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싱한 봄미나리에 막걸리 한 잔 드세요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57> 왕거머리 우글대던 미나리꽝

등록 2004.05.10 13:53수정 2004.05.10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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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싱싱하게 자라고 있는 비음산 미나리

싱싱하게 자라고 있는 비음산 미나리 ⓒ 이종찬

"아따! 미나리 그거 싱싱한 게 보기만 해도 정말 먹음직스럽게 보이네. 할머니! 그거 팔아요?"
"그걸 말이라꼬 하능교?"
"한 단에 얼마죠?"
"천원어치도 팔고 이천원어치도 팝니더. 그저 주는 기나 마찬가지지예."



비음산으로 올라가는 오솔길 옆에는 비음산의 맑은 물을 먹고 자라는 미나리가 빼곡히 자라는 미나리꽝이 서너 개 있다. 그 미나리꽝은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절로 내 어릴 때 고향집 옆에 있던 그 미나리꽝에서 꼬불거리던 왕거머리의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는 정말 정감 어린 곳이다.

특히 봄비가 내린 뒷날 그 미나리꽝에 가보면 너무나 싱싱하고도 파릇파릇한 미나리들이 '어서 날 베서 한입 가득 넣어 주' 하는 것만 같았다. 그 미나리들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입안 가득 헝근한 침이 고이면서 이내 코 끝에 향긋하고도 달착지근한 미나리 내음이 감돌았다.

그런 까닭에 나는 지난 3월 초부터 주말만 되면 마치 무슨 약속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 미나리꽝 근처로 산보를 나갔다. 그때부터 나는 이제나 저제나 하면서 그 미나리꽝의 미나리를 베는 날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 향긋하고도 달착지근한 미나리를 안주 삼아 막걸리 한 잔을 달게 마실 그 날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오메! 올개(올해)는 미나리깡(미나리꽝)에 머슨(무슨) 거머리가 이리도 많이 우글거리노? 거머리가 미나린지 미나리가 거머린지 구분이 안 갈 정도네."
"고마 거머리모(거머리면) 그래도 괜찮구로. 왕거머리 요 놈은 한번 물었다카모 지(제) 배가 터질 때꺼정 아예 안 떨어진다카이."
"거머리 그것도 사람을 알아보고 문다카이. 있는 년 살찐 장단지는 안 물고 똑(꼭) 없는 년 장작개비 겉은 장단지만 문다카이."


a 미나리가 베인 미나리꽝

미나리가 베인 미나리꽝 ⓒ 이종찬

그래.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내 고향집 옆 서너 마지기 남짓한 미나리꽝은 꼭두새벽부터 시끌벅적했다. 이른 아침 소죽을 끓일 도랑물을 뜨기 위해 하품을 입이 찢어지도록 하며 사립문 밖으로 나가면 흰 수건을 쓴 마을 어머니들이 학처럼 미나리꽝에 몰려앉아 미나리를 베느라 정신이 없었다.


미나리꽝 둑 위에는 어느새 밑둥이 가지런하게 베인 미나리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미나리꽝 사이로 난 비좁은 둑길 곳곳에는 배가 볼록한 왕거머리들이 온몸에 흙을 묻힌 채 꾸물거리고 있었다. 어떤 놈은 아예 배가 터져 검붉은 피를 흘리며 꿈틀대고 있는 놈들도 더러 있었다.

징그러웠다. 그 왕거머리들은 까만 고무신 신은 발로 짓이겨도 좀처럼 죽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왕거머리들을 죽이기 위해 도랑가에서 뾰쪽한 돌멩이를 들고 올라와 그 왕거머리들을 마구 짓이겼다. 그때마다 왕거머리들의 볼록한 배에서는 마을 어머니들의 검붉은 피가 물컹물컹 흘러나와 돌멩이를 벌겋게 적셨다.


그 해 우리 마을 미나리꽝에는 다른 해에 비해 거머리가 유난히 많았다. 그것도 검은 빛깔을 띠는 작은 거머리가 아니라 똥색을 띠는 큰 거머리, 그러니까 우리들이 왕거머리라고 부르는 그런 거머리가 많았다. 특히 왕거머리가 많은 해는 희한하게도 비가 자주 오지 않기 때문에 마을 어르신들은 적잖이 걱정을 했다.

당시 마을 어르신들은 첫 닭이 울기 전 논에 나갔다가 비음산에 해가 뜨고 미나리꽝이 못자리처럼 변할 즈음이면 마을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나리꽝 둑에 차곡차곡 쌓인 미나리 서너 단을 도랑물에 깨끗히 씻은 뒤 우유처럼 허연 막걸리를 두어 잔 나눠 마시며 고된 농사일에 대한 넋두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a 물에 잘 씻은 미나리

물에 잘 씻은 미나리 ⓒ 이종찬

"커! 금방 베낸 이 생미나리로 안주 삼아 막걸리 한 잔 마시는 바로 이 맛 때문에 그나마 사는 낙(樂)이 쪼매 있다카이."
"박산도 미나리가 맛있다꼬 마구 묵지 말고 줄기로 잘 살펴보고 묵거라이. 작년 이맘때 송산처럼 목구녕에 왕거머리가 붙어가(붙어가지고) 고생하지 말고."
"그나저나 미나리꽝에 거머리가 이리도 많은 거 본께네 올개도 디기(많이) 가물것구마(가뭄이 오겠구먼)."
"아, 우리 겉은(같은) 갈라먹기 농사야 잘 되도 그만 못 되도 그만 아이가. 뼈 빠지게 농사 지어봤자 땅 주인 배만 불리는 기지 뭐. 안 그렇나?"


그랬다. 금방 베낸 미나리 밑둥에는 간혹 거머리가 들어있기도 했다. 그래서 마을 어르신들은 도랑가에서 금방 벤 미나리 밑둥 위에 있는 마디를 낫으로 한번 더 자른 뒤 몇 번에 거쳐 깨끗이 씻었다. 간혹 미나리를 씻다가 기분이 께름칙하다 싶으면 미나리 줄기를 뚝뚝 부러뜨려 가며 다시 한번 거머리가 있는지 확인을 했다.

그렇게 마을 어르신들의 막걸리 주전자가 거의 비워갈 무렵이 되면 미나리 수확을 모두 마친 마을 어머니들은 베낸 미나리를 모두 도랑가에 옮겨 깨끗이 씻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나리를 짚으로 거의 다 묶을 즈음이면 미나리꽝 주인이 에헴하며 나타나 마을 어머니들에게 수고했다며 미나리 서너 단을 품삯으로 주었다.

"아나! 섬뫼때기(섬뫼댁)는 올(오늘) 왕거머리한테 피로 너무 많이 빨렸은께네 이거 한 단 더 묵고 기운 좀 차리거라."
"아나! 새터떼기 니도 한 단 더 가꼬 가거라. 요새 너거 어무이가 열 땜에 사슴(가슴)이 답답하고 물이 자꾸 캐인다(먹고 싶다) 캤제? 그런 병에는 생미나리 이기 최고인기라."
"오데 그뿐이가. 손발이 붓고 하는데도 미나리 이기 그만이라카이."


그날 아침 밥상에는 어김없이 장독에서 금방 퍼낸 고소한 된장과 함께 싱싱한 미나리쌈이 반찬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그때부터 일주일 내내 끼니 때마다 미나리쌈과 생미나리 무침, 삶은 미나리 무침 등 미나리를 재료로 삼은 반찬이 밥상 위에 올라왔다. 미나리 반찬이 입에 물려 더 이상 쳐다보기가 싫을 정도로 말이다.

a 생미나리와 된장 그리고 막걸리

생미나리와 된장 그리고 막걸리 ⓒ 이종찬

"또 미나리 반찬이야?"
"야가 야가(얘가) 철없는 소리 하고 있네. 봄에 묵는 이 미나리는 반찬이 아이라 약이다 약!"
"약도 너무 자주 묵으모 안 좋다카던데."
"그라모 니는 만날 김치는 우째 묵노? 김치로 자주 묵은께네 니 몸에 탈이 나더나?"


지난 일요일 오후에도 나는 이제나 저제나 미나리를 벨까 하면서 비음산 자락에 있는 그 미나리꽝으로 산보를 나갔다. 그리고 왕거머리 우글거리던 그 미나리꽝을 떠올리며 오늘 저녁 싱싱한 미나리를 안주 삼아 허연 막걸리를 쭈욱 들이키고 싶었다. 근데 그런 내 심정을 알아주기라도 하듯이 미나리꽝에서 칠십에 가까워 보이는 노부부가 낫으로 미나리를 베고 있는 게 아닌가.

눈이 번쩍 뜨인 나는 서둘러 그 미나리꽝으로 향했다. 그리고 노부부에게 살찐 미나리 한묶음을 샀다. 천원어치도 판다고 말씀하시는 노부부에게 나는 이천원어치를 달라고 했다. 미나리 이천원어치는 커다란 비닐봉지가 터질 정도로 많았다. 그만한 양이면 일주일 내내 미나리를 먹고도 남을 것만 같았다.

그날 저녁, 나는 싱싱한 미나리를 안주 삼아 허연 막걸리를 쭈욱쭉 들이키며 지난 3월 초부터 학수고대하던 소원을 풀었다. 그날 먹은 미나리는 오래 기다려온 나의 바람처럼 너무나 향긋하고 달착지근했다. 가게에서 하루에 한 병씩 늘 사 먹던 막걸리도 그날따라 더욱 감칠맛이 있었다.

"아빠! 이 풀은 또 뭐야?"
"이게 미나리라고 하는 거란다. 빛나도 한번 먹어볼래. 입에 넣으면 향긋하고 씹으면 달착지근한 게 정말 맛있어."
"먹어볼래."
"어때?"
"또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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