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의 비정규직 대책, 재벌에 완패하나

[손낙구 칼럼] 비등점 넘긴 사회갈등에 군불 때서는 안된다

등록 2004.05.11 19:53수정 2004.05.12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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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한 모습, 보기에도 민망하고 가슴이 꽉 막힌다. 비정규직 대책을 둘러싼 힘겨루기에서 노무현 정부가 재벌과 자본가 단체에게 두 손 두 발 다 든 광경 말이다.

1년여를 끌어온 정부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은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들어 앙상한 가지만 남더니, 재벌과 경제부처의 강력한 반대로 5월 11일 국무회의에서 확정하려던 계획조차 안건도 못 올리는 수모로 끝나고 말았다. 이른 시일 안에 다시 다룬다지만 이미 내용 면에서 개혁성을 잃어버려, 안타깝지만 재벌의 승리-정부의 완패로 가고 있다.

공공부문에서 비정규직 해법을 마련해 사회갈등을 푸는 실마리를 찾겠다던 정부의 의욕은 1년 동안 재벌과 부자언론, 정부 내 경제부처에 시달린 끝에 다른 영역에서도 거의 꺾여버린 듯하다. 26개 업종에 한해서만 파견 노동자를 쓸 수 있게 한 현행 파견법을 개정해 거의 전 업종에서 마음대로 쓸 수 있게 허용하겠다며 모든 걸 체념한 모습이다.

이밖에 차별해소 방안의 알맹이라 할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이 빠졌다거나, 노동권 보장이 빠진 특수고용노동자 대책 등 대부분 바닥 수준이지만, 이조차도 자본가 단체의 압력에 따라 거듭 뒷걸음질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 사회에서 비정규직 문제는 이미 비등점을 넘어 폭발 직전의 상황에 이른 지 오래다.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훌쩍 넘긴 786만에 달하는 규모도 규모이고, 극심한 차별에 생계가 불가능한 임금 수준에 무엇보다도 영원히 정규직이 될 수 없다는 절망이 이들의 눈에 핏발이 서리게 하고 있다. 막 다른 골목으로 몰아 짓누르면 결국 터지고 만다는 노동문제의 교훈을 우리는 이미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 얻었지만 대책은 요원했다.

이런 점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 공약에서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개선하고 균등한 대우을 받게 해야 하며, 전체 노동자의 56%에 달하는 비정규직이 더 늘지 않도록 남용방지책을 세우겠다'고 방향을 잡은 것은 문제를 정확히 짚은 것이다. 출범 후 정부가 사용주로 있는 공공부문에서 먼저 해법을 찾으려 한 것도 의미 있는 출발이었다.

그러나 출발 뒤부터 문제는 계속 꼬였다. 그 이유는 '부자들의 저항' 때문이었다. 재벌위주의 성장중심 정책에 물든 힘센 경제부처 앞에만 서면 노동·복지관련 부처가 한없이 작아지는 오랜 풍경은 노무현 정권에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통계를 내는 일부터 각 부처가 손발이 맞지 않아 몇 달 동안 제자리걸음만 했다.


지난 해 10월 26일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동자 이용석씨의 분신자살 사건이 터지자 노동·행자·법무 3부장관은 '이번 주 실태조사를 마치고 연말까지 대책을 내놓겠다'고 밝혔으나, 실태조사 결과는 해를 넘겨 올해 3월에야 나왔다.

조사결과 161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난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놓고 의견이 갈렸지만, 결과는 힘센 자들의 것이었다. 전경련, 경총, 대한상의 등 다섯 개 자본가 단체는 비정규직을 보호할 대책을 세우는 것 자체가 경제를 망치는 일이라며 모든 책임은 정규직을 지나치게 보호하기 때문이라고 총공세에 나섰고, 경제부처는 그 입이 됐으며, 승리는 이들의 것이 됐다.


애초의 초안은 16분의 1 수준인 10만 명에 대한 정규직 전환이었는데, 이마저도 재벌과 경제부처, 부자언론의 집중 공격을 받아 3만2천으로 줄었고 대책 확정 시기도 다시 연말로 늦춰졌다. 더구나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파견, 용역 등 외주로 돌리겠다는 정반대의 해결책이 추가됐다. 비정규직을 민간부문으로 추방해 '해결'하겠다는 웃지 못할 논리가 버젓이 정부 정책이 됐다.

노무현 정권의 비정규 정책은 1년만에 비정규직 규모를 줄여나가겠다는 출발점과는 정반대로 비정규직을 늘리는 초라한 몰골이 돼버렸다. 우리 사회에서 개혁정책, 특히 노동자·농민·빈민 등 밑바닥 사람을 살릴 민생개혁정책을 실현하는 일은 참으로 힘겨운 일이다. 밑바닥 사람들의 희생으로 재산을 불리는 기득권 세력의 저항을 꺾지 않고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문제의 기득권 세력은 한국 100대 부자 재산의 57%를 차지하고 있는 삼성·롯데·현대·엘지의 이씨·신씨·정씨·구씨 가문 등 재벌과, 사주 자신이 100대 부자 안에 들어 있는 조선·중앙 등 부자언론이다.

이들은 자신들에게는 비정규직 문제의 책임이 없으며 모든 게 대기업 샐러리맨과 생산직 노동자에게 있다고 강변하고 있다. 기껏해야 생계를 해결하고 융자받아 자기 집을 살 수 있다 해도 자식들 교육비 걱정에 온갖 스트레스 받으며 하루하루 일벌레로 살아가는 '불쌍한 인생'들이 최고의 부자들 대신 자신의 몫을 양보해야 할 범인이 된 것이다. 모든 민생문제가 그렇듯이 자신들은 털끝만큼도 양보하지 않으려는 한국 최고 부자들에 당당히 맞서 양보를 받아내지 않는 한 비정규직 대책은 세우기 어렵다.

냉전체제와 지역주의로 얼룩진 3김시대에는 독재냐 민주냐 또는 한미·남북관계에서 어떤 자리에 서느냐가 개혁성을 판가름하는 기준이었다. 그러나 빠르게 변하는 정세와 시대흐름을 감안하면 앞으로는 개혁성이 민생과 경제정책 영역에서 정해지는 추세로 가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재벌 등 경제기득권 세력 앞에서 맥을 못 추는 노무현 정권의 모습은 개혁여당-진보야당이 아름답게 경쟁하는 바람직한 민생정치를 설계하는 데 어두운 그림자로 다가오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비정규직 대책에서 재벌에 완패하는 것은 정부여당이 개혁여당으로 거듭나느냐 하는 문제에 머물지 않고 훨씬 심각한 결과를 낳을 것이다. 비정규직에 대한 극심한 차별과 말할 수 없는 고통은 이미 노동문제를 넘어 사회갈등의 핵심문제가 됐고 폭발 직전의 위험천만한 상황에 와 있다.

노무현 정권의 비정규직 정책이 정반대로 돌아선 것은 단순히 정권의 개혁성에 관한 문제로 그치지 않고, 비등점을 한참 넘긴 비정규직 문제에 군불을 때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다. 정부가 다시 고삐를 다잡고 핏발선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살길을 찾아줄 제대로 된 정책을 세워야 하고, 노동계와 시민사회 등 각계각층이 시급히 나서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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