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성을 여는 행운의 열쇠 '앵초'

내게로 다가온 꽃들(50)

등록 2004.05.10 10:01수정 2004.05.10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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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앵초
큰앵초이선희
제주는 두 계절을 동시에 품고 있는 땅입니다. 겨울과 봄, 봄과 여름, 여름과 가을, 가을과 겨울이 모호하게 엇물려 있음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봄이 지난 듯한 즈음, 한라산을 오르면 이제 막 봄이 시작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확연히 구별될 정도의 계절 차이가 공존하기에 중산간지역이나 평지에서 지난 봄을 만끽하지 못했다면, 발품을 팔아 한라산으로 향해 볼 것을 권합니다. 뒤늦게나마 봄의 기운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

더군다나 평지에서는 쉽사리 볼 수 없는 흰양지, 흰그늘용담, 세바람꽃, 좀민들레에서부터 이번에 소개하는 앵초까지 야무지게 고운 빛깔로 피어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앵초는 종류도 많아서 흰색 꽃을 피우는 흰앵초와 잎이 단풍잎을 닮은 큰앵초, 바위에 붙어 자라는 설앵초가 있습니다. 제가 한라산에서 만난 것은 진분홍색의 큰앵초와 계곡 바위에 피어있던 설앵초입니다.


김민수
앵초의 학명은 'Primula sieboldi'인데, 영어로는 '최초의 장미'라는 뜻의 프림로즈(primrose)라고 합니다. 5월의 꽃으로 잘 알려진 장미의 선조가 되는 셈이죠. 이른 봄에 피어나는 앵초는 꿀벌을 만나기도 전에 시들어 버리기에 '시집가기 전에 죽는 꽃'으로도 불립니다. 이쯤이면 '젊은 날의 슬픔'이라는 꽃말이 와 닿을 것입니다.

운 좋게 꽃가루가 바람을 타고 날아와 수술에 앉으면 열매를 맺을 수도 있겠지만, 앵초는 곤충들의 날갯짓이 드문 이른 봄에 피어나 열매를 맺기가 어렵습니다. 시집도 가기 전에 죽어버린 가련한 처녀의 슬픈 운명을 앵초도 간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슬픈 꽃말과 달리, '행운'이라는 꽃말도 있습니다. 따스한 봄날 흔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앵초의 예쁜 모습을 자생지에서 만나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행운'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러고 보니 꽃말이 없는 모든 꽃들에게 '행운'이라는 꽃말이나 '행복'이라는 꽃말을 달아주면 참 좋을 것도 같습니다.

김민수
앵초는 한자로 '櫻草'라고 쓰는데, 분홍빛 꽃을 피우는 앵두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앵초는 '풍륜초'라고도 불리는데 꽃 모양이 영락없이 풍차를 닮았습니다. 바람에 빙글빙글 돌아가는 풍차, 늘 그 자리를 도는 것 같지만 그 움직임으로 방아도 찧고, 전기도 만듭니다. 바람을 품고 돌아감으로 인해 또 다른 것을 창출하는 풍차와 닮은 꽃으로 바람개비를 만들면 풍륜초의 그윽한 향기가 바람을 타고 온 들판을 감쌀 것만 같습니다.

그 외에도 취란화, 앵미, 앵채, 연앵초라고도 불리우니 아마도 앵두와 많은 연관이 있는 것도 같습니다.

김민수
인터넷에서 앵초에 대한 꽃말을 검색해 본 결과, 앵초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발견했습니다.


옛날, 독일의 작은 마을에 리스베스라는 여자 아이가 살고 있었어.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몸이 아파 오랫동안 앓아 누워 계셨지. 어느 봄날 앵초꽃을 몹시 좋아하시던 어머니는 "들판은 꽃으로 가득하겠지? 들판으로 나가 앵초꽃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푸념처럼 말했어. 이 말을 들은 리스베스는 곧 앵초꽃을 구하러 산 속으로 들어갔지. 앵초가 많이 피어있는 습지를 찾아서 부지런히 걷고 있을 때 누군가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거야.

"리스베스, 리스베스!"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주위를 둘러보니 머리에 예쁜 앵초꽃을 꽂은 예쁜 여인이 서 있었어.

"나는 앵초의 여신이란다. 너에게 이 꽃을 줄 터이니, 저 산 너머 성으로 가서 이 꽃으로 그 성의 문을 열어라. 그 성에는 네가 갖고 싶은 보물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하나만 가지도록 하여라."

리스베스는 앵초의 여신이 시키는 대로 성을 찾아가 앵초꽃으로 성문을 열었어. 성에서는 멋지고 잘 생긴 왕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지. 왕자는 리스베스를 반갑게 맞이하며 성안의 보물창고로 안내했어. 온갖 화려한 보석과 황금이 있었지만 착한 리스베스는 그 중에서 어떤 병이라도 고칠 수 있다는 보물을 하나만 골랐는데, 이것을 본 왕자가 말했어.

"과연 리스베스 아가씨는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니셨군요. 저랑 결혼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어머니의 병도 고치고 멋진 왕자도 만나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를 앵초는 간직하고 있단다.


김민수
내용상으로는 거의 비슷하지만 조금 더 문학적인 색채가 가미된 다른 앵초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머니가 보고 싶다던 앵초를 구하러 갔던 리스베스는 조심스레 앵초를 꺾었습니다.

"미안해, 앵초야! 우리 엄마가 너무 아파서 나올 수가 없는데 너를 너무 보고 싶어하거든. 미안해."

앵초의 요정은 리스베스가 안고 있는 앵초를 쳐다보았습니다. 그 앵초는 산 너머에 있는 보물성의 문을 열 수 있는 앵초였습니다. 봄이 오면 들에는 몇 천, 몇 만 송이나 되는 앵초가 꽃을 피우지만, 그 앵초 중 단 한 송이만이 보물성의 성문을 열 수 있는 열쇠였던 것입니다.

"너는 한 번만에 단 한 송이 밖에 없는 보물성을 열 수 있는 앵초를 얻은 행운을 얻었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착한 리스베스에게 하나님이 주신 선물일 거야."

보물성에 가 성문을 열어보니 성안은 온통 보석 천지였습니다. 온갖 보석이 산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서둘러, 리스베스. 문은 금방 닫힐 거야."

리스베스는 무슨 병이든 고칠 수 있다는 알약을, 요정은 마음 착한 리스베스를 위해 문이 닫히기 전 이런저런 보물들을 급하게 가지고 나왔습니다.

"백년 전에 너처럼 행운을 잡은 남자가 있었어. 나는 그를 안내해서 성안으로 들어갔지만 그는 보석을 보는 순간 욕심꾸러기로 변해 버렸어. 그래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그만 성문이 닫혀 버렸단다. 그 남자의 뼈가 성안 어딘가에 남아 있을 거야."

요정은 웃으면서 리스베스에게 자기가 가져온 보물들을 주면서 "네 행운을 부디 소중하게 쓰렴" 하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설앵초
설앵초김민수
꽃이 예쁘니 꽃 이야기도 풍부합니다. 그것도 행운이겠지요. 한라산 윗세오름은 아직 봄이 멀었는지 진달래가 막 꽃몽우리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앵초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일찌감치 접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계곡의 양지바른 꽃에 수줍은 듯 피어있는 앵초를 발견했습니다. 마치 '그 먼 길을 올라왔는데 인사는 하고 가야지요'라고 말하는 듯 합니다.

김민수
올해 처음으로 눈인사를 나눈 앵초, 어쩌면 저 앵초가 한라산에 피어나는 수천 수만 송이 앵초 중에서 '보물성을 여는 행운의 열쇠'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라산에서 막 피어나는 앵초를 보니 아직 봄이 우리 곁에 많이 남아있는 것 같아서 휘파람이 절로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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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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