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깊은 속내를 아십니까?

인내와 기다림으로 살아오신 어머니

등록 2004.05.07 16:57수정 2004.05.07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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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우리 어머니.

우리 어머니. ⓒ 느릿느릿 박철

이제 나이 오십줄에 들어 지난 세월이 어떻고 하면서 꺼내 놓는 넋두리는 얼마나 자신의 삶에 대한 진솔한 성찰을 담아낼 것인가 하는 우려를 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목사에게 있어서 제일 괴로울 때에는 자신이 강단에서 전한 메시지나, 또는 교우들과의 상담, 그 밖의 어떤 관계에서든지,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못하고, 살아가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어렴풋하게 느끼게 되었을 때일 것입니다. 그럴 때에는 참으로 난감하고 고개를 들 수 없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깊은 내면의 성찰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아무런 고민도 없이 약장사처럼, '저질 코미디언'처럼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것도 군대식의 요령에 익숙하여 쉽게 현실에 아부하고, 자신의 삶의 결과에서 빚어지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양두구육의 가면을 쓰고 적당하게 합리화시켜 버릴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결국은 자신의 삶에 대한 회상도 현재 자신의 삶의 실천에서 시작해야 하겠지요? "목회는 철저한 삶의 실천(프락시스)이다"는 말은 목사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삶의 명제가 될 것입니다.

솔직히 저 개인에게 있어서 제일 괴로운 때는 아마, '어버이 날'인 것 같습니다. '부모님의 은혜', '어머니의 마음과 사랑' 운운하면서도 실상은 내가 교우들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생각하면서 늦가을 갈대 바람처럼 우옵니다. 나의 가식적인 삶에 대해서 진저리를 치면서도 그 비뚤어진 삶의 자세는 여전히 아무런 진전도 없이 되풀이 될 뿐입니다.

어떻게 보면 나는 기독교 신앙에 위배되는 삶을 살아왔고, 그러한 왜곡된 삶을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교우들에게 강요하면서 살아온 영락없는 얼치기, '낙제 목사'였습니다. 내일 어버이날을 맞아서, 비로소 나는 철이 난 인간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동안의 불효에 대한 용서를 빌면서 진정으로 거듭나고 싶습니다.

입하가 막 지나 여름의 길목에 들어섰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끄집어 낼 것인가? 과연 이러한 글줄이 그나마 어머니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 것인가? 망설이면서 조심스럽게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여기에서 소개되는 이야기는 저의 어머니의 삶의 한 단편에 지니지 않겠지만. 우리 어머니는 그 시절 대부분의 어머니가 그러했듯이 참으로 억척스럽고 투박한 삶을 살아 오셨습니다. 한마디로 우리 어머니의 생애는 고난으로 점철된 생애이셨습니다.

제가 어렸던 시절, 우리 집이 강원도 화천군, 논미리라는 동리에서 살 때입니다. 아버지는 경찰 공무원 퇴임 후, 그 분의 방만한 객기로 인해 거의 집에 돌아오지 않으시고 그 여파로 인해 우리 집의 가세는 형편없는 가난의 연속이었고, 자연히 어머니가 사남매의 생활을 꾸려나가야 했습니다.


a 김구철 목사와 우리 아버지 박응남 권사

김구철 목사와 우리 아버지 박응남 권사 ⓒ 느릿느릿 박철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는 가난한 살림이셨지만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으셨고, 언제나 여유롭게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이끌어 나가셨습니다. 다행히 어머니는 손재주가 많으셔서 못하는 일이 없으셨습니다. 그 당시 어디서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집에 조그만 손재봉틀이 있었는데 그걸 살림 밑천으로 삼아, 근처 군인 부대에서 찾아오는 군인들의 군복 수선을 해 주면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해 나가셨습니다. 그 때 가위질을 얼마나 많이 했으면 오른쪽 넷째 손가락이 지금도 펴지지가 않습니다.

어머니의 펴지지 않는 손가락은, 어머니뿐만 아니라 우리 집안의 가족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오늘 우리 4남매가 있기까지 우리를 지탱해 준 상징적인 버팀목이요, 상흔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날인가 어머니는 늦은 밤에 자식들을 불러 앉혀 놓으시고 무엇인가 교훈적인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었는데, 나는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면서 흐느껴 운 적이 있었습니다.


"너 왜 우니? 어디 아프니? 말해 봐. 왜 우니?" 어머니의 그런 질문에 얼른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엄마가 불쌍해서 울어요"라고 대답한 일이 있습니다. 아마 그 때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습니다. 무슨 까닭인지 그때의 어머니의 표정이 지금까지 내 마음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 시절, 우리 집안 살림이 얼마나 빈궁했던지 어머니는 "밥 한번 실컷 먹어 보았으면 좋겠다"할 정도로 당신은 늘 허기진 배로 밤새 재봉을 돌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에게서는 가난한 사람의 궁기(窮氣)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삶의 비결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우리 어머니는 강원도 철원군, 지금은 대한 수도원이 있는 장방산이라는 동리에서 태어나셨고, 같은 동리에 사셨던 우리 아버지 박응남에게 시집을 오셨습니다. 시집 오신 지 몇 해 되지 않아 6·25 전쟁이 터졌고, 당시 철원이 이북이었던 탓으로 소위 이데올로기 양극화 문제로 인하여 우리 아버지는 인민군들에게 곤욕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게다가 우리 집안은 그 때 전쟁으로 인해 뿔뿔이 흩어지게 되어 지금도 생사를 알 수 없는 비극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탈출 겸 피신 차, 경기도 반월로 피난 행렬들을 따라 남하하셨는데 거기서 겪은 고생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때 저의 부모님은 어느 교회 목사님의 사택 헛간을 빌어 신세를 지며 살았습니다. 거기서 어머니는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 다행히 목숨을 건지셨습니다. 그리곤 그 북새통 전쟁 마당에서 된장과 보리밥이 먹고 싶어 깡통을 들고 동냥을 나가셨다고 합니다.

아직 염병의 후유증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여 비틀거리면서 머리는 산발을 한 채 말입니다. 그러다 집이 마치 대궐 같은 부잣집에 찾아가 사정사정하여 된장을 한 숟갈 얻어 가지고 나왔는데, 조금 가다보니 또 부잣집이 나오길래 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집을 지키는 하인쯤 되는 여자가 소리를 버럭 지르면서 "야, 이년아! 금방 있는데 또 얻으러 왔어!"하더라는 것입니다. '어머니와 된장 이야기'는 우리 집안의 가족사를 넘어서 또 다른 우리 민족의 상흔을 대하는 것 같은 숙연함을 동시에 느끼게 합니다.

a 김구철 목사와 우리 어머니 장옥선 권사

김구철 목사와 우리 어머니 장옥선 권사 ⓒ 느릿느릿 박철

휴전 이후, 저의 아버지는 자신의 겪은 전쟁의 고초를 보상이라도 할 생각이셨던지 곧바로 경찰에 투신하게 됩니다. 이 와중에서 누나와 제가 태어났고, 이 때부터 저의 어머니의 고생길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저의 할아버지는 단명을 하셨고, 할머니가 계셨는데 전쟁 직후 중풍에 걸리셔서 말씀도 못하시고 하반신을 쓸 수 없는 불구가 되셨습니다. 10년이 넘도록 저의 어머니는 당신의 시어머니의 똥 수발과 음식수발을 하셔야만 했습니다. 중풍과 노망이 겹쳐서 걸핏하면 소리를 지르시고 벽마다 똥칠을 하여서 그 뒷수발을 한다는 것은 보통 인내를 요구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방만한 생활은 당신께서 손수 거두셨습니다. 제 밑으로 남동생이 둘이 생기고 나자 저의 아버지는 가장으로서의 본래의 자리로 복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경찰 공무원에서의 절제되지 못한 삶의 스타일로 인해서 걸핏하면 하면 외박을 하셨고, 술에 취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사업은 비교적 성공적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집안의 형편이 크게 나아진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쯤, 아버지는 심한 독감으로 자리에 누웠다가 약방에서 지어준 잘못 조제된 약을 잡수시고 만 2년 동안 죽은 송장과 같은 최후의 갈림길에서 오고가는 악몽의 세월을 보내셔야 했습니다. 아버지의 업보이셨습니다. 나는 그때 인간에게는 공짜 라는 것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니의 병간호는 물론이거니와 우리집 전체는 살얼음 같은 차가운 냉기를 맡으면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지냈습니다. 어머니는 초인적인 정성을 쏟으시면서 당신의 남편을 섬기셨습니다. 그 시절, 그 막막한 고통과 두려움으로 살았던 그때에 어머니가 다니셨던 화천제일교회에 김구철 여자 목사님께서 매일 밤 찾아오셔서 송장 같은 아버지의 눈길과 마주치면서 언제나 그윽한 표정으로 우리 아버지의 병든 육신을 안아 주셨습니다.

그 분은 언제나 소리 없이 찾아오셔서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한 우리들에게
한없는 위로와 평화의 고운 선물을 한 아름 안겨주고
소리 없이 조용히 떠나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으셨다는 그 분은
짧은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외로운 사슴처럼
찾아오셔서 아버지의 병든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그 분은 언제나 십 월의 맨드라미처럼
보라 빛 치마에 하얀 저고리를 입으시고
슬픔과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우리들에게
한없는 고요와 진실을 안겨주고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어떠한 가식도 위엄도 없이
병들어 죽어 가는 자의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그 분의 방문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의 방문>


a 어머니의 풍금 반주에 맞춰 아버지가 찬송을 부르신다.

어머니의 풍금 반주에 맞춰 아버지가 찬송을 부르신다. ⓒ 느릿느릿 박철

어머니의 정성과 김구철 목사님의 간절한 기도로 아버지의 병세는 호전되어 다 없어졌던 머리카락이 다시 나기 시작했고, 시커멓게 썩었던 피부에 살이 돋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우리집의 형편은 부엌의 살림 몇 가지와 이불 몇 가지만이 달랑 남아있었을 정도였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재기는 그때부터 시작되었고, 철저한 신앙인으로, 생활인으로 새로운 생의 돌파구를 찾으셨습니다. 아버지는 그때부터 교회의 궂은일에는 발 벗고 나섰습니다. 아버지가 하시는 사업은 다행히 번창하기 시작했고, 그의 생활의 대부분은 교회일과 목회자를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러한 아버지의 돌연한 변화는 우리 식구들에게도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그분의 교회와 목사를 섬기는 일은 그 일로 해서 자신의 치적을 자랑하려는 공적주의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냉랭했던 가슴이 열어지자, 그분을 누구에게나 다정하게 다가서서 사랑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그분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나서 어느 해인가는 한 해 동안 스무여나 무게의 손목시계를 목회자들에게 선물을 했던 일이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가난한 목사를 보면 당신의 온정을 참지 못해, 받는 사람이 부담스럽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정말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여지까지 살아오면서 우리 아버지처럼 진실한 기도를, 정말 가슴에 와 닿는 기도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묘한 힘과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러시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가 올해로써 꼭 23년이 되었습니다. 저는 언젠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이런 시를 적어 보았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속절없이 자꾸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이른 아침 베개를 깔고 엎드려
지난날의 삶을 돌이켜 볼 때면
어김없이 당신은 엷은 미소를 띠고 나타나곤 하십니다
아, 나도 자식 낳고 살게 되니
십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마음을 알 것만도 같습니다
낙제 점수를 면치 못할 목회를 하면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한없이 부대끼면서
못 이루는 밤에는
어김없이 당신은 나타나셔서
나를 엄하게 꾸짖곤 하십니다
아버지 오늘 아침은 새벽 기도회를 다녀와서
너무나 섧고 외로 와서 엉엉 울었습니다
이 못난 자식이 당신을 그리워하면서 울었습니다
아버지, 그리운 아버지

<아버지 생각>


a 철원수도원에서. 아버지와 옛 친구들

철원수도원에서. 아버지와 옛 친구들 ⓒ 느릿느릿 박철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그 당시, 우리 형제들은 대학과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막막한 시절에 우리 어머니는 집을 팔아 전세로 들어가는 등 살림을 대폭 줄여야 했고, 아버지가 남겨 놓은 얼마 되지 않은 돈으로 버티면서, 다행히 어머니의 알뜰한 살림 덕분으로 학업을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 후로도 우리 어머니는 오늘날까지 공장 생활을 해오셨습니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우리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지만, 그동안 어머니의 속내를 살필 기회를 가져 보지도 못하고, 우리는 어머니를 외롭게 버려두고 지내왔습니다. 어머니, 당신께서는 아버지가 작고하신 후, 외롭고 쓸쓸한 인생의 뒤안길에서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하셨겠습니까?

당신은 지금까지 자식들로부터 한 조각의 위로도 받으신 적이 없이, 초연하게 당신 몫의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어머니, 당신은 지금까지의 희생과 헌신적인 삶에 대해서도 아무런 내색 없이 마음의 평온을 유지해 오면서 살아오셨습니다. 그 숱한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어 오면서도 오롯하게 어머니 몫의 삶을 살아오셨던 것은 과연 어머니, 우리 어머니이셨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의 다양한 인생 여정에 대해서, 어머니의 고통으로 점철된 지난날에 대해서 할 말을 잃습니다. 어머니 당신은 우리 가족사의 보이지 않는 행간에도 당신의 어진 마음씀씀이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우리의 허물을, 불효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부디 건강하시고 손자들의 재롱을 지켜보시면서 더욱 풍요롭게 살아가십시오. 우리는 언제나 어머니의 밝은 미소가 보고 싶습니다. 어머니의 뜨거운 사랑은 저희들의 가슴 속에 언제나 환한 등불이 되어 우리의 갈 길을 비춰줄 것입니다. 이제 고생의 문지방을 넘어서 저희들에게 오십시오.

올해 칠순을 맞는 우리 어머니는
그 외롭고 쓸쓸한 삶의 풍상을 머리에 이고서
오늘날까지 당당하게 살아오셨습니다.
억척스러운 노동과 말 못할 시련 가운데서도
당신은 조금도 비굴하시거나 연약하지 않으셨습니다.
올해 칠순을 맞는 우리 어머니는
우리 민족의 쓰라린 역경 가운데서도
연재나 단아한 미소를 잃지 않으시고
할머니 병간호와 아버지 수발과 자식 뒷바라지로
당신의 소중한 청춘을 아낌없이 바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어머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삶의 진정한 모범을, 가치를 우리에게 남겨 주셨습니다.
아무런 대가도 보상도 바라지 않으시고
조용한 인내와 기다림으로
당신의 한 많은 세월을 삭이며 오롯하게 살아오셨습니다.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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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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