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탱탱볼은 누가 찾아야 할까

아내와 조카의 대화를 보며 생각한 '사랑'과 '이해'

등록 2004.05.05 19:49수정 2004.05.05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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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아이들 표정(가운데가 정훈이)

아이들 표정(가운데가 정훈이) ⓒ 안준철


올해 나이 8살인 정훈이는 저를 고모부라고 부릅니다. 사내아이치고는 얼굴이 참 곱살하고 예쁜 아이지요. 그래서 그런지 친척 누이들은 정훈이를 볼 때마다 "더 이상 자라지 말고 그대로 있어라"하고 악담(?)을 해대곤 합니다. 물론 정말 그런 일이 생기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정훈이는 아이답게 욕심도 많고 고집도 보통이 넘습니다. 좀 심할 때는 요 녀석이 얼굴값을 하나 싶기도 합니다. 한 번 고집을 피우면 웬만한 회유책으로는 고집을 꺾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난공불락의 못 말리는 조카의 고집을 꺾은, 꺾었다기보다는 제 스스로 고집을 접게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정훈이의 고모입니다. 제 아내이기도 하지요.

아침에 거실 소파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데 정훈이가 제 엄마에게 뭐라 칭얼대면서 거실에 깔린 양탄자를 자꾸만 들쑤십니다. 알고 보니 어제 가지고 놀던 탱탱볼을 잃어버린 모양입니다. 녀석이 자꾸만 양탄자를 발로 들쑤신 것은 탱탱볼이 그 안에 있나 하고 찾아보려고 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제 엄마에게 탱탱볼을 찾아내라고 무언의 시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탱탱볼은 말 그대로 고무처럼 탱탱한 작은 공입니다. 마루바닥에 공을 던지면 천장 가까이 튀어오르는 놀랄만한 탄력을 보여주지요. 정훈이가 잃어버린 탱탱볼은 전북대학교 과학축제 행사 중 하나인 탱탱볼 만들기에 참가했다가 그곳에서 얻어온 것입니다. 왕자풀에 붕산용액을 섞은 것을 나무 젓가락으로 말아서 그것이 굳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손으로 떼어내어 계속 문지르면 고무처럼 탱탱한 공이 된다고 합니다.

정훈이는 탱탱볼을 잃어버렸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제조과정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하루가 지나자 탄력을 잃고 쭈글쭈글해져버린 것이지요.

문제는 어제는 탱탱했는데 오늘은 쭈글쭈글해져버린 공의 변화를 아이가 이해하지 못한다는데 있었습니다. 저만해도 어린 조카가 괜한 고집을 피우고 있는 것으로만 여기고 있었는데 아내는 그것을 '이해'의 문제로 바라본 것이지요.

"정훈아, 나중에 엄마가 나이를 먹으면 할머니처럼 늙어 안 늙어?"
"늙어."
"늙으면 어떻게 돼? 정훈이처럼 탱탱해? 아니면 할머니처럼 쭈글쭈글해?"
"쭈글쭈글해."


"그럼 엄마가 나중에 쭈글쭈글해지면 엄마야 엄마 아니야?"
"엄마야."
"그럼 정훈이가 엄마더러 쭈글쭈글해졌다고 엄마가 아니라고 하면 엄마가 섭섭해 안 섭섭해?"
"섭섭해."

"이 탱탱볼도 마찬가지야. 어제까지는 탱탱했지만 하루가 지나서 속에 있는 가스가 빠져나가서 모양이 변한 거야. 보통 며칠은 가는데 이건 만들 때 잘못 만들어서 이렇게 하루만에 쭈글쭈글해진 거야. 그럼 이거 누구 거야? 정훈이 거 맞아 안 맞아?"
"정훈이 거 맞아."
"어이쿠 내 새끼. 우리 정훈이가 이렇게 이해력이 빨라요."


여기까지 아내와 조카녀석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청량음료라도 마신 듯 기분이 상큼해진 저는 아내의 무릎에 앉아 환하게 웃고 있는 조카를 바라보며 이렇게 한 마디 했습니다.

"정훈아, 이 탱탱볼이 정훈이에게 섭섭했겠다. 정훈이 것인데 아니라고 해서."
"공은 안 섭섭해."
"응? 왜?"
"공은 안 살았으니까."
"맞다. 우리 정훈이가 고모부보다도 더 똑똑하네."

아내에게 한 번, 저에게 또 한 번, 두 번씩이나 칭찬을 들은 정훈이는 한껏 기분이 좋아 보였습니다. 아내와 또박또박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조금 전에 막무가내로 떼를 쓰던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저는 어린 조카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저도 아내의 흉내을 내어 이렇게 넌지시 말을 던져 보았습니다.

"정훈아, 만약 정훈이가 탱탱볼을 정말 잃어버렸다고 해. 그럼 그 잃어버린 탱탱볼은 누가 찾아야 할까? 유치원 다니는 애들은 엄마더러 찾아달라고 하겠지? 그런데 8살 먹은 정훈이는 어떡할 거야?"
"내가 찾아."

a 옥상에서 노는 아이들

옥상에서 노는 아이들 ⓒ 안준철

저는 달라진 조카녀석의 태도를 보면서 아내에게 새삼 놀라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아들을 키우면서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아내가 아들을 덜 사랑했다거나 관심을 덜 가졌다는 말을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겠지요. 어쩌면 아내는 아들이 아닌 조카의 문제였기에 한 걸음 뒤로 물러설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것. 혹은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추어 아래(under)에 서(stand) 있는 것이 바로 이해(understand)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부모 자식간에는 심리적 거리가 너무 가까운 나머지 마치 자기 자신을 대하듯 함부로 말하는 경향이 있지요. 또한 감정이 앞서다 보면 이성적이고 생산적인 대화를 할 수 없게 됩니다.

체로키 인디언의 혈통을 일부 이어받은 포리스터 카터의 자전적 소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에는 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당신을 이해해(I kin ye)"라는 말을 하며 서로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그들에게 사랑과 이해는 같은 단어였지요. 그의 할머니는 어린 주인공에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랑할 수 없고, 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더더욱 없다"는 말을 해주기도 합니다.

요즘 아이들에게 "부모님이 널 사랑하니?"하고 물어보면 당연한 것을 물어보느냐는 식으로 대답을 하는 아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질문을 바꾸어 "너희 부모님이 널 이해하니?"하고 물어보면 상황은 달라지겠지요.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반쪽 사랑을 받고 있는 셈입니다. 반쪽 사랑만으로 행복한 아이는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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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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