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로'의 사회학

영국과 우리 나라의 산책로를 이용하며 드는 단상

등록 2004.05.06 21:01수정 2004.05.07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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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회사를 휴직하고 영국으로 간 이후부터 갑자기 불어난 체중을 관리하기 위해 나는 조깅을 시작했다. 다행히 집과 학교 주위에 오솔길 같은 모양새의 산책로가 있어 거의 매일 그곳을 달리곤 했었다. 한바탕 달리고 나면 온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 흡사 신체의 온갖 노폐물이 땀으로 다 빠져나가는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조깅의 매력은 천천히 달리는 도중에 불현듯 신선한 아이디어를 얻거나 복잡한 생각들을 차분히 정리할 수 있는 데 있었다. 사실 암기보다 창의성을 요구하는 영국의 학교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매 과제물마다 새로운 아이디어 혹은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수없이 많은 생각의 병목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더욱 힘차게 달렸고, 또 달리면서 힘을 얻기도 했었다. 이후 한국에 돌아온 요즘도 나는 매일 조깅을 즐기고 있다. 다행히 내가 사는 집 주위에 개천을 끼고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곳에서 한 달 동안 조깅을 하면서 나는 영국의 산책로와의 몇 가지 큰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영국에서는 산책로를 달리면서 나는 한 번도 다른 산책객들과 부딪히거나 남들로 인한 진로 방해 때문에 내가 달리는 속도를 줄일 필요성을 느낀 적이 없었다. 모든 산책객들은 항상 뒤에서 달려오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혹시 있는지 여부를 살펴서 그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길을 열어 주며 걷기 때문이다.

또한 애완견의 천국인 영국에서는 개를 키우려면 법에 의해 매일 일정 시간 이상의 산보를 시켜야 하는데, 대부분의 영국 사람들은 개의 목에 끈을 묶어서 산책을 즐기기 때문에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비닐장갑과 봉투를 상비해서 혹시 개가 용변을 보면 장갑으로 배설물을 주어 봉투에 담아 가곤 한다. 따라서 영국의 산책로에는 수없이 많은 개들이 주인을 따라 걷지만 이로 인해 내 조깅의 유쾌함이 반감되거나 방해를 받았던 기억은 없다.

우리 나라도 4년 사이 부쩍 중노년층의 산책객과 애완견의 수가 늘어났음을 조깅을 하면서 느낄 수 있었다. 산책로를 달릴 때면 간혹 그리 유쾌하지 못한 경험을 하게 된다. 우선 여러 사람들이 어울려 산보를 하는 경우를 보면, 대부분이 옆으로 나란히 서서 걷기 때문에 산책로의 통로는 완전히 막혀 버리기 십상이다. 또한 개들을(특히 덩치가 큰 개들의 경우) 산보시키는 경우에도 별다른 통제 수단 없이 개들을 방치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특히 개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큰 불편과 부담을 주기도 한다.


이러한 일들을 경험하면서 나는 몇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사회라는 공공적 공간은 다양한 이해 관계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기에 영국의 경우 사회성의 근저에는 타자에 대한 배려와 양보라는 사상이 깔려 있다. 이것이 곧 공익성을 담보하는 엔진인 것이다. 즉, 공공적 공간은 내 것이 아니라 남들과 공유되어 함께 사용되는 것이라는 사회적 합의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하고 싶은 것과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의 일정 부분을 스스로 제약하고 타자의 목소리를 청취하고 그들에게 양보할 부분은 흔쾌히 양보할 때 비로소 사회의 다원적 참여와 의견은 사회적 공공선을 구현하는데 순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우리 동네의 산책로의 사람들처럼 여럿이 걷는다고 길 전체를 막아 버리거나, 그들이 그들의 애완견을 무척 아끼고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냥 자유롭게 내 버려 둔다면, 뛰어 오는 사람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인라인을 즐기는 사람들, 개를 몹시 싫어하는 사람들 등 다양한 취향과 기호 아래 산책로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큰 불편을 주는 행위가 될 것이다.

서양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 조상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사상들 중에서 원융무애(圓融無碍)의 사상이 있다고 한다. '하나로 융화될 때 걸림이 없다'는 의미이다. 이제 남과 융화하는 방법, 더불어 사는 사회의 행복, 그리고 타자의 의견을 청취하는 방법론을 찾아 나설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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