리를 채우고도 남았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어머니께 가죽순을 펄펄 끓는 물에 살짝 데쳐 오게 했다. 그리고 마을사람들과 마루에 걸터 앉아 가죽순을 안주로 삼아 허연 막걸리잔을 기울였다. 붉은 고추장에 그 여린 가죽순을 푸욱 찍어서 말이다.

"니도 한번 묵어볼래?"
"아...아입니더."
"아나."
"... 퇘퇘퇘!"
"하긴 너거들 입맛에는 쪼매 안 맞을끼라."
"으~ 이런 거로 우째 묵습니꺼?"


그 날 나는 마을 어르신께서 고추장에 찍어주시는 그 가죽순을 입에 넣자마자 곧바로 내뱉었다. 맛이 정말 이상했다. 입에 넣은 가죽순을 한번 깨물자마자 가죽나무 특유의 비릿하고도 희한한 맛이 느껴지면서 이내 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가죽순이라면 아예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들었다.

a 내 고향집 앞마당에는 가죽나무 세 그루가 장승처럼 서 있었다

내 고향집 앞마당에는 가죽나무 세 그루가 장승처럼 서 있었다 ⓒ 이종찬

하지만 우리집 가죽나무는 일주일이 지나면 또다시 여린 가죽순이 고사리처럼 고개를 자꾸 내밀었다. 그런 까닭에 우리집과 마을사람들의 오월 한 철 밥상 위에는 끼니 때마다 여린 가죽순이 반찬으로 올라왔다. 그때마다 나는 그 가죽순의 냄새조차 맡기 싫어 밥상에서 돌아앉아 쌀알이 몇 개 섞인 시커먼 보리밥을 물에 말아 후루룩후루룩 먹었다.

해마다 이맘 때 비음산 자락 곳곳에 선 가죽나무에서 여린 가죽순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고향집 가죽나무 세 그루가 못 견디게 눈에 밟힌다. 그리고 그 때 아버지처럼 긴 장대에 조선낫을 매달아 여린 가죽순을 따고 싶다. 끓는 물에 살짝 데친 그 가죽순을 고추장에 푸욱 찍어 허연 막걸리 한 잔을 쭈욱 들이키고 싶다.

아버지
시퍼런 조선낫 묶은 장대를 주셔요
따내도 따내도 쑤욱쑥 돋아나는 가죽순 한묶음 따다가
아버지 무덤가에 놓아드릴게요
아내가 데친 가죽순 안주 삼아
조선 토종 막걸리 한 잔 드셔요
그리하여 당신의 아들 딸에게
슬픔처럼 자꾸만 돋아나는 저 가죽순 따는 법
제대로 가르쳐 주셔요
이 더러운 세상 가죽나무처럼 살아가는 법
다시 한번 가르쳐 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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